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 코리아 Vol.10 베스트 퍼포먼스 – 한지민

이예진, 전여울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한지민은 힘이 아주 세다. 연기에 쏟아붓는 힘도 힘이지만, 대중의 시선과 감정을 끌어당기는 일종의 중력 같은 내면의 힘이 가히 압도적이다. 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고, 결국은 그 기대를 사뿐히 뛰어넘는다. 그녀는 진짜 힘센 배우다.” –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 감독 김석윤

<W Korea> 올해 JTBC <천국보다 아름다운>으로 김석윤 감독과 네 번째 작품을 함께했죠. 이쯤 되면 서로 ‘척하면 척’이었겠네요.
한지민 서로 어떤 언어로 소통한들 오해가 없는 사이가 됐죠. 어떤 현장에서는 연기가 온전히 제 몫이 되기도 하는데, 김석윤 감독님과 함께할 때는 자연스레 많이 의지하게 돼요. 감독님 작품 안에서는 제가 이상하게 담길 리 없다는 강한 신뢰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역할이든 고민 없이 하겠다고 나서는 편이에요.

2019년 JTBC <눈이 부시게>에 이어 이번 작품으로 다시 한번 ‘젊은 혜자’를 연기했어요. 가끔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그건 연기라기보다 김혜자 안에서 체화되어 꺼내지는 무언가라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촬영 전 감독님이 시범을 보이면 선생님은 그걸 100% 스펀지처럼 흡수하세요. 선생님은 ‘의심’이라는 걸 모르는 분 같아요. 언젠가 “너무 잘해도 징그럽잖아.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 그대로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그냥 몸으로 풀어내세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느껴져요. 그런 선생님을 보다 ‘아, 나는 어느새 때가 묻었구나’ 문득 깨달을 때가 있어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연기한 ‘솜이’는 끝까지 정체가 모호한 인물로 남다가, 최종회에서 실은 ‘해숙’(김혜자)의 잠재의식이 빚어낸 허구의 존재였음이 드러나요. 언젠가 감정 신을 연기할 때 “버튼 포인트가 있어야 확 올라온다”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이번에 ‘솜이’의 정체가 밝혀지며 분노, 공포, 후회, 고통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9~10분의 클라이맥스 신에서는 그 ‘버튼’을 어떻게 찾으셨을까요?
어떤 신은 끝내고 나면 내가 대사를 어떻게 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캐릭터가 나에게 씌워지는 순간이 있고, 내가 곧 캐릭터가 되는 때가 있어요. 그때는 카메라도 안 보이고 머릿속에서 계산이 사라져요. 심장이 툭 건드려지는 한순간, 그게 제가 말한 ‘버튼 포인트’예요. ‘솜이’는 자신의 실수로 자식을 잃어 그 죄책감에 잠식된 인물이에요. 상상은 되지만 감히 직접 겪어본 감정은 아니잖아요. 그 신을 앞두고 압박감이 정말 컸어요. 그런데 상대역을 맡은 류덕환 배우가 “엄마”라고 한마디를 던지는데 그 목소리에 완전히 무너졌어요. 가슴이 사무치게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신이 끝났는데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상대 배우가 던진 단 한마디가 버튼이 되어버린, 처음 겪는 경험이었어요.

그 장면에서는 저도 울었어요. 이상하게 한지민의 눈물 연기를 볼 때면 어김없이 따라 울게 돼요. 감정이 너무 쉽게 전이돼요.
다들 제가 울면 그렇게 불쌍해 보인대요(웃음). 저 역시 관객으로서 ‘저 배우가 운다’라는 의식이 드는 건 싫어요. 그래서 늘 버튼이 저를 먼저 치기를 바라요. 그 순간이 오면 연기가 아니라 제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진짜 감정이 되니까요.

<천국보다 아름다운>과 마찬가지로 사후세계를 다룬 티빙 <욘더>의 경우 대본상 감정 지문이 거의 없었다 들었어요. 이는 곧 배우의 더 많은 해석과 선택이 요구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현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빈칸을 메워가나요?
물론 부담은 크지만 그만큼 배우가 채울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해요. 다행히 <욘더>의 경우 이준익 감독님이 제가 선택한 감정들을 “그게 맞다”고 지지해주셨어요. 작품 속 세계는 망자의 생전 기억으로 설계된,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차원의 공간이잖아요. 그런 곳에서는 감정에 정답이란 게 없다고 봐요.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아주 많은 대사들이었죠. 지금 작품을 다시 본다고 해도 그때 제가 풀어낸 감정이 100% 정답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 모호함이야말로 <욘더>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라고 느껴요.

공교롭게도 짧은 기간에 사후세계를 다룬 두 작품에 연이어 참여한 셈이에요. 자연스럽게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사유해보는 시간을 가졌겠어요.
어렸을 때 조부모님과 함께 살아서인지 늘 죽음이 두려웠어요. 두 분을 떠나보내야 할 날이 올까 봐, 그때가 되면 모든 게 전원이 꺼지듯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상상했죠. 그런데 영화 <코코>가 그려낸 사후세계는 참 좋아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런 알록달록한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거든요. 5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언니가 조카에게 <코코>를 보여줬는데, 망자가 금잔화가 깔린 아치형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조카가 이렇게 말했대요. “엄마, 다행이다. 할머니 무릎이 아프셨잖아. 그런데 저기는 힘든 계단이 없으니까 할머니가 잘 걸으실 수 있겠다.”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저는 사후세계가 꼭 그런 모습이면 좋겠어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처럼 천국에 가서도 계속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 ‘이제 해방이다!’ 하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아요(웃음).

과거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수록 내가 좋아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나이 듦이 배우의 연기를 한층 성숙하게 만든다고 보시나요?
분명 좋은 쪽이 훨씬 많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경험의 층위가 달라지잖아요. SBS <올인>으로 처음 데뷔했을 때는 ‘서른이 되면 훨씬 많은 감정을 알 수 있겠지?’라고 막연히 상상했는데, 실제로 그 나이가 되니 정말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다만 경력이 쌓인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시야가 넓어진 만큼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기술적으로 계산하듯 연기할 때가 있거든요.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몸으로 부딪치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때도 있어요. 김혜자 선생님이 완벽하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하시는 게 이런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요. 가끔은 다시 조금 무뎌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시대와 관객의 변화로 연기가 달라지기도 할까요?
물론이죠. 예전에는 캐릭터가 반드시 도덕적이고 착해야 한다는 일종의 노이로제가 있었잖아요. 여성 캐릭터도 마찬가지였죠. 어떤 상황에서도 캔디처럼 밝고 씩씩해야 한다는 공식이 오랫동안 유지됐는데, 몇 년 전부터 그 틀이 완전히 깨진 것 같아요. 한때 저는 멜로만 하면 늘 작품 속에서 울었거든요. ‘이건 나의 숙제다’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어요. 작품과 캐릭터는 바뀌는데, 정작 제가 비슷한 톤으로 감정 연기를 한다는 게 지겹게 느껴진 때가 있었죠. 그런데 시대와 관객이 바뀌면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확 넓어졌어요.

올 초 방영한 SBS <나의 완벽한 비서>의 ‘지윤’ 역시 커리어는 물론 사랑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물이었죠.
맞아요. 사실 촬영하며 ‘지윤’이란 인물을 더 주체적으로 만들어간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극 중 ‘은호’(이준혁)와의 연애 사실을 처음 대본에서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들키는 설정이었는데, 현장에서 ‘지윤’이 먼저 공개하는 방식으로 바꿨죠. 첫 키스 장면도 ‘지윤’이 주도하도록 조정했고요. 예전 같으면 연애나 키스가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처럼 여겨졌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잖아요. 작가님도 열린 분이셔서 이런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주셨어요.

요즘 들어 배우로서 느끼는 목마름이나 기대가 있을까요?
액션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큰 체구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시원시원한 맛이 부족하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래서 쉽게 제안받기 어려운 장르가 있죠. 최근 영화를 봤는데, 브래드 피트가 맡은 캐릭터가 정말 멋지더라고요. 영화관을 나서면서 그의 나이를 새삼 검색해보고 ‘우리나라에선 누가 저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을 정도예요. 그런 식으로 에너지를 한껏 발산하는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아직 제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배우로서 새롭게 탐색하고 있는 주제나 화두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전에는 작품이 반드시 어떤 메시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해’라며 마음이 크게 동요되곤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그 부담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과거의 저는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이러면 안 된다’는 벽을 쌓아두는 편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허물어진 것 같아요. 이게 작품을 선택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요. ‘이건 요즘 친구들이 좋아하겠다’ 싶으면 그 자체로 흥미롭게 참여해보자는 마음이 먼저 들어요. 그래서 ‘요즘 뭐 해?’라고 물으면 ‘응, 그냥 가벼운 거 해’라고 말해요.

스스로 한결 가벼워진 면도 있지만, 관객의 취향을 아주 기민하게 살피는 태도로 보여요. 요즘은 특히 가볍고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시대잖아요.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제안 받은 작품을 살펴보는데, 예전 같으면 분명 흥미롭게 봤을 주제인데도 어딘가 ‘조금은 덥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만큼 판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해요. 최근 영화관에서 <좀비딸>을 봤는데,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무리지어 와서 관람하는 거예요. 처음엔 시끌벅적했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엔 그 애들이 어떻게 울었는지 아세요? ‘흐흐흐흑’ 하면서 흐느끼며 울었어요(웃음).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덩달아 영화가 더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팝콘 영화는 분명 필요해요. 우선 즉각적으로 즐겁고 어딘가 시원스럽잖아요. 사람들이 영화관에 갈 이유가 여기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스쳤어요.

어쩐지 한지민의 눈물 연기를 볼 때면 어김없이 따라 울게 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감정이 너무 쉽게 전이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죠. 올해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도 인상적인 감정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말했습니다. “저 역시 관객으로서 ‘저 배우가 운다’라는 의식이 드는 건 싫어요. 그래서 늘 버튼이 저를 먼저 치기를 바라요. 그 순간이 오면 연기가 아니라 제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진짜 감정이 되니까요.”

단 하나의 장면, 단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그해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더블유> Vol.10은 그들을 위한 빛나는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고현정, 김우빈, 박찬욱과 손예진, 소지섭, 송중기, 임윤아, 주지훈, 한지민. 그 이름을 되새기는 건 지금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도달한 감정의 깊이와 밀도를, 작품의 성취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독자적인 순간이 찬란하게 펼쳐집니다.

포토그래퍼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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