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의 눈이 모이고 입을 열게 한 것들을 돌아봤다. 여전히 뜨겁거나, 이미 지나갔지만 되짚어봐야 할 조각들을 모으자 2025년이 선명해진다.
◆ (숨겨진) 명작의 전당
더 흥행하거나 더 널리 회자되었어야 마땅할 올해의 작품을 꼽았다. 어쩌면 여기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못지않은 재미와 의미, 혹은 <폭싹 속았수다>보다 더한 감동이 있을지 모른다.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에 마냥 기대지 않고, 영화가 펼쳐 보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주렁주렁 꿰어 ‘대단히 영화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 변성현의 최고작. 현실에서 살짝 붕 뜬 캐릭터들과 제4의 벽 깨기, 서부극 패러디 등 자칫 과할 수 있는 요소들을 치밀하게 뒤섞어 기어코 폭발시키는 능청스러운 웃음의 밀도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캐릭터 이름, 소품, 대사… 무엇 하나 대충 쓴 게 없다. 존재가 지워져 있던 아무개(설경구)가 ‘고명’ 같은 존재가 되고, 고명(홍경)이 역사 속의 ‘아무개’로 뒤집히기까지. 진실이 거짓에 포박되고, 거짓 속에서 진실이 피어오르기까지. 이항 대립하는 구도 속에서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길어 올린 솜씨도 발군이다.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변성현 세계가 진화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데 모자람이 없다.
– 정시우(영화 칼럼니스트)

JTBC <협상의 기술>
최고 시청률 10%를 넘긴, 그것도 ‘대가’가 연출한 작품을 두고 감히 ‘숨겨진’ 명작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시청률이 중요한 성적표는 아닌 시대지만, 1화 시청률 3%대로 시작해 세 배 이상 점프하며 종영한 쾌거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 하루 앞서 공개된 <폭싹 속았수다>의 화제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안판석은 드라마 시청 행위를 호사스러운 시간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연출자다. 그의 드라마에서는 어쩐지 급한 일이 있어도 방정맞게 뛰어가지 않는, 세련된 인간의 품위가 연상된다. <협상의 기술>은 M&A라는 소재를 가지고 늙은 남자 여우들의 사내 정치까지 그려내면서, 감정을 함부로 고조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굉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단연 지난해의 숨겨진 명작이었던 tvN <졸업>에 이어 또다시 안판석에게 선택된 신인, 차강윤 역시 근래의 즐거운 발견 중 하나다.
– 권은경(<더블유> 피처 디렉터)

영화 <세계의 주인>
<우리들>과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의 신작은 10대 소녀 ‘주인’과 주인을 둘러싼 세계에 관한 영화다. 명랑하고 쾌활한 주인의 일상에서 언뜻 감지되는 미지의 예감이 구체화되고 한 차례 폭발할 때 <세계의 주인>은 한 사람의 안팎으로 깊게 내려앉고 너르게 두른 세계라는 단어를 곱씹게 만든다. 개인의 삶과 그 삶에 중첩된 이들의 삶이 하나씩 각자의 사연과 사정을 마주하는 순간 세계의 불을 하나씩 밝히는 것만 같다. 주인공의 복잡다단한 속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는 화술의 포용력이 대단하다. 타인의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스스로 발화하는 순간까지 기다릴 줄 알며 곡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관점의 세심함이 유연하면서도 단단하다. 단언컨대, 올해 놓쳐서는 안 될 한국 영화다.
– 민용준(영화 평론가)

영화 <씨너스: 죄인들>
이방인에게 바치는 끝내주는 블랙 호러. 블루지한 리듬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이 뱀파이어물은 193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적 역사를 장르로 관통한다. 흑인 쌍둥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속 뱀파이어는 인종을 넘어 통각을 공유하며, 하나의 사념체로서 같은 존재가 되자고 유혹한다. 돌비 시스템을 갖춘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관객 역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충만한 영성과 피가 끓는 관능 속에서 블루스와 아일랜드 민요는 하나가 되자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박스오피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관객수 약 7만 명에 그쳤을 뿐이다. ‘한’의 정서와 약자의 설움을 아는 한국인에게, 올해가 가기 전 이 영화를 권한다. 가능하면 사운드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서, 독주 한 잔 곁들이면서. 우리 역시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가 되자, 음악과 피와 화염 속에서.
– 이예지(프리랜스 에디터)

영화 <3학년 2학기>
특별할 것 없어서 더 특별한 성장 영화다.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2학기 학생들은 남동공단에 자리한 회사에서 현장 실습을 한다. 이제 막 노동 현장에 뛰어든 청소년들 앞에는 진로에 대한 다양한 갈림길 따윈 없다. 이것은 위기를 넘기고 문제를 해결하는 성장담이 아니다. 이미 정해져버린 그 길 위에서, 조금 일찍 어른이 되어야 하는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한다. 특별히 착하거나 나쁜 어른도, 거대한 모순과 노동 현장의 문제를 바꿀 힘도, 물리칠 악당이나 승리할 영웅도 없는 현장엔 오직 삶(과 작은결심)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걸음을 우직하게 따라가는 카메라는 마침내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들의 등을 토닥인다. 여기 사람이, 삶이, 우리가,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진심이 있다.
– 송경원(<씨네21> 편집장)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올해의 숨은 걸작을 말할 때,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고도 정작 올해 국내에서는 2만 관객을 넘기지 못한 이 영화 앞에서 잠시 멈칫하게 된다. 인도 영화하면 떠오르는 ‘갑분 뮤지컬’이 아닌 제 3세계 예술 영화의 낯섦을, 고층 빌딩이 즐비한 현대적 뭄바이의 풍경에 생경함을 느끼는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칸영화제에서 만난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서구권에서는 인도에 대해 늘 묻죠. 여성이 살기 힘들지 않냐, 여성이 영화감독이 되기 어렵지 않냐고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계급과 종교 등 다양한 교차성이 존재합니다.” 카스트제도와 힌두교, 가부장제가 얽혀 작동하는 인도 여성의 노동, 사랑, 섹스, 일탈을 시적 영화 언어로 풀어낸 이 작품과 조우하며, 발견과 배움 그리고 성찰이 함께하는 감각적인 경험을 해보시길.
– 임수연(영화 칼럼니스트)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파라다이스>
올 초 혜성같이 등장해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았지만, 추천하기가 참 난감하다. 추천에는 설득력 있는 이유가 붙어야 하는데, ‘왜 재미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시리즈의 ‘진짜’ 장르를 밝히는 일조차 무례한 까발리기다. 최대한 모르고 봐야 뒤통수가 얼얼하다. 젊고 매력적인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경호 책임자가 범인으로 몰리고 억울함을 벗기 위해 진범을 색출한다는 플롯만 보면, 클리셰 범벅 같다. 하지만 뻔함은 거기까지. 처음엔 그저 고증이 허술한 미국 정치 스릴러처럼 굴던 이 작품은 1화 말미에 이야기의 실체가 드러나며 시청자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다. 더 이상 세상 어떤 드라마도 충격과 반전을 줄 수 없다고 믿으시는 분들께 감히 강추한다.
– 정성욱(칼럼니스트)
◆ 블록버스터 전시의 난감함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도 <론 뮤익>전을 앞두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론 뮤익 개인전은 매번 엄청난 수의 관객을 기록했다. 2006년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26만7,000명, 같은 해 에든버러에서 9주 만에 13만 명, 2010년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서 11만8,000명. 2023년 파리 까르띠에 재단에서는 5개월간 40만 명이 다녀갔다. 그러니 국립현대미술관이 입장 대기 가능성과 단체 관람 금지를 미리 공지한 건 합리적 판단이었다. 4월 11일부터 7월 13일까지 열린 서울 전시에는 53만3,035명이 다녀갔다. 하루 평균 5,671명, 시간당 평균 640명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2024년 한 해 동안 10개의 전시를 치르며 맞이한 관객이 165만 명이었으니, 전시 하나로 연간 관객의 3분의 1을 끌어모은 셈이다.
이 전시는 처음부터 블록버스터 전시가 될 운명이 예상되었지만, 53만 명이 넘는 관객 숫자는 흥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최다 관객 기록은 2022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의 25만 명이다. <론 뮤익>은 그 두 배를 끌어모아 압도적인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 다른 나라에서 열린 론 뮤익의 역대 전시와 비교해도 서울은 하루 평균 관객 밀도가 2배에서 3배 이상 높았다. 그러니, 미술관의 ‘마음의 준비’가 충분했는지조차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 엄청난 흥행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조각가인 론 뮤익은 그 엄청난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진지한’ 미술 잡지들은 대개 거리를 두는 작가다. 하지만 현상이라 할 만한 이 엄청난 관객수는, 론 뮤익의 작품과 전시가 진지한 비평을 받든 받지 않든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야 할 주인공은 관객도 비평가도 아닌, 국립현대미술관이다. 하지만 관객수가 10만 명 단위로 경신될 때마다 배포된 미술관 측의 보도자료에선 아쉽게도 그런 고민이 보이지 않았다. 2025년 서울, 한국의 미술 관객들은 왜 <론 뮤 익>전에 열광한 걸까? 보도자료에선 질문에 대한 답이나 단서 대신, 숫자와 결과만 확인할 수 있었다. ‘50만 명 돌파’, ‘SNS 노출 325만 건’, ‘신규회원 가입 4.5배’, ‘2030세대 관객 70%’. 분석은 없었다. 전시장의 인구 밀도가 정상적 관람을 어렵게 만들 정도로 혼잡했다는 사실도, 이것이 파리에서의 전시보다 2배 높은 수치였다는 비교도 없었다. 극사실적 고독의 조각품 앞에서, 관객이 처한 현실은 ‘인구 과밀의 포토존’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론 뮤익 개인전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술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흥행에 그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사실인지 그저 추측인 건지, 벌써부터 다음 블록버스터 소문이 떠돈다. 53만을 넘어설 국제적인 작가, 이유는 몰라도 관객몰이에는 성공할 전시. 이번에도 미술계의 냉담함쯤이야 가볍게 뛰어넘을지 모른다. 바로 그 장면이 내년 이맘때쯤 ‘올해의 장면’으로 떠오를지 몰라 조금 두렵다. 미술관 전시가 흥행몰이를 했다는 사실은 분명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현상에 대한 분석과 고찰, 연구하려는 태도 대신 앞으로 ‘블록버스터 유치’에 방점이 찍힐까 우려된다.
– 박재용(프리랜스 큐레이터 및 통번역가)
PHOTOS | COURTESY OF 국립현대미술관. 론 뮤익, 마스크 II, 2002, 혼합 재료, 77X118X85CM. 개인 소장.
◆ 2025 극장가의 역전극
아직 갈 길이 멀다. 11월 초 기준 올해 극장 관객수와 매출액은 2024년 대비 약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극한직업>, <기생충>과 함께 한국 영화 산업의 정점을 찍은 2019년과 비교하면 매출액은 56%, 관객수는 62% 감소했다. <위키드: 포 굿> <주토피아 2> <아바타: 불과 재> 등 연말 기대작이 얼마나 흥행을 견인할지가 관건이겠지만, 그럼에도 <파묘>, <범죄도시 4> 등 2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한 2024년에 비해 흥행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화제는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의 강세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올해 극장 매출액 1위(관객수 561만 명, 전체 2위)에 올랐고, 여전히 박스오피스 3위권 안을 지키고 있는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300만 돌파했다. 일각에서는 <귀멸의 칼날>의 우익 내지는 <체인소 맨>의 여성 혐오 논란을 언급하며, 이 두 작품의 관객층을 기존 극장 소비층 통계와 비교해 해석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통상 극장 관객의 성비는 여성 6 : 남성 4 정도로 추정되며, 블라인드 시사회 모집도 이 비율을 따른다.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여성 관객 비중이 76%였다. 반면 CJ CGV 통계에 따르면 <극장판 귀 멸의 칼날: 무한성편> 예매자 중 남성은 54%, 20대가 40%,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남성 59%, 20대 48%로 나타났다. 다른 작품에 비해 ‘20대 남성’의 소비가 두드러진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과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단순히 연결 짓는 것은, 물론 독자의 관심을 끄는 자극적인 헤드라인 뽑기가 가능하겠지만 두 작품의 인기 요인을 제대로 분석하는 데에는 생산적이지 않다. 두 영화의 흥행을 논할 때 함께 언급해야 할 작품은 차라리 올해 관객수 3위, 매출액 2위를 기록한 의 속도감이나 두 편 연속 천만 관객을 돌파한 <아바타> 시리즈가 선사하는 감각적 체험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축적해온 작화와 표현력이 요즘 관객이 극장에서 기대하는 스펙터클에 효과적으로 부응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OTT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만화책–TVA–극장판’으로 이어지는 IP 소비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 점도 흥행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한편 봉준호와 박찬욱의 신작이 나란히 개봉한 올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은 조정석 주연의 <좀비딸>(563만 명)이다. 사실 <좀비딸> 같은 작품이 1년 중 최대 성수기인 7월 마지막 주에 개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예전이라면 <도둑들>, <군함도>, <신과함께–인 과 연> 같은 대작이 자리하던 시기다. 고비용 제작과 멀티 캐스팅으로 ‘500만은 기본’이던 시대는 이미 코로나19 이후 종언을 고했다. 스펙터클을 보여주려면 이제 규모나 배우의 이름값이 아니라, <귀멸의 칼날>이나 <체인소 맨>처럼 ‘요즘 감성’으로 구현해야 한다. 반대로 “정말 웃기다”거나 “너무 슬프다”는 식의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작품이 더 쉽게 화제되고 선택받는 시대다. 그런 점에서 (과거 <7 번방의 선물>의 성공 사례를 상기시키는) <좀비딸>은 웃음과 눈물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웃기다 울리는’ 영화로 포지셔닝해 시장 트렌드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송강호, 하정우의 시대를 지나 마동석과 조정석의 시대다. 마동석의 ‘사이다 주먹’과 조정석의 코믹한 재능, 다채로운 끼는 쇼츠가 범람하는 시대에도 40~50대 배우들이 젊은 관객의 선택을 받게 하는 강력한 무기다.
독립·예술영화는 이미 개봉한 영화를 재포장해 시장에 재진입시키거나 3대 영화제 수상작이 힙스터의 관심 대상이 됐던 작년의 흥행 공식이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대신 <퇴마록>의 성취를 주목하고 <8번 출구>, <해피엔드> 등 일본의 새로운 영화 조류를 발견한 관객층이 아트하우스 시장의 대세를 이끌었다. 상업 영화지만 시네필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한국에서도 북미에서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뒀다. 히피와 혁명이 남긴 유산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저항을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지만,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이 시대정신과 공명하는 지금, 더 넓은 관객층의 관심을 끌기에는 어려웠던 걸까 하는 생각이 불쑥 스친다.
– 임수연(영화 칼럼니스트)
◆ 젊은 시, 젊은 독자

‘팝업’화된 휘발성 이벤트와 프로모션이 출판계를 멱살잡이하듯 이끈 한 해였다. 여전히 특정 인플루언서의 영향이 컸고, 미디어셀러 효과는 TV·영화에서 OTT·유튜브, 기어이 숏폼으로 흘러갔다. 그 사이에서도 묵직하게 방향을 유지한 흐름이 있다. 바로 시의 약진이다.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올해 한국 시 분야는 전년 대비 권수·매출 모두 30%가량 성장했다. 단기간에 체감 가능한 도약이며, 올해 출판 시장의 ‘확실한 승자’로 자리 잡은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올해 시 구매자의 약 36%가 1020세대였으며, 또 박참새, 고선경 등 1990년대생 시인이자 톡톡 튀지만 기존 문단의 자장 안에서 활동하던 시인들이 특히나 사랑받은 해였다.
나아가 주목할 만한 변화는 시의 생산·유통 방식까지 젊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라진 주문형 비디오(VOD)를 떠올리게 하는 주문형 출판(POD)을 통해 젊은 시인들이 낸 시집이 큰 사랑을 받았고, 관련 굿즈는 품절 사태를 겪었다. 특히 차정은은 2023년부터 POD로 시집을 펴냈는데, 올해 6월 출간한 <여름 피치 스파클링>은 5주간 판매 1위를 기록했다. 한강, 나태주를 앞서는 성적이다. 스스로 글을 쓰고 책을 냈다는 점은 독립출판의 정서와 닿아 있으나, 출판유통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독자와 만난 방식은 새로운 DIY 모델에 가깝다. 마치 유튜브에서 콘텐츠를 직접 제작·배포하는 크리에이터와 닮았다. POD를 활용한 출간이 일시적 현상으로 그칠지, 새로운 출판 생태계의 한 축이 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플랫폼 위에서 가벼운 몸짓으로 시를 쓰고 펴내는 젊은 시인들의 감각은, 올해 그들의 책 제목처럼 꽤나 ‘스파클링’했다.
– 허영진(교보문고 도서 구매팀 파트장)
◆ K팝 신인 보고서
올해도 K팝 하늘엔 많은 새 별이 떴다. 그중 유독 시선이 향하고 빼어났던 네 팀을 분석한다.

하츠투하츠
2022년 7월 22일, 뉴진스가 데뷔했다. 섹시냐, 큐티냐, 걸크러시냐. K팝 걸그룹 우주를 지탱해온 ‘콘셉트의 삼체(三體)’가 붕괴한 날이기도 하다. 비유하자면, 이때를 기점으로 K팝 걸그룹 세계의 자전축은 몇 도쯤 흔들렸다. 이후 걸그룹들은 저마다 제4원소를 찾기 위해 헤맸다. 그리고 올해 2월 24일. 심우주에서 하츠투하츠가 ‘스몰 뱅’을 일으켰다. 데뷔곡 ‘The
Chase’를 통해서다.
이쯤, 뉴진스가 변화시킨 것을 떠올려본다. 재즈적 코드 진행, 미니멀한 멜로디, K팝 1세대 스타일의 랩, 세기말 알앤비의 소심한 향취…. 흐느적대는 벌스와 브리지가 종종 ‘너무 힙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의식한 걸까. 후렴구만큼은 확실히 귀에 때려 박았다. ‘Attention~’의 옥타브 상승, ‘Super Shy, Super Shy’, ‘What’s Your ETA, What’s Your ETA’의 빠른 반복 등으로 대중성을 절박하게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나 하츠투하츠의 등장은 저런 멱살잡이마저 없었기에 충격적이었다. ‘흐느적’한 벌스만 가득하고 ‘끌어올리는’ 후크는 전무한 ‘The Chase’의 2분 59초는 호접몽처럼 그저 흘러갔다. 귀를 의심하며 황급히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른 첫 청취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발표한 싱글 ‘Style’은 템포와 화성의 조도를 높인 댄스곡이다. 그래도 여전히 ‘함흥’보단 ‘평양’ 쪽이었다. 10월 미니 1집 <Focus>의 타이틀곡 ‘ Focus’는 어땠나. 분당 박자수는 ‘Style’보다도 올라갔지만, 선율과 화성의 기승전결 드라마는 더없이 뿌옜다. 목표를 의도적으로 상실하려는 듯, 하츠투하츠와 그들의 A&R은 숏폼 시대에 ‘느좋’만으로 충분한 바이브 중심 음악으로 게임 보드를 펼쳐간다. 수록곡 ‘Pretty Please’에서 S.E.S.를 떠올리게 하는 뉴잭스윙 요소가 등장하는데, 이는 이들의 지향을 짐작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처럼 보인다. 고품질, 중음역, 저자극의 음악으로 하츠투하츠는 대체 무슨 퍼즐을 깔고 있는 걸까. Heart to Heart,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들이 다음에 어떤 조각을 더할지, 천천히 따라가보고 싶어진다.
– 임희윤(대중음악 평론가)

키키
‘키키’가 세상에 처음 공개되던 순간을 기억한다. 멤버들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이 그룹 이름을 새긴 브레인롯(Brainrot) 이미지로 가득 채운 SNS 피드. 불친절하고 기이한 첫 등장은 새 시대의 아이돌을 보여주겠다는 출사표로 느껴졌다. 사이버 공간을 전시장이 아닌 학교 앞 운동장처럼 대하는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자기를 멋지게 포장해 보이는 건 도리어 멋없는 법. 젠체하지 않고 그저 ‘키키’ 키득거리기 바쁜 이들의 태도에는 그러한 잘파(Zalpha) 세대의 감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Uncut Gem>(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데뷔 앨범 제목은 그러한 신세대 그룹의 지향을 정확하게 반영한 듯하다. 그런데 그 면면을 뜯어볼수록 왠지 모를 위화감이 풍겨왔다. 우선 시공간 설정부터 기묘했다. 이들이 기거하는 곳은 홍대입구 6번 출구 앞 ’멘헤라’ 공원이 아닌 뉴질랜드 산골짜기의 무공해 시골이었고, 이들의 손에 들린 건 최신 스마트폰과 에어팟이 아닌 디지털카메라와 줄 이어폰이었다. 아무리 레트로가 유행이라곤 하나, 현대적인 전유보다 노골적인 복각을 향하는 MV의 미감에는 다소 새삼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남다름을 유달리 강조하는 듯한 메시지는 종종 위태롭게 들렸다. 특히 수록곡들과 판이하게 다른, 말끔히 세공된 사운드의 타이틀곡 ‘I Do Me’는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이 그룹의 모순을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실마리를 찾은 것은 11월 발매된 싱글 ‘To Me From Me’였다. “나로 살기가 너무 외로워.“ 타블로가 딸 하루와 함께 써 내려간 노래를 들으며 키키가 그려왔던 건 역설적으로 세대를 막론한 미스핏(Misfit)의 감성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세대와 반목하면서도 실은 또래 집단에서도 겉도는, 그래서 이따금씩 내가 잘못된 시대와 장소에 태어난 게 아닐지 의심해보는, 그런 별난 스스로가 좋다가도 한편으로 한없이 외로워지는, 누구나 어느 정도씩은 느껴봤을 질풍노도의 혼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들의 핵심 아닐까.
– 스큅(대중음악 평론가)

올데이 프로젝트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높게 평가하는 K팝 신에서 ‘올데이 프로젝트’가 가장 먼저 꽂은 건 혼성 그룹 깃발이었다. 상대는 K팝, 혼성 그룹과 물과 기름이라고 알려진 바로 그곳이었이다. 기억할 만한 K팝 혼성 그룹으로 카드와 남녀공학 두 그룹만 영원히 언급되는 것. 나아가 코요태, 쿨, 룰라, 영턱스클럽 같은 먼 친척뻘 선배까지 함께 묶여 소환되는 웃지 못할 광경을 볼 때마다 K팝이 혼성 그룹에 얼마나 척박한 땅인지 새삼 느꼈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같은 숙소에 살며 호흡을 맞추는 K팝 그룹의 특성상 멤버가 혼성이 되는 순간 관리하는 데만 최소 두 배의 물적, 인적 인프라가 필요했다. 30년을 꽉 채운 K팝 역사 속 대다수였던 동일 성별 그룹이 축적해온 ‘성공 노하우’도 달콤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사연애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팝 컬처 특유의 분위기도 외면할 수 없었다.
올데이 프로젝트는 그렇게 까끌까끌한 모래가 입안에 버석한 땅에 굳이 서는 것을 택한 그룹이다. 믿을 구석은 프로듀서 테디를 수장으로 하는 소속사 더 블랙레이블의 음악적 저력과 좀처럼 하나로 섞이기 어려운 개성을 한 그릇에 어렵지 않게 담아내는 오랜 습속이다. 이 두 가지 특징 모두 엄밀히 말해 더 블랙레이블의 모 그룹 YG엔터테인먼트가 남긴 레거시다. 울퉁불퉁한 개성이 만나 마침내 폭발하는 빅뱅과 투애니원의 고유한 카리스마에서 이제는 종종 톱 셀러브리티의 조별 과제 느낌까지 드는 블랙핑크의 프로다움까지, 남기고 간 그림자가 ‘올데프’ 위로 은은하게 비친다. K팝 안무가로 웬만한 아이돌보다 높은 유명세를 보유한 베일리, <쇼미더머니 6> 최연소 참가자 우찬, 비유가 아닌 실제 재벌 4세 출신으로 모든 화제성을 빨아들인 애니 등 화려한 이름표를 단 멤버들에게는 특별한 홍보도 필요 없었다. 여기에 데뷔곡 ‘Famous’와 ‘Wicked’는 대대손손 이어진, 힙합을 기반으로 대중의 입맛을 쉽게 사로 잡을 줄 아는 음원 강자의 축복 아래 놓였다.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도전하지 않았던 K팝 혼성 그룹이라는 유령에 올데프가 육체를 심었다. 우선 출발은 청신호다.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코르티스
언젠가 ‘브록햄튼’ 같은 K팝 보이그룹을 상상한 적 있다. 래퍼, 프로듀서, 그래픽 디자이너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면밀하게는 힙합 컬렉티브지만 스스로를 ‘보이밴드’라 우긴다. 온라인에 공고를 띄워 결성했고, 2014년 당시 평균 나이 스무 살이었다. 데뷔 믹스테이프 는 독립적으로 발매했으며, 대체로 직접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각 앨범의 제작기를 홈 비디오 감성으로 담아 유튜브에 공유했다.
그리고 2025년, ‘코르티스’가 등장했다. 물론 이들은 브록햄튼과 달리 ‘완전한 온실’에서 태어났다. 방탄소년단, TXT에 이어 ‘빅히트 6주기설’을 이어갈 주자로, 확실한 시스템과 자원 속에서 데뷔했다. 그렇기에 북미 시장을 목표로 삼거나(방탄소년단의 로드맵처럼), 견고한 세계관과 IP 확장을 내세울 것이라 예상했지만(TXT가 그랬듯), 코르티스는 사뭇 다른 길을 택했다. 음악, 안무, 영상까지 멤버가 주도해 만드는 ‘영 크리에이터 크루’를 표방한 것이다. 이 선언은 보여주기용 슬로건에 그치지 않은 듯 보인다. 활동 전 이미 하이브 선배 그룹 TXT, 아일릿의 곡 작업에 참여했고, 이어 데뷔 전부터 미국 송캠프에 투입됐다. ‘연습생 해외 연수’정도의 제스처라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 데뷔 앨범 수록곡이 그곳에서 나왔다. 또한 멤버들이 직접 찍고, 편집하고, 기획한 ‘오리지널 MV’는 전문가의 손길을 더한 ‘공식 MV’의 원형이 되는데, 둘 다 유튜브 채널에 나란히 공개하는 건 이들의 작업이 ‘핸드메이드’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장치로 읽힌다. 이처럼 여러 디테일에서 ‘영 크리에이터 크루’는 단순 구호가 아닌 실제로 작동하는 정체성임이 선명해진다. 진정성(Authenticity)을 중시하는 미국 시장에서 통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이미 지난 9월 ‘빌보드 200’에 15위로 진입하며, K팝 그룹 데뷔 음반 중 역대 최고 순위를 찍었다. 팀명 ‘코르티스’는 ‘선을 벗어나 색칠한다’는 의미에서 따왔다. 말 그대로 얼마나 더 바깥까지 칠해나갈지, 이 팀의 진짜 경계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PHOTOS | GETTYIMAGES KOREA, COURTESY OF SM ENTERTAINMENT, THE BLACKLABEL, BIGHIT MUSIC
- 포토그래퍼
- 이창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