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유색인종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지지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바친 큐레이터 셀마 골든(Thelma Golden). 올해 11월, 7년의 휴관 끝에 새 단장을 마친 뉴욕의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에서 그녀의 꿈은 더 힘찬 도약을 예비하고 있었다.

셀마 골든(Thelma Golden)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분명 살아 움직이는 ‘느낌표’일 것이다. 키 152cm의 작은 체구에 거대한 에너지를 품은 그녀는 올해 9월로 예순을 맞았으며, 2005년부터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Studio Museum in Harlem)의 관장 겸 수석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단장을 마친 미술관의 새 건물이 오픈되기 몇 달 전인 7월 말, 골든은 지하층 강당의 목재 계단에 걸터앉아 전기 시스템을 점검하는 기술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은 디지털 표지판과 조명, 자동문 센서를 하나씩 작동해보는 단계예요.” 곧 다가올 ‘전율의 순간’을 기다리는 그녀가 설렘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대중에게 열려 있는 미술관이 갖는 의미를 오랫동안 그리워했거든요.”
1968년 개관한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은 내내 할렘 아트 신의 등대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임대 공간에서 시작했지만, 1982년 이 지역의 중심대로인 125번가에 위치한 옛 은행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8년, 완전히 문을 닫고 모든 건물을 허문 뒤, 설계 사무소 아자예 어소시에이츠(Adjaye Associates)가 기획한 현대적인 건축물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골든은 건축과 미술관 운영을 위해 3억 달러(약 4,100억원) 이상의 자금을 모금하는 캠페인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스미스 대학에서 미술사와 아프리카계 미국학을 전공한 골든은 두 분야를 완벽하게 융합해 자신만의 커리어를 개척해나갔다. 초기 시절에는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의 큐레이터로 일하며, 정체성 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도발적인 분위기의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를 공동기획했다. 당시 관람객들은 ‘나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문장이 인쇄된 배지를 받았다. 그 이듬해, 그녀는 여전히 논쟁적인 전시로 회자되는 〈Black Male〉을 기획해 아프리카계 미국 남성성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작품을 조명했다. 2000년,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의 부관장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또 한 번 큰 화제를 모은 전시 〈Freestyle〉을 선보였다. 이 전시는 젊은 흑인 아티스트들을 조명했으며, 골든은 이들을 ‘포스트블랙’ 세대로 명명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유색인종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일은 골든에게 하늘이 내린 소명이며,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은 더없이 완벽한 무대였다. 그녀가 이곳을 이끌어온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흑인 예술가들은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이동했으며, 현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약 9,000점의 작품 가치 또한 꾸준히 상승해왔다. 골든은 미술관의 외형적 변화가 그 속에 담긴 근본적 사명, 즉 아티스트를 지원하고 육성하는 기본 정신까지 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 단장한 공간에서 열릴 첫 전시는 1968년 미술관 개관전의 주인공이자 깜빡이는 전기 조명을 이용한 추상 조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 톰 로이드(Tom Lloyd)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상설전 소장품 중 일부와 아카이브 자료도 함께 전시하여 기존보다 50% 이상 넓어진 전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하나의 전통을 잇는 전시는 바로 미술관의 상징적 프로그램인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를 제대로 기리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미술관 설립 당시 추상화가 윌리엄 T. 윌리엄스가 구상한 것으로, 매년 신진 예술가 3명에게 작업 공간, 약 3만7,500달러(약 5,300만원)의 지원금, 연말 개인전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오프닝에서는 골든과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옐레나 켈러(Yelena Keller)가 프로그램 졸업 작가들이 제작한 100여 점의 드로잉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 미술관의 중심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스튜디오’예요. 예전 건물에서 제 사무실은 스튜디오 아래층에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기억해요. 제 삶의 가장 큰 기쁨은 이 공간에 예술가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들의 창작 과정을 지켜보고, 한 해가 끝날 즈음 완성된 작품을 마주할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졸업생 명단에는 샌퍼드 비거스, 차카이아 부커, 은지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 데이비드 해먼스, 케리 제임스 마샬, 왕게치 무투, 차발랄라 셀프, 미칼린 토머스, 나리 워드처럼 오늘날 세계 미술계를 대표하는 흑인 예술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언제나 세 명의 아티스트가 이곳에 거주하며 창작한다는 변치 않는 한 가지 사실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형성해왔어요.” 현재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옐레나 켈러의 설명이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예술가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할렘이라는 장소 그 자체다. 100년 전 ‘할렘 르네상스’ 시절부터 이곳은 전 세계 흑인 문화의 메카로 자리해왔다. 골든은 “할렘이라는 장소가 무척 흥미로워서 아예 미술관 밖으로 나가 이 지역 공동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가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오래 이어지곤 한다. 화가 조던 캐스틸(Jordan Casteel)은 2015~2016년 레지던시 기간 동안 지역 이웃을 그린 작품을 선보였고, 이후 2020년 뉴뮤지엄(New Museum)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의 모델 중 한 명을 지금도 자주 봐요. 그분은 이 미술관을 ‘조던의 미술관’이라고 부르죠. 전 그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는답니다.” 골든이 웃으며 덧붙인다. “그분의 말이 맞거든요. 그의 시선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2000~2001년 레지던시 작가이자 2021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의 주인공인 줄리 메레투(Julie Mehretu) 역시 여전히 어퍼 맨해튼에 머물고 있어요. 그녀가 이곳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리면, 그 경험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돼요.”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로런 홀시(Lauren Halsey)는 2014년부터 2015년까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으로 할렘과 사랑에 빠졌다. 홀시는 202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옥상 설치 프로젝트를 맡아 고대 이집트 문명을 모티프로 한 대형 설치 예술을 선보인 작가다. “그전까지는 딱 한 번만 와본 곳인데, 125번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정말 똑똑하고, 재미있고, 독특한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게다가 홀시는 고대 이집트에 매혹된 흑인 예술가가 자신만이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까지 깨달았다고 답했다. “거리의 노점상들이 오벨리스크 모양의 티셔츠를 팔거나,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문진을 파는 걸 보곤 했죠.”


할렘 스튜디오 미술관은 젊은 예술가들이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함께 성장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입주 작가들은 서로 가까운 작업실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프로그램을 마친 졸업생은 멘토로 참여해 후배를 돕는다. 홀시 역시 자신보다 몇 년 앞서 레지던시에 참여한 조각가 시몬 리(Simone Leigh)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리의 스튜디오에 찾아가 조언을 구하곤 했어요. 이곳에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을지, 제 작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프로그램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을 물어보았죠. 그날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받았어요. 나도 열심히 하면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죠.” 홀시가 웃으며 회상했다. 레지던시 기간에 완성한 작품 시리즈는 홀시의 예술적 궤적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고향인 LA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 공공 예술 공원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으며, 석고보드에 드로잉을 새겨 넣는 방식을 대표적인 작업 스타일로 선보이고 있다. “고등학생 때 조각 작업을 했는데, 이곳 미술관에서 다시 그 감각을 되살렸죠. 예술가들은 자신의 기존 작업을 가지고 이 프로그램에 지원해요. 하지만 이곳에 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도를 해볼 자유를 얻게 돼요. 때로는 그것이 이전의 나와 ‘정반대’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변화가 세상에 그 작가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홀시의 말에 이어 골든이 덧붙였다. “이 프로그램은 인생의 분기점에 서 있는 작가들에게 가장 적합합니다. 이미 자신이 예술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충분히 오랜 시간 작업하지는 않아 자기만의 방향을 완전히 정립하기 전인 이들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텍스타일을 주요 매체로 활용하는 작가 퀄리샤 우드(Qualeasha Wood)는 2021년부터 2022년까지 미술관에 머물렀다. “이 프로그램은 제게 천천히 가는 법을 배우게 해줬어요. 그 느림의 방식 덕분에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죠.” 우드는 인터넷에서 작품에 쓸 소재에 대한 영감을 얻으며, 상주 작가로 머무는 동안 온라인 텍스트와 브라우저 인터페이스 이미지를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녹여내는 도전을 시작했다. 미술관은 그녀에게 정신적인 여유뿐 아니라 물리적 공간의 자유도 제공해준 특별한 곳이다. “4.5m 높이의 벽이 있어서 처음으로 대형 작품을 만들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 제 태피스트리 작품은 늘 침실 한구석에 자리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아마도 우드에게 레지던시 경험의 가장 값진 부분은 자신이 소수자가 아니라는 감각이었을 것이다. “예술계의 다른 곳에서는 늘 ‘흑인으로서의 나’를 의식하게 돼요. 등장하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설명할 준비를 해야 하죠. 하지만 이곳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의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존재해요.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겪어온 경험 그 자체를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달까요. 누군가를 자극할 만한 ‘팔리는 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트라우마 속에 머물 필요가 없는 거죠.”


미술관의 새 건물은 4층 규모의 스튜디오 공간을 포함하고 있으며, 탁 트인 북쪽 전경을 자랑한다. 덕분에 공간 활용 및 다채로운 가능성이 한층 확장됐지만, 이 프로그램과 맞닿아 있는 이들에게 공간의 확장은 물리적 차원을 넘어 정신적·심리적 영역에 가깝다. 이곳은 미술관이 추구하는, 예술가들 사이의 연대와 공감의 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히 작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공동체로 초대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많은 작가들에게 평생의 버팀목이 되어주죠.” 골든이 말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종종 예술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저는 지금도 여러 미술관에서 프로젝트를 하지만, 그 출발점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레지던시에 참여한 작가 사야 울포크(Saya Woolfalk)의 말이다. 그녀는 최근 미래적 식물 여성상을 주제로 한 개인전〈Empathic Universe〉를 뉴욕 아트 디자인 박물관(Museum of Arts and Design)에서 진행했다. “미술관에 처음 왔을 때 저는 완전히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술계에서 처음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죠. 이곳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에요. 진정한 커뮤니티, 그 자체입니다. 새 건물은 그 정신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된 것뿐이죠.”
- 포토그래퍼
- MING SMITH
- 글
- ARTHUR LUBOW
- 에디터
- TORI LÓPEZ
- 헤어&메이크업
- SHAINA EHRLICH FOR 111SKIN AT BORN ARTISTS
- 포토 어시스턴트
- MINGUS MURRAY, CHRIS COOK,
- 디지털 테크니션
- CHRIS COOK
- 패션 어시스턴트
- KAYLA PERN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