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아메리카나 스타일의 교과서, 26 FW 랄프 로렌 남성복 컬렉션

명수진

90년대 아메리카나 스타일의 교과서, 26 FW 랄프 로렌 남성복 컬렉션

1967년, 뉴욕에서 론칭한 랄프 로렌은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유대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폴로 제국을 일군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삶 자체가 곧 아메리칸 드림이었고,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프레피 룩과 노동자들의 워크웨어 경계를 허물며 가장 미국적인 패션 정체성을 확립했다. 최근 90년대 아메리카나 스타일이 재조명되면서 랄프 로렌 역시 N번째 전성기를 맞이했다. 무려 20년 만에 밀라노 맨즈 패션위크에서 런웨이 쇼로 복귀한 랄프 로렌에 뜨거운 관심이 쏠린 이유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랄프 로렌다운 방식으로 ‘원조의 맛’을 보여준 이번 컬렉션에 찬사가 쏟아졌다.

26 FW 랄프 로렌 컬렉션은 밀라노 맨즈 패션위크 첫날인 1월 16일 금요일 저녁, 팔라초 랄프 로렌(Palazzo Ralph Lauren)에서 열렸다. 1940년대 양식의 유서 깊은 개인 저택이자 유럽 본사로 사용 중인 이 공간은 랄프 로렌의 라이프스타일 철학이 구현된 장소다. 관객들은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마치 디자이너의 집에 초대된 손님처럼 쇼를 감상했다. 테마는 ‘아메리칸 드림 인 이탈리아(American Dream in Italia)’. 미국식 낭만을 이탈리아식 무드 위에 얹은, 다분히 랄프 로렌다운 설정이었다.

이번 시즌은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과 랄프 로렌 퍼플 라벨(Ralph Lauren Purple Label)이 하나의 런웨이에 통합된 첫 컬렉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쇼는 자연스럽게 두 개의 챕터로 나뉘었다.

전반부는 폴로 랄프 로렌의 90년대 향수를 전면에 내세웠다. 바이올렛과 오렌지 컬러 블록의 오버사이즈 럭비 셔츠, 카무플라주 카고 팬츠, 푸퍼 재킷, 하이킹 부츠로 완성한 고프코어(Gorpcore) 룩으로 오프닝을 시작했다. 이어 플리스 풀오버, 초어 재킷, 인디고 데님, 스웨이드 웨스턴 재킷, 옥스퍼드 셔츠, 덕부츠, 헌팅캡까지 서부 개척 시대와 미국 워크웨어의 유산이 현대적으로 재조합됐다. 드레시한 팬츠에 뉴에라 캡을 얹거나, 옥스퍼드 셔츠 위에 빈티지 낚시 베스트를 더한 하이-로 믹스는 랄프 로렌이 90년대 그랬던 것처럼 워크웨어와 프렙의 경계를 가볍게 허물었다. 스포티한 선글라스, 슬라우치 비니, 비즈 네크리스, 체크 머플러, 실크 스카프, 남성용 발레리나 슈즈, 그리고 패치워크 디테일은 룩에 리듬을 더했고, 브라운부터 바이올렛, 핑크, 옐로, 레드, 오렌지까지 이어진 컬러 팔레트는 런웨이를 한층 생기 있게 만들었다. 모델들은 각각 시인, 산악인, 목장주, 스노보더, 뮤지션 등 다양한 캐릭터를 대표했는데, 이러한 설정을 통해 런웨이와 리얼웨이를 아우르는 깊은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퍼플 라벨을 선보인 후반부에는 카멜, 멜란지 그레이, 아이보리, 차콜, 잉크 블루 팔레트로 클래식한 남성복의 정수를 보여줬다. 타탄과 핀스트라이프 슈트, 넥타이와 행커치프로 완성한 룩은 90년대 ‘랄프 로렌식 멋쟁이’의 교본처럼 보였다. 트위드 블레이저에 더한 스웨이드 패치는 전통적인 사냥 재킷의 디테일을 세련되게 해석했고, 케이블 니트, 플란넬 셔츠, 코듀로이 팬츠, 무스탕 재킷, 파카, 베이스볼 점퍼, 캐시미어 트레이닝 팬츠, 큼지막한 보스턴 백까지 주말을 즐기는 신사의 옷장이 런웨이 위에 펼쳐졌다. 턱시도 위에 잉크 블루 점프슈트를 입고 허리에 웨스턴 스타일 실버 벨트를 믹스 매치한 룩은 후반부 분위기를 뒤집는 반전 카드였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이 벨트는 미국 원주민 출신 아티스트 닐 자라마(Neil Zarama)와의 협업으로 완성됐으며, 터키석 실버 주얼리와 버클 디테일 역시 컬렉션 전반에 배치되어 공예적 밀도를 높였다.

컬렉션 전반을 관통한 90년대 향수는 피날레에서 정점을 찍었다. 1990년대 랄프 로렌과 협업했던 모델 타이슨 벡포드(Tyson Beckford)가 브라운 오버코트를 입고 등장하며 쇼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 디자이너 랄프 로렌은 여성복 컬렉션 준비로 뉴욕에 머무르는 중으로, 이날 피날레 무대에 서지 않았다. 대신 화이트 재킷을 입은 웨이터들이 샴페인 트레이를 들고 등장했다. 박수 대신 환대를 선택한 엔딩은 랄프 로렌이 어떤 방식으로 우아함을 정의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영상
Courtesy of RALPH LAU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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