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ENTINO 2026 SS 컬렉션
야광 반딧불이 꾸러미를 함께 보낸 인비테이션은 2026 SS 발렌티노 컬렉션의 중요한 단서였다.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에게 영감을 준 것은 한 편의 글이었다. 이탈리아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가 학생이었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 반딧불이가 가득했던 밤을 회상하며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내용이 담겼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이를 통해, 패션이 현실 도피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운 시대에 목소리를 내는 예술적 행위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검은색 런웨이에 조명을 사용해’반딧불이(Fireflies)’ 테마처럼, 마치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가 빛을 내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쓴 편지의 구절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힘있게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프런트 로에 앉아 있던 파멜라 앤더슨(Pamela Anderson).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런웨이를 가득 채웠다.
2026 SS 발렌티노 컬렉션은 1970, 80년대 무드를 재해석했다. 70년대의 슬림한 롱 & 린 실루엣과 80년대의 파워 테일러링에 레이스, 실크, 시폰, 벨벳, 자카드 소재와 스팽글, 크리스털, 리본, 비즈, 깃털 장식이 어우러졌다. 숄더 패드를 넣어 어깨 라인을 정돈한 롱 튜닉에 실크 팬츠를, 레이스 블라우스에는 펜슬 스커트를 주로 매치했다. 대담한 코발트 블루, 버블검 핑크, 머스터드, 푸시아, 바이올렛, 그린 등 흔치 않은 컬러 조합을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지난 컬렉션을 떠올리면, 이번 시즌은 평소보다 상당히 절제의 미덕을 발휘했다. 액세서리 또한 몇몇 룩에 나비 네크리스와 샹들리에 이어링을 매치한 것을 제외하면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푸시보우를 장식한 재킷과 코트, 화이트 실크 태피터 재킷과 핑크 실크 팬츠, 레드 새틴 드레스 등은 전례 없이 미니멀했다. 작은 시퀸을 한 땀 한 땀 채워 넣은 그레이 니트 보디슈트에 베이비 블루 케이프를 드리운 룩은 창립자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황금기에 선보였던 화려함을 현대적으로 담았다.
컬렉션의 끝, 파멜라 앤더슨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내레이션은 ’우리는 눈을 무장 해제하고 시선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We need to disarm the eyes and reawaken the gaze)’는 문구로 마무리됐다. 피날레에서는 모델들이 모두 나와 하늘의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가 무기력하게 창의성과 상상력을 포기하는 순간, 희망도 사라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간절함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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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of Valentin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