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 코리아 Vol.10 베스트 퍼포먼스 – 손예진

김신, 권은경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어쩔수가없다>의 ‘미리’를 연기하려면 섬세한 표현력이 필요했습니다. 그 속은 사랑과 의심과 용서 등등으로 격렬하게 들끓고 있지만, 미리는 결국 배우가 미세한 표정과 말의 뉘앙스, 어조 변화 같은 것만으로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예요. 손예진이 그걸 해낸 거죠.” – <어쩔수가없다> 감독 박찬욱

<W Korea> 베니스국제영화제에 다녀오셨죠. 지금 떠올리면 어떤 장면이 생각나세요?
손예진 음, 처음부터 시작할게요(웃음). 일단 그곳까지 가는 여정이 너무 길고 고단했어요. 파리에서 환승해 베니스로 가는데, 비행기 타고도 이륙이 1시간 가까이 지연되고, 또 다음에 타야 할 비행기는 연착되고. 모두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상태로 차를 타고, 다시 배를 타고… 그렇게 베니스 리도 섬에 도착했어요.

영광의 순간을 맞으러 가는 길은 쉽지 않네요. 해외 영화제 참석은 처음이셨죠?
네. 칸이나 베니스의 레드카펫은 그간 저도 사진으로만 봤죠. 레드카펫에 여러 영화인이 모이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식이 아니라, 그날의 상영작 한 팀마다 확실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식이더라고요. 다시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올까, 다시 올 수 있더라도 이들과 함께 맞는 순간은 아니니 지금이 얼마나 특별한가, 뭉클했죠.

손예진이라는 배우가 이제야 그 레드카펫에 섰다는 점이 조금 의외예요.
제가 더 어릴 때 갔다면 이번만큼 소중함을 느끼진 못했을 것 같아요. 나이 들어 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그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와닿는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박찬욱 감독님에게 ‘마에스트로!’ 하면서 사인 요청하고 칭송하는데,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프리미어 상영이 끝나고 맞이하는, 그 유명한 ‘기립박수’는 어땠어요? 하이라이트의 순간이죠.
사전에는 조금 걱정도 했어요. 몇 분 동안 박수만 친다는 게, 굉장히 긴 시간이라 좀 어색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무려 9분이 엄청 빨리 지나갔어요! 서로 껴안고, 박수 치고, 다시 눈 마주치고…. 특히 저랑 박희순 선배가 너무 울컥한 나머지 둘 다 얼굴이 시뻘건 모습으로 찍혔더라고요(웃음). 저는 기립박수 받을 때에야 감동해서 눈물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선배님은 영화를 보면서부터 이미 울었어요. 상영 중에 눈물을 닦는 거 같기에 ‘왜 이래요, 선배?’ 했더니 ‘모르겠어요, 오늘 자꾸 눈물이 나.’(웃음)

<어쩔수가없다>를 보면서 만수의 아내인 미리에게 감정 이입되는 관객도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여자’의 시선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 말이에요.
그럴 수 있죠. 물론 오롯이 만수가 주인공인 이야기예요. 만수는 성별을 떠나 언젠가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죠. 미리 캐릭터에겐 사실, 딱히 도드라진 모습이 있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딱 덮자마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와. 엄청난 영화가 나올 것 같다.’

일단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군요? 그 이야기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고민하는 과정은 거쳤을 것 같아요.
저는 작품을 볼 때 내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역할인지를 봐요. 혹은 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면 흥미를 느끼고요. 처음엔 ‘미리를 정말 내가 해야 할까? 다른 배우가 해도 다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작품이 정말 멋지게 나올 거라는 예감이 드니까, 내 역할이 어떻든 감독님과의 작업에서 뭐라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장이 너무 궁금했어요. 내가 전적으로 짐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연기 욕심도 덜어내고 새롭게 배워가면서, 저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되는 기회. 그런 생각 끝에 결정했죠.

박찬욱 감독님과 함께 유튜브 촬영을 하면서 비하인드를 들려주셨지만, 두 분 첫 만남 때 감독님이 어떤 식으로 어필했는지는 궁금하더라고요(웃음).
감독님은 그냥 이런 식이셨어요. ‘그렇지. 미리는 조연이지. 분량이 좀 적은 편이지.’ 저는 그렇게 담백하게 얘기하시는 게 마음에 들었어요. 만약 미리 역을 두고 ‘이러이러해서 사실 진정한 주인공은 미리야’ 식이었다면, 배우가 과연 모르겠어요? 감독님은 솔직한 분인 거죠.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소득은 있었나요?
그럼요. 제가 이 나이에 구체적인 디렉팅을 받으면서 연기할 기회가 잘 없어요.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과 작업하면서는 숙제를 받아든 기분도 좀 들었어요. 초반엔 숙제가 부담스러웠는데, 점점 조금씩 즐기게 됐고요. 저는 배우에게 제일 중요한 게 ‘해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작품 해석, 캐릭터 해석. 그다음 그걸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의 문제 같아요. 내 해석을 가져가서 보여드리면, 감독님이 이런저런 의견을 주시잖아요. 그건 또 다른 해석인 거죠. ‘나는 여기서 미리가 이랬으면 좋겠는데, 감독님 해석은 어떨까?’ 그 궁금함이 있더라고요. 주문을 받으면 그걸 제가 소화하는 시간도 필요하죠. 익히고, 소화하고, 표현해내고, 그렇게 따라가는 과정이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예진 씨가 준비한 것과 해석의 차이가 컸던 장면이 있다면요?
장면보다는 대개 ‘말투’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쏘아붙이는 말투를 생각했는데, 감독님은 쏘아붙이는 느낌보다 속삭이는 듯한 말투를 원하셨다거나.

감독님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만, 대사 한 줄을 두고 장음과 단음, 억양, 띄어 읽기 같은 것을 철저하게 디렉팅하신 모양이죠?
‘가나다라’를 익히는 느낌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죠(웃음). ‘몸조심해야 돼’라는 대사 하나 가지고도 얼마나 여러 가지를 해봤는지. 사람마다 말투가 다 다르잖아요. 심지어 요즘 어린 세대는 말투만 다른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언어의 말을 하고요. 배우들은 저마다 각자의 루틴, 억양, 호흡으로 다르게 가려고 해요. 저도 대사를 저만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풀고 싶은 편이고요.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깨달은 건, 대사에 주어진 원초적 의미가 중요하다는 점이었어요. 지금까지는 저만의 것을 찾는 고민을 좀 더 해왔다면, 대사의 진정한 의미랄까, 정통을 지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요.

저는 <어쩔수가없다> 개봉 기념으로 왠지 <비밀은 없다>를 다시 보고픈 마음이 들더군요(웃음). 손예진 씨는 그 영화에서도 10대 아이의 엄마였어요.
저는 20대 초반에 <연애시대>에서는 이혼한 여자로 나왔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연기들을 했나 몰라. <비밀은 없다>를 다시 한다면, 그때와 좀 다르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때보다 더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이라는 걸 절대 무시 못하겠거든요. 아무리 스스로를 엄마라고 상상했어도, 그때 저는 엄마가 아니었잖아요.

지금 아이가 몇 살이죠?
세 살이에요.

2022년 초 방영된 드라마 <서른, 아홉> 이후 아이와 가정에 집중하셨죠. 일에서는 멈춤의 시간이었지만, 개인의 삶은 지속되고 있었을 텐데요. 어떤 시간이었나요?
완전히, 너무나 그 생활에 충실했어요. 저는 20년 이상 일을 멈춘 적이 없어요. ‘좀 쉬고 싶다’ 하면서도 자꾸 다음 작품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 나이가 좀 있는 상태에서 아이를 가지다 보니, 아이가 세 살 때까지는 꼭 내가 케어해주고 싶었어요. <어쩔수가없다>를 하려고 육아를 2년만 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다행히 촬영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진 않았어요. 그런 상황도 고마웠어요.

다시 촬영장으로 향할 때 기분이 이상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일의 소중함도 알고. 워킹맘들은 다 비슷한 얘기를 할 거예요, 밖에서 일하는 게 리프레시된다고. 육아를 할 때는 정말 한시도 안테나를 아이에게서 떼어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도 쉬는 날이 생기면 저는 아이한테 올인해요. 제가 만약 20대 때 아이를 낳았다면, 일하고 싶어 근질근질했을 수도 있어요. 지금 이런 느낌을 못 받았을 것 같아요.

베니스행을 앞두고도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로 바쁘셨고, 이제 또 <버라이어티>라는 작품 촬영이 시작되죠.
모두 기존에 했던 연기들과 결이 다른 연기를 해야 해요. <스캔들>에서도 좀 센 캐릭터인데, <버라이어티>에서는 좀 더 강렬하죠. 그래서 흥미로워요.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은 배우라면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쩔수가없다>를 앞둔 때부터 저는 연기 인생의 새 챕터를 시작하는 기분이었어요. 이제 새로운 가능성의 폭이 생긴 듯해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연기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 드나요?
오랫동안 제가 스스로 봐온 제 모습이 있잖아요. 나는 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의 진폭, 표현의 한계라는 게 분명 있을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매번 자기 자신을 깨나갈 수 있겠어요. 그게 쉽지 않기 때문에, 늘 스스로를 변주하고 깨면서 연기하는 배우가 위대한 배우인 것 같아요. 아예 뭣 모르고 연기했을 때는 오히려 쉬웠어요. 물론 잘 몰라서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였죠. 이제는 훨씬 복잡해요. 감정의 레이어도 많아졌고,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선택지도 넓어져서 잘 모르겠고. 그래서 어렵죠.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였다가, 뭘 좀 알 것 같은 느낌으로 작업해간 기억이 있다면요?
예를 들면, 제가 어린 나이 때부터 좋은 멜로물을 찍었잖아요. 그러다 <사랑의 불시착>을 했을 때, 어떻게 전과 다른 애틋함을 보여줘야 하는지 생각이 많았어요. 물론 20대 초중반에 울던 모습과 30대 후반에 우는 모습은 확연히 달라요. 그럼 또 ‘시청자가 예전의 모습을 기대하면 어떡하지?’ 같은 불안감도 들죠. 하지만 과거와 똑같은 걸 하는 것도 제가 별로고. 그런 여러 가지 고민이 끝없었어요.

비교적 최신작을 언급하시네요? 손예진 씨는 생각보다 이른 나이부터 어려운 연기를 시도했다고 생각해서, 2000년대의 작품 얘기가 나올 줄 알았어요.
그때는 요령 없이 열심히만 했어요. 신 하나 하나를 잘 해낼 생각으로. 중요한 신을 앞두면 사흘 전부터 잠도 못 잤어요. 물론 멜로만 잘하는 예쁜 여배우의 틀을 깨려고 했던 작품이 <작업의 정석>이에요. 그렇게 저 나름의 변주라면 변주를 시작할 수 있었죠.

배우로 긴 시간을 지나온 끝에 지금 남은 교훈은 뭔가요?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저는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어요. 나도 잘 해내야 하고, 흥행도, 시청률도 좋아야 하고…. 변주라는 걸 하면서도 ‘이걸 좋아해주실까?’ 하면서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했어요. 40대가 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보니,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져요. 그러려면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즐길 때 즐기고, 힘들면 좀 쉬고, 그렇게 가야겠어요. 이건 마라톤이니까.

손예진은 20년 이상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러다 2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오로지 가정과 육아 생활에만 충실했다. 첫 해외 국제영화제 경험을 안겨준 <어쩔수가없다>를 마치고 두 작품에 연이어 들어간 손예진에게는 이제 연기 인생의 새 챕터가 펼쳐지고 있다.
“40대가 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보니,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져요. 그러려면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작업을 즐길 때 즐기고, 혹시나 힘들면 좀 쉬고, 그렇게 가야겠어요. 이건 마라톤이니까.”

단 하나의 장면, 단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그해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더블유> Vol.10은 그들을 위한 빛나는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고현정, 김우빈, 박찬욱과 손예진, 소지섭, 송중기, 임윤아, 주지훈, 한지민. 그 이름을 되새기는 건 지금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도달한 감정의 깊이와 밀도를, 작품의 성취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독자적인 순간이 찬란하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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