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ENCIAGA 2026 SS 컬렉션
발렌시아가의 창립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쿠튀리에의 쿠튀리에’라고 불렸다. 1950, 60년대 여성의 몸을 구속하던 코르셋을 거부하고, 패턴과 구조만으로 새로운 볼륨감을 만들어냈다. 옷과 몸 사이에 ‘공기’를 남겨 인체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모던한 미학을 완성한 동시에, 여성을 옷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가볍지만 형태가 잘 유지되는 가자르(Gazar) 소재를 최초로 개발한 것도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였다.
지난 5월, 구찌의 구원투수로 등판된 뎀나 바잘리아에 이어 발렌시아가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된 피엘파올로 피춀리. 그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시대의 부활을 알렸다. 피엘파올로 피춀리는 발렌시아가 데뷔 쇼 초대장으로 심장 박동 소리를 넣은 카세트테이프와 워크맨을 보내왔고, 10월 4일 토요일 오후 8시, 파리 세브르 거리(Rue de Sèvres)의 케링 본사로 관객을 초대했다. 초대장에는 ‘심장박동(The Heartbeat)’이라는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에게 러브레터를 보내듯 피엘파올로 피춀리는 발렌시아가의 오랜 유산에 부드럽게 접근했다. 피엘파올로 피춀리는 1957년, 등장과 동시에 패션의 문법을 바꿨던 발렌시아가 ‘삭 드레스(Sac Dress)’를 해석하며 쇼를 시작했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드레스였다. 피엘파올로 피춀리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발렌시아가의 건축학적 형태가 오늘날의 현실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대담하고 파괴적인 볼륨감이 현대 의상을 정의하는 요소다’. 오프닝의 블랙 V넥 이브닝 드레스는 삭 드레스처럼 허리를 강조하지 않은 트라페즈(Trapeze) 라인이 돋보였고, 새하얀 오페라 장갑, 검은 펌프스에 거대한 버그 아이 선글라스, 크리스털 헤드기어를 더해 동시대적 분위기를 냈다. 삭 드레스는 다양하게 해석됐다. 사랑스러운 파스텔 핑크 컬러의 드레스로 선보이는가 하면, 튜닉 탑처럼 짧게 잘라 슬림한 팬츠와 매치하거나 한쪽 어깨 부분을 숄처럼 길게 늘어뜨리기도 했다. 트라페즈(Trapeze), 벌룬(Balloon) 등 모던한 형태와 네오 가자르(Neo-Gazar) 소재가 어우러지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50, 60년대에 구축한 우아한 조형예술의 세계가 펼쳐졌다. 한편, 라임, 핑크, 레드, 바이올렛, 그린, 옐로 등 선명하고 풍부한 색감과 깃털, 러플, 아플리케 등 화려한 장식 요소는 1999년 발렌티노에서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시작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까지 승진하며 무려 25년을 근무한 피엘파올로 피춀리의 이력을 새삼 떠오르게 했다.
발렌시아가의 전임 디자이너들에게 따뜻한 헌사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히, 1997년부터 2012년까지 발렌시아가를 맡았던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바로 직전의 아티스틱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가 선보였던 디자인에 대한 오마주가 많았다. 4번째 룩이었던 블랙 레더 재킷과 팬츠는 뎀나가 2022 SS 시즌에 선보인 블랙 셋업을, 37번째 룩이었던 니트 드레스는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2006 SS 시즌에 선보인 플라워 패턴을 연상케 했다. 이 밖에도 화이트 크롭 톱과 깃털 스커트, 긴 트레일을 단 오버사이즈 화이트 셔츠, 바이올렛 컬러 홀터넥 드레스, 플랫폼 플립플롭,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르 시티(Le City) 백 등 액세서리까지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거쳐간 전임 디자이너에 대한 피엘파올로 피춀리의 사려 깊은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 하우스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 세대들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낄만했고, 쿠튀리에의 솜씨를 한껏 발휘하면서도 보머 재킷이나 데님 팬츠, 티셔츠 등 일상에서도 활용 가능한 아이템이 꽤 많았다는 점이다. 피엘파올로 피춀리는 특유의 친절한 표정을 짓고, 뎀나 시절 밈처럼 유행했던 청키한 대드 스니커즈를 신고 피날레에서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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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of Balenciag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