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미니멀리즘, 26 SS 질 샌더 컬렉션

명수진

JIL SANDER 2026 SS 컬렉션

질 샌더가 보내온 초대장에는 미국 출신 아티스트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가 촬영한 신문 더미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번 시즌은 발리(Bally) 출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몬 벨로티(Simone Bellotti)가 질 샌더에서 선보이는 첫 정규 컬렉션으로 주목받았다. 종이와 기록물이 겹겹이 쌓인 모습은 브랜드의 아카이브와 기록을 탐구하며, DNA를 재해석하려는 디자이너의 의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밀라노 패션위크 넷째 날, 질 샌더 2026 SS 컬렉션은 본사가 있는 피아차 카스텔로(Piazza Castello)에서 열렸다. 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루시와 루크 마이어 듀오가 도시 곳곳에서 쇼를 열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돌아온 것은 8년 만이다. 무대는 갤러리처럼 온통 하얀 공간. 화려한 장치 하나 없이 옷의 구조와 질감만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자 하얀 캔버스 위에 깨끗하고 선명한 선을 지닌 옷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시몬 벨로티는 쇼노트를 통해 ‘옷이 몸을 감싸면서도 열릴 수 있도록 설계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가벼운 구조(lightness of structure)’라는 테마 아래, 무게와 공허, 절제와 확장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동시에 탐구했다.

오프닝은 90년대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모델 기네비어 반 시너스(Guinevere Van Seenus)가 열었다. 그녀가 등장한 1996년 SS 시즌 질 샌더 광고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어 의미심장한 캐스팅이었다. 기네비어 반 시너스가 입은 화이트 미디스커트는 담백하지만 에지가 뚜렷했다. 이는 리처드 프린스의 작품 ‘후드(Hoods)’ 시리즈에 나온 머슬카 보닛의 매끈한 곡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다트를 안쪽이 아닌 바깥으로 노출시켜 기하학적인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어 정교한 테일러링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핏의 슈트 시리즈로 질 샌더가 창조한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드러냈다. 질 샌더의 시그니처인 더블 페이스 코트와 함께, 때로는 라텍스처럼 보일 만큼 조밀하고 매끄러운 질감의 레더 재킷과 코트가 일관되게 이어졌다. 대각선 슬릿을 넣은 미디스커트는 이탈리아 공간주의(Spatialism) 작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타이(Tagli)’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역동적인 매력을 불어넣었다.

모델 클로이 오가 입은 바이올렛 컬러 드레스는 마치 종이접기로 완성된 것처럼 평면적 실루엣이 눈길을 끌었다. 이런 평면적 실루엣은 이후 원피스와 셔츠, 재킷, 코트에서도 활용됐다. 시스루 원피스는 레드와 블루의 대비되는 컬러로 색채의 긴장을 만들었고, 거의 쪼그라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몸에 꼭 맞는 니트 레이어링 역시 선명한 컬러 대비로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얇은 조젯 크레이프를 파이처럼 켜켜이 쌓은 미디 드레스와 스커트는 모델의 워킹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는데, 이는 초대장 속 리처드 프린스의 신문 더미 사진 테마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듯 보였다. 한편, 타원형 컷아웃이 들어간 원피스는 이너 브라렛을 드러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화이트, 블랙, 네이비 등 시그니처 컬러를 넘어 파스텔컬러와 일렉트릭 블루, 레드까지 이어진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는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도 생기를 불어넣었다. 끈으로 묶는 레이스업 슈즈부터 컷아웃 디테일의 발레리나 슈즈, 그리고 키튼 힐 브로그까지 절제된 디자인의 슈즈와 새롭게 소개되는 곡선형의 피벗(Pivot) 백 등 액세서리가 또한 긴장감을 완성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질 샌더 2026 SS는 순수한 본질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몬 벨로티의 데뷔 무대는 브랜드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이고 예술적인 터치를 더한 ‘신중한 시작’이었다. 지나치게 미니멀하다는 평도 간혹 있었지만, 정직한 재단을 통한 구조적 미학은 소란의 시대에 오히려 신선한 충격을 줬고, 질 샌더의 존재감을 한층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영상, 사진
Courtesy of Jil S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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