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페이지갤러리의 평행하고도, 교차하는 나날

전여울

올해 더페이지갤러리는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 두 페어를 가로지르며 사뭇 서로 다른 얼굴의 부스를 선보였다.

명상과 환희, 고요와 색채가 대비되듯 펼쳐지는 두 부스를 오가며 겹겹이 겹쳐진 나날, 어느 나날이 여기 있다.

최명영, 박석원, 로버트 라이먼 등을 만날 수 있었던 프리즈 서울 부스.

30여 개국 120개 이상의 갤러리가 참여한 올해의 프리즈 서울. 네 번째 에디션을 거듭하자, 이제 관객에게도 이 광활한 페어장을 항해하는 나름의 사적인 지도가 생긴다.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전 세계 주요 리딩 갤러리가 포진한 메인 섹션 ‘갤러리즈’가 펼쳐진다. 여기서는 동시대 현대미술이 그리고 있는 가장 최신의 궤적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회화, 조각, 설치, 비디오 등 다종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른 작품들이 밀도 높게 사각 부스를 채우는 풍경은 더없이 흥미롭고도, 지금 시장의 흐름을 직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장적이다. 반면 더 깊숙이 발걸음을 옮기면 고대 유물부터 20세기 작품까지 수천 년에 걸친 예술의 여정을 탐험하게 만드는 ‘마스터즈’ 섹션에 당도하게 된다. 현대미술의 반짝임과 가장 앞선 목소리를 따라가다 이곳에 다다르면, 작품에 켜켜이 스민 세월과 함께 마음이 잠시 느리게 고요해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자연스레 관객은 쉼표를 찍듯, 조금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경쾌한 색채와 리듬으로 가득했던 키아프 서울 부스는 애니 모리스, 안드레 부처 등이 장식했다.

올해 더페이지갤러리가 ‘마스터즈’ 섹션에서 내놓은 화두는 어쩌면 ‘회화 그 자체’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우선 1969년 한국 실험미술의 확장 분위기 속에서 결성된 ‘AG 그룹’의 두 인물, 최명영과 박석원을 호출한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 약칭 AG 그룹은 전후 한국에서 활동한 예술가와 평론가 집단으로, 앞서 말한 두 인물을 포함해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심문섭 등이 이곳에 몸담았다. 이들은 한국에서 실험미술 담론을 본격적으로 개척한 첫 집단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그 선구적 시도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발전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한다. 단색화 1세대 화가로 불리는 최명영에게 출발점은 회화의 ‘절대적 평면성’이었다. 서예의 한 획처럼 롤러로 물감을 켜켜이 겹쳐 올려 완성한 연작, 1980년대 중반 이후 수평과 수직을 반복하며 표면을 구축한 ‘수직수평’ 시리즈는 올곧은 정신적 수행을 떠올리게 했고, 이번 부스를 명상적 기운으로 채웠다. 한편 한국의 돌탑이 지닌 조형성을 현대 추상 조각으로 확장한 박석원의 ‘적의(Accumulation)’ 시리즈, 마찬가지로 축적과 반복의 개념을 고스란히 품은 그의 평면 작업 역시 나란히 소개됐다. 더 나아가 ‘백색의 추상화가’로 알려진 미국 미니멀리즘 거장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의 작품은 한국 두 작가의 회화와 마치 공명하듯 호응하며, 서로 다른 시대와 대륙이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 위에서 조용한 대화를 이어가게 했다.

경쾌한 색채와 리듬으로 가득했던 키아프 서울 부스는 애니 모리스, 안드레 부처 등이 장식했다.

더페이지갤러리의 프리즈 서울 부스가 깊은 명상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사유의 공간이었다면, 올해 키아프 서울에서 선보인 프레젠테이션은 보다 경쾌한 색감과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했다. 작업 초기 기업 로고부터 디즈니 만화 캐릭터까지, 다양한 레퍼런스를 활용해 20세기 문화·정치·기술적 상징을 압축한 회화로 주목받아온 독일 출신 화가 안드레 부처(André Butzer), 리드미컬한 색채와 형태의 동그란 구체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스택’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애니 모리스(Annie Morris), 폭발하는 듯한 카니발적 색감을 바탕으로 초현실적 풍경 속 인간상을 그려내며 부상 중인 국내 차세대 화가 최혜경까지. 올해의 부스는 경쾌한 색채와 형식이 주는 본능적 쾌감을 전면에 내세우며 갤러리의 확장된 스펙트럼을 드러냈다. 여기에 지난 7월 더페이지갤러리에서 막을 내린 단체전 <가이 아의 메아리>의 대표 작가 산드라 바스케스 데라 오라(Sandra Vásquez de la Horra)와 최명영 등, 최근 갤러리와 긴밀히 호흡해 온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기회가 더해졌다. 결국 더 페이지갤러리는 두 페어를 가로지르며 명상과 환희, 고요와 색채를 교차하듯 제시한 셈이다. 그리고 두 평행하고도 교차되는 세계를 즐겁게 오가는 일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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