모델에서 향수 브랜드 나흐(Nahes)의 디렉터가 된 이세한의 섹시한 향수 이야기.

<W Korea> 모델에서 나흐의 디렉터가 됐다. 준비하는 데 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이세한 뉴욕에 있었을 때다. 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커지면서 친구들과 전시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냄새를 주제로 한 영상을 작업하게 됐는데, 그 전시에 꼭 필요한 향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원하는 향을 구현해줄 업체나 브랜드를 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그래서 직접 향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나흐로 이어졌다.
향을 다 맡아봤고, 전부 꽤 새롭게 느껴졌다.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직관적일 것, 또 섹시해야 할 것’이 향을 만들면서 끝까지 놓지 않은 기준이다. 사람들이 이 향을 맡았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장면이 있었으면 했다. 조향사와 그 지점을 찾는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다. 수많은 테스트와 갈아엎는 과정을 거쳤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다. 이 과정을 알았다면 감히 시작하지 못했을 것 같지만 애쓴 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타 브랜드와는 다른 새로운 무드와 감각은 분명 완성된 것 같다.

나흐를 설명할 때 베를린 얘기를 많이 했다. 향에서도 거칠고 투박한 도시의 풍경이 연상되기도 했다.
세한을 거꾸로 한 ‘Nahes’는 독일어로 ‘가까이 있는 것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베를린을 여행했을 때 그 분위기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감각이 나흐의 태도에 그대로 적용됐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베를린이 내건 슬로건 ‘Poor but sexy’가 나에게 하나의 기준이 됐다. 화려하거나 완벽한 매력이 아니라 조금 부족하고 거칠어도 태도와 분위기로 충분히 섹시할 수 있다는 말. 그게 나흐가 추구하는 바와 정확히 겹쳤다.
보틀 디자인 얘기도 해달라.
단정하고 절제된 형태지만, 세부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 안에 담긴 본질에 집중하게 만들고 싶었다. 높은 투명도, 날렵한 모서리 라인, 무겁게 닫히는 캡, 보이지 않는 곳까지 새긴 나흐의 로고가 특징이다.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직관적인 오브제라고 생각해 꽤 집요하게 디테일을 다듬었다.
패션계에서 일해서인지 캠페인 비주얼도 심상치 않다.
첫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가장 조언을 많이 구한 이는 렉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백석이고, 사진과 영상에 포토그래퍼 목정욱과 송태종 감독이 각각 참여했다. 모두 내가 존경하는 작업자들이고 섹시한 비주얼에 독보적인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적인 제품 촬영은 포토그래퍼 김재훈이 도맡아주었고, 최근에는 서경환 감독, 배우 나나와 함께 작업한 비디오를 공개했다. 영상에는 나흐적인 날것의 무드와 솔직한 순간이 더 선명하게 담긴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만족스러운 비주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작업자들은 물론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비주얼 작업에 욕심이 있어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나흐의 세계를 비주얼로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패션은 결국 옷이 잘 보여야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데, 향수는 병이 화면에 나오지 않아도 그 향에 따른 무드와 기억, 장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즐기려 한다.


향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Phoebe’와 ‘Child of the 90s’가 좋았다.
사람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것도 ‘PHOEBE’다. 부드럽고 살냄새처럼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머스크 계열이라 편하게 끌리는 향이다. 기획할 때부터 인기가 많을 거라 예상한 향인데, 특히 여자 배우들의 선택을 많이 받았다. 내가 가장 자주 뿌리는 향은 처음 만든 ‘Child of the 90s’다. 90년대에서 영감을 받아 그 시대의 섹시함을 표현한 향으로, 짙고 스모키한 대지 향이 매력적이다. 개성이 분명한 향인데, 길을 걷다가 혹은 행사장에서 사람들이 먼저 어떤 향이냐고 가장 많이 물어본 향도 이 향이다.
앞으로 나흐와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었으면 하나?
결국 나흐는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어느 날 길가에서 혹은 어떤 자리에서 무슨 향이냐고 묻게 만드는 존재였으면 한다. 많이 팔리는 향수라기보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분명하게 살아 있는 향. 그런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