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긴 도시를 걷는 생존자, 26 SS 릭 오웬스 컬렉션

명수진

RICK OWENS 2026 SS 컬렉션

10월 2일, 릭 오웬스는 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중앙 분수대에서 30여 년 넘게 이어온 자신의 커리어를 집약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모델들은 지난 6월에 열린 남성복 컬렉션처럼 루사이트 힐 플랫폼 부츠를 신고 정원 분수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온 뒤, 정원 중앙 분수대에 있는 무릎 높이 물을 헤치며 마치 고행하는 현자처럼 워킹을 이어갔다. 팔레 드 도쿄 맞은편에 있는 팔레 갈리에라 뮤지엄(Musée Palais Galliera)에서는 내년 1월까지 릭 오웬스 회고전 ‘사랑의 사원(Temple of Love)’가 열리고 있어, 컬렉션과 완벽한 대구를 이루었다.

2026 SS 시즌, 컬렉션의 타이틀은 ‘사원(Temple)’. 오웬스는 쇼 노트에서 ‘Love is a word really worth promoting right now’라며, 사랑이라는 단어가 공허해 보일지라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야말로 더 강렬히 외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이 사랑에 대해 절규하듯 노래하는 사운드가 배경으로 흘러나왔고, 베이지, 블랙, 아이보리, 그레이 등 릭 오웬스 특유의 서늘한 컬러 팔레트가 이어졌다.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저지 톱과 가죽 팬츠에는 릭 오웬스 특유의 심오한 재단이 숨겨져 있었다. 더블 레이어드, 바이어스 커팅 등이 결합된 비정형적인 저지 톱과 팬츠를 통해 패턴 메이킹에 대한 릭 오웬스의 깊은 철학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가볍고 얇은 시폰과 묵직한 울, 가죽, 산업용 나일론 등 절묘한 소재 사용 역시 컬렉션에 밀도감을 더했다. 마치 부유하는 조형물처럼 몸에서 붕 떠 있는 드레스의 독창성 또한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입체 패턴 메이킹과 소재 활용에 있어 장인의 경지에 오른 릭 오웬스의 예술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런웨이에 감탄하는 사이, 릭 오웬스는 시그니처 저지와 순백의 톱, 블랙 바이커 재킷, 크롭트 트렌치코트, 시스루 플라이트 재킷 같은 다채로운 아우터, 재활용 나일론으로 완성한 애슬레저 스타일 등 당장 매장으로 달려가 입어보고 싶은 아이템도 눈에 띄게 한 마법을 발휘했다.

한편, 뾰족한 프린지 장식이 달린 가죽 케이프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난 뮤턴트를 연상케 했는데, 이는 런던 기반 젊은 디자이너 스트레이투케이(Straytukay)와 협업한 작품이었다. 피날레에 등장한 블랙과 아이보리 드레스 두 벌에는 수학 공식과도 같은 프린트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오웬스의 아버지가 과거 그에게 만들어주었던 별자리표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릭 오웬스는 이렇게 종종 어린 시절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느낀 트라우마를 컬렉션에 담아내곤 한다. 이번에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잔소리를 떠올렸다. ‘리처드, 네가 책임감을 갖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게 너무 걱정돼’. 참고로 릭 오웬스의 본명은 리처드 새터니노 오웬스(Richard Saturnino Owens)였다.

모델들이 함께 물을 헤치고 걸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이번 파리 패션위크의 하이라이트로 기록될 수 있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물은 정화이자 재생의 상징이다. 일종의 세례 의식 같았던 피날레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30여년의 창작 여정을 돌아보고 앞을 향해 더 나아가려는 릭 오웬스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영상
Courtesy of Rick Ow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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