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DEM 2026 SS 컬렉션
섬세한 디테일에서 늘 독보적이었던 에르뎀은 이번에도 기대를 뛰어넘었다. 9월 21일 저녁에 열린 쇼는 고요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무드를 자아냈다. 은은하게 조명이 깔리고, 고전적인 심포닉 선율에 전자음이 겹쳐지자 무대는 시간과 공간이 모호한 꿈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번 컬렉션은 19세기 말 파리에서 활동했던 스위스 출신 심령술사이자 예술가, 헬렌 스미스(Hélène Smith)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의 일원이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인도 공주의 환생이라도 주장했고, 심지어 화성인과 교감한다고 믿기도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매혹적이었던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오늘날 에르뎀에게도 강렬한 영감을 주었다. 디자이너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쇼노트를 통해 ‘헬렌 스미스가 믿었던 여러 삶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궁정 귀족, 인도 공주, 화성인까지, 헬렌 스미스가 믿었던 세 가지 정체성은 이번 쇼에서 세 개의 테마로 펼쳐졌다.
런웨이는 빅토리안 레이스, 앤티크 자수, 브로케이드, 사리(sari) 실크, 새틴과 오간자, 미세한 크리스털과 시퀸, 울과 리넨 등 다채로운 소재가 켜켜이 겹치며 시공간을 초월했다. 첫 장에서는 앤틱 레이스와 크리스털을 몰딩하듯 엮어낸 조각 같은 아워글래스 드레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어 편안한 파자마 같은 스트라이프 코튼 셔츠와 팬츠에 뷔스티에를 믹스 매치해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들었다. 목에는 빅토리안풍 하이 스탠드 칼라 레이스까지 함께 매치했다. 헬렌 스미스의 환상에 설득된 것일까? 이런 드라마틱한 스타일링은 현실에서도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은 묘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중반부 이후에는 매니시한 오버사이즈 스트라이프 슈트와 굵은 스티치로 패치워크한 플라워 드레스가 등장하며 헬렌 스미스의 또 다른 자아를 드러냈다. 컬렉션은 점점 더 과감하게 나아갔다. 선명한 그린 드레스와 핫 핑크 아우터를 매치한 룩을 시작으로 레몬 옐로우, 아시드 라임, 핫 핑크 같은 팝 컬러가 무대에 등장해 극적인 대비를 완성했다. 후반부에 선보인 손뜨개 모티프를 정교하게 엮은 화이트 니트 드레스는 에르뎀의 장인정신과 상상력이 만나 빚어낸 시너지를 생생하게 증명했다. 액세서리 또한 룩마다 제 역할을 충실히 했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새틴 펌프스는 드라마틱한 스타일링의 마지막 방점을 찍었고, 드레스와 셔츠 곳곳에는 헬렌 스미스가 기록했다는 ‘화성 알파벳’을 형상화한 검은 플라스틱 몰딩 엠블럼이 핀처럼 고정돼 초현실적인 긴장감을 더했다.
2026 SS 에르뎀 컬렉션은 역사적 레퍼런스 위에 환상적 상상력이 더해졌을 때 어떤 장면이 펼쳐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쇼였다. 우아함과 미스터리, 그리고 드라마틱한 상상력이 교차하는 무대는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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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of Erde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