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2025/26 크루즈, 싱가포르에서 펼쳐진 또 한 편의 서사시

김신

인생은 아름다워

싱가포르 래플스 호텔에서 다시 한번 펼쳐진 2025/26 샤넬 크루즈 컬렉션의 피날레.
이번 시즌 주목해야 할 글래디에디터 샌들과 백.

샤넬이 올해 봄 코모 호수에서 시작한, ‘호텔 라이프’에서 영감을 받은 2025/26 크루즈 컬렉션의 여정을 싱가포르에서 다시 이어갔다. 첫 무대였던 빌라 데스테(Villa d’Este)가 호수와 정원의 고요한 풍경을 품은 장소였다면, 싱가포르의 래플스 호텔은 전혀 다른 결의 시간을 품은 곳이다. 남국의 습도, 19세기 건축물 특유의 하얀 외관, 정원 위로 드리워진 야자수 그림자들이 이곳의 우아한 품격을 완성한다.

래플스 호텔은 19세기 말에 문을 연 이후 싱가포르의 얼굴이 되어온 아주 고전적인 장소다. 그 시절의 흔적과 현대 도시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곳으로, 오래된 목조 베란다를 걷다 보면 발걸음마저 느려지고, 정원에 앉아 있노라면 분주한 도시의 소리가 잠시 멀어진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샤넬은 이 공간이 가진 특별한 시간성을 2025/26 크루즈 컬렉션의 또 다른 배경으로 삼았다. 이번 크루즈 컬렉션을 소개하는 티저 영상은 소피아 코폴라가 연출했다. 샤넬과 오래 인연을 이어온 그녀는 코모 호수의 빌라 데스테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통해 컬렉션의 분위기를 자신만의 영화적 시선으로 풀어냈다. 영상 속 모델 하이너는 하이웨이스트 쇼츠와 스윔웨어, 여러 액세서리를 착용한 채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고, 따뜻한 오커 톤의 테라스와 호수를 향한 객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룩을 드러낸다. 물빛이 반사되어 일렁이는 코모의 풍경이 장면 곳곳에 스며들어, 이번 크루즈가 품고 있는 따뜻한 설렘과 호텔 라이프 특유의 여유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싱가포르의 런웨이는 코모의 빛을 이어받아, 열대의 온도와 래플스 호텔의 우아한 구조 속에서 더욱 풍요로운 장면으로 확장되었다. 라운지 웨어처럼 여유로운 트위드 슈트부터 금사와 시퀸을 섬세하게 엮은 룩, 분홍과 오렌지 라메의 밝은 실루엣, 짧은 태피터 드레스와 긴 장갑까지, 각각의 아이템이 유서 깊은 장소의 결과 어우러지며 색다른 느낌의 빛을 만들어냈다. 또 스트라이프, 화이트 팬츠, 간결한 피코트처럼 크루즈를 상징하는 아이템들은 보다 부드러운 선으로 정리되어 여유로운 무드를 연출했다. 실크 스카프는 머리, 손목, 발목 어디에 두어도 룩에 작은 리듬을 더하며 호텔 라이프의 여유로운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래플스 호텔의 상징적인 로비를 걷는 모델들.

이번 컬렉션이 전하고자 한 감정은 결국 ‘머무는 장소가 만드는 하루의 온도’였다. 코모에서의 청량한 첫 장면은 싱가포르에서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었고, 시퀸의 반짝임과 케이프의 움직임은 호텔이라는 공간이 가진 친밀하면서 매혹적인 정서를 한층 더 깊게 드러냈다.

쇼가 끝난 후, 래플스 호텔의 밤은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영국의 레이(Raye), 인도네시아의 리오 시딕(Rio Sidik), 싱가포르 아티스트 니콜렛(Nicolette)의 공연이 이어지며, 고전적인 건축과 현대적 사운드가 근사하게 뒤섞였고, 오묘한 공기가 공간을 채웠다.

싱가포르의 아침을 깨운 샤넬 토크

밝은 모습으로 토크를 이어간 배우 틸다 스윈턴.

쇼가 시작되기 전, 싱가포르의 한 극장에 420명의 학생이 모였다. 예술,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샤넬이 준비한 토크를 듣기 위해 강연장을 채운 것. 샤넬 패션 부문 사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와 <모노클>의 편집장 타일러 브륄레, 그리고 샤넬 앰배서더 틸다 스윈턴, 영화 프로듀서 마가렛 장, 비주얼 아티스트 클리퍼드 로, 소설가 아만다 리 코가 무대에 올랐다. 도시의 젊은 창작자들과 샤넬이 처음으로 마주한 자리답게, 대담은 시작부터 가볍지 않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지역에서 태어난 창의성이 어떻게 세계로 뻗어나가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진짜 창작의 힘이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젊은 세대와 샤넬의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뜨거운 현장이 펼쳐졌다.

먼저 대화는 자연스럽게 틸다 스윈턴의 경험으로 흘러갔다. 그는 자신의 시작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잡지에 제 이름이 실렸을 때 물론 기뻤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저는 훌륭한 편집자, 뛰어난 사진가, 좋은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 말이 끝나자, 현장에는 묵직한 고요가 잠시 스쳤다. 화려한 경력 뒤에 숨겨진 진짜 이유를 듣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틸다는 이어, 창작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무엇을 대표하는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된다는 뜻이었다.

런웨이에 펼쳐진 블랙 이브닝 룩들.
쇼가 끝나고 이어진 디제잉.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 넘어갔다. 그는 창작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감정적 환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을 기분 좋게 하고, 여러분을 더 크게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하세요. 여러분을 작게 만드는 관계에서는 떠나는 게 맞아요.” 이 조언은 그가 숱한 여정에서 체득한 존재의 기술이자, 협업이 필수인 창작 현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지혜였다. 좋은 관계가 좋은 작업을 만든다는 말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이어 샤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틸다는 브랜드의 본질을 ‘코드’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샤넬의 코드는 창작의 배터리예요. 가브리엘 샤넬이 창조한 감각이 지금도 이 하우스를 움직이게 하죠. 그건 과거를 박제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창작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에요.” 그의 설명은 샤넬이 왜 전 세계 도시에서 로컬 창작자들과 대화를 나누는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파블로브스키가 말한 것처럼, 지역의 감각은 글로벌 브랜드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미래로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제공한다.

샤넬 패션 부문 사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와 샤넬의 앰배서더 틸다 스윈턴.

대담은 창작자가 오랫동안 에너지를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속도’와 ‘규율’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틸다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장은 태도로 빛나요. 친절은 프로페셔널리즘의 또 다른 이름이지요.”

그에게 창작은 단순한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꾸준함, 배려, 그리고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하는 생활 감각, 그리고 애티튜드라는 얘기다. 실패에 대한 그의 생각도 깊었다. “실패는 닫힌 결말이 아니에요. 저는 실패한 시도나 미완성 아이디어를 버리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다음 작업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거든요.”작업의 처음과 끝, 성공과 실패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그의 말은 많은 학생들에게 현실적인 위로가 될 것이다. 대담이 마무리될 즈음, 틸다는 창작자의 본질에 대해 마지막 한 문장을 남겼다. “창작자는 감정을 만들고, 관계를 짓고, 위험을 감수해 다음 단계를 계속 만들어가는 존재예요.”그 말은 마치 이날 아침을 정리하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쇼가 열리기 전의 짧은 시간 속에서, 학생들은 이미 하나의 중요한 장면을 경험한 셈이다. 그리고 샤넬이 싱가포르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이야기가 옷보다 앞선 ‘마음’과 ‘태도’라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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