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소지섭은 작품을 단단히 붙드는 힘을 가진 배우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서사의 무게가 달라지고, 인물의 고독과 강인함이 동시에 설득력을 가진다. 강렬한 액션부터 고요한 순간의 울림까지, 그는 모든 장면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울림은 작품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 넷플릭스 <광장> 시리즈 총괄 박정준



<W Korea> 액션 연기에 능수능란하시죠. 언제부터 그런 인상이 짙어졌을까 생각해보니, <영화는 영화다>의 영향이 제일 큰가 싶어요. <회사원>도 있고요.
소지섭 <유리구두>라는 드라마로 처음 액션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 후로 조금씩이라도 액션 연기를 하면서 꾸준히 왔네요.
<유리구두>요? 2000년대 초반에 방영한 드라마인데요!
네. 그 작품에 생각보다 액션이 많이 등장해요. 그때 제가 20대 중반이었죠.
6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에서 소지섭 액션의 정수를 보여주셨습니다. 액션 연기, 여전히 할 만한가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체력도 괜찮은 편이고요. 물론 머릿속에서 이미 나는 움직였는데, 몸은 그보다 반 박자 정도 느린 느낌은 있어요(웃음). 당분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액션 연기의 경우 일본에는 사무라이 검도, 중국에는 쿵후 같은 상징적인 스타일이 있잖아요. 한국에서는 대표적인 무엇을 내세우기가 어렵다는 말을 아주 예전에 정두홍 감독님이 하신 거로 기억해요. 액션 영화에서 택견을 구사하기에는 잘못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고요.
‘이크!’ 하려니 자칫 그럴 수 있죠. 일본 액션물에서는 긴 검을 잘 쓴다면, 한국에서는 조폭들이 대개 회칼을 쓴다는 차이도 있고요. 하지만 근접전 같은 한국만의 스타일이 또 있는 것 같아요. 뭐라 이름을 붙이긴 애매하지만. 저는 한국식 액션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사실 액션 영화에서 현란한 액션 신을 마주하면, 정확히 상황이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를 때가 많아요.
인물이 가진 감정이 전달되는 액션이라면 그래도 뭐가 눈에 보일 거예요. 그 사람의 감정, 액션과 리액션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면요. 의미 없는 액션은 재미도 없어요. 그냥 ‘주인공이 나쁜 놈들과 멋있게 싸운다’ 식의 액션이 계속 나오면 그럴 수밖에 요. 저는 불필요한 액션도 좋아하지 않아요. 액션도 대사랑 똑같은 거예요.
‘액션 연기는 몸으로 하는 대사’라는 말을 하셨죠. 액션 연기에 감정을 어떤 식으로 담을 수 있는 거죠?
주먹 한 방을 치더라도 그 사람의 얼굴과 쳤을 때의 느낌, 또 상대방이 그걸 받았을 때의 느낌이 다 전달되어야죠. 그래야 관객과 시청자가 ‘저 사람이 왜 주먹을 날리고 있는지’ 납득하고, 누가 맞을 때는 ‘아, 아프겠다’고 느낄 수 있어요. 물론 말과 달리 어려운 문제긴 해요. 저는 그 부분에서 많이 노력하는 편입니다.
<광장>은 유명한 웹툰이 원작이에요. 소지섭 씨가 연기한 ‘기준’은 복수하기 위해 과거에 몸담았던 세계로 돌아오죠. 그를 움직이는 건 동생에 대한 부채 의식이고요.
기준은 기석에게 미안함이 있어요. 자기로 인해 동생이 어둠의 세계에 발 들였는데, 본인은 빠져나왔고 동생은 거기 남았으니까. 같이 빠져나오자니 둘 다 다치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건데, 결국에는 동생 홀로 죽었죠.
소지섭 씨가 지향하는 ‘의미 있는 액션’을 위해 감독님과 디테일하게 상의한 거로 알아요.
액션을 할 때, ‘일단 스타트를 끊었으면 웬만하면 뒤로 물러서지 말자’고 했어요. 기준은 계속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다만 이 사람 저 사람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나아가고는 있는데, 그 과정에서 안쓰러움과 처절함이 전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는 기준도 선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시청자들이 ‘저럴 만한 이유가 있지’라고 느끼려면, 제가 감정을 실어야 했어요.
처절함과 처연함은 주로 배우의 지친 얼굴을 통해 표현되나요?
지치고 힘든 와중에도 인물이 계속 전진을 해야죠. 또 전진하고, 계속 전진하고. 완전히 끝이 날 때까지. 생각보다 더 과하게 타격을 주기도 하는 식으로요. 기준도 많이 맞고, 칼에 찔리기도 해요. 그런 대미지가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더 힘이 실릴 거라고 봤어요.
배우마다 고유의 분위기가 있죠. 갖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데, 소지섭 씨의 경우 그 아우라를 대체하는 용어로 ‘소간지’가 쓰입니다. 여러 가지를 함축한 단어죠.
그런 이미지랄까, 말씀하신 부분이 언제부터 저에게 생기고 자리 잡은 건지 저도 개인적으로 참 궁금하긴 해요.
소지섭이 어째서 소간지가 되었는지, 정말 모르세요?
음. 아무래도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후부터 생긴 거겠죠. 그 작품으로 제가 이름을 많이 알렸으니까. 알려지고 보니 사람이 말수도 별로 없고, 미디어에 잘 비치지도 않고. 그러면서 저를 조금은 무게감있게 봐주시게 된 거 아닐까 해요.
젠지 사이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계속 회자된다는 건 아시죠? 혹시 <뿅뿅 지구오락실>도 아시나요?
저도 얘기를 듣고서 그 방송을 봤어요. 거기서 은지 씨가 언급해주면서 이제 다른 친구들도 조금씩 보기 시작한 것 같더라고요.

소지섭 씨가 진정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진 분야는 연기와 패션 중 어느 쪽이 먼저인가요?
아, 패션에는 그렇게 관심이 크지 않았어요. 좋아하기는 했지만, 어릴 때 제가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스스로 배우로서 재능이 좀 있다고 느끼게 된 때는 언제인가요?
<발리에서 생긴 일>을 할 때 ‘연기가 진짜 재미있는 거구나’ 처음 알았어요. 그전까지는 그냥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컸죠. 이미 이 길에 들어섰으니 연기를 위한 연기를 하는 느낌도 있었고. 그런데 <발리에서 생긴 일>의 ‘강인욱’이라는 인물과 강인욱이 처한 상황들은 저와 비슷한 데가 많았어요. 솔직히 그 캐릭터가 너무 나 같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연기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자연스럽게 뭐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제가 아직도 그 드라마를 못 잊는 이유가 바로 배우와 캐릭터 간의 그 공명에 있는 것 같네요. <발리에서 생긴 일>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그 시절 출연작을 좀 찾아보기도 하세요?
제대로 다 보진 않는데 클립으로 종종 볼 때가 있어요. 마음이 조금 답답할 때도 보곤 해요. 지금도 물론 연기가 어렵지만, 연기를 더 몰랐을 때, 그저 젊음의 에너지로 밀고 나가던 그 힘을 다시 느끼고 싶을 때 봐요. ‘대차게 잘하네’ 싶기도 한 제 모습이 보여요. 이제는 그런 느낌을 갖기가 참 어렵거든요. 내 연기만 잘하는 거로 끝이 아닌 것 같아서요.
연차 높은 주연 배우의 책임감 같은 걸 말하나요?
그럴 수도 있고요. 어릴 적에는 상대 배우만 봐도 됐는데, 지금은 봐야 할 것들, 보이는 것들이 많아서 몰입이 어려울 때가 있어요. 작품 하나에 수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고, 금전적으로 최소한 손해는 안 봐야 하고. 그런 부담감이 좀 힘들죠.

영화 <자백> 개봉을 앞두고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 ‘앞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하셨죠. 그것 역시 책임감에서 비롯된 바람일까요?
오래 일하다 보니 소지섭이라는 가치를 믿어주고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점점 더 생겼어요. 제가 사라지거나 빠르게 내리막길을 걸으면, 그들에게도 변화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 친구들이 오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더 잘 되고 싶다’ 하는 욕심은 이제 더는 없어요. 네, 그 책임감이라면 책임감이 오히려 저에게 에너지를 줘요. 그게 없었다면 그냥 주저앉아 쉬고 싶었던 타이밍이 몇 차례 있었어요.
일을 하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뭔가요?
일단 시간 약속 잘 지키는 거요. 그게 신뢰의 시작이에요. 그리고 배우로서든 한 인간으로서든 소지섭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에요.
신실함이 느껴집니다. 신실한 자세를 견지하다 보면, 사실 남모르게 상처받을 일도 많을 텐데요.
많죠. 그런데 제가 인간관계에 있어선 쿨해요. 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해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서 그 관계를 꼭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저 사람을 계속 보고 살아야 하나’ 싶은 고민이 든다면 좋은 관계는 아니라는 뜻 같거든요. 그럴 때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도 방법이라고 봐요. 상대가 정말 ‘내 사람’이라면, 다시 또 만나게 될 거예요.

배우로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에 생기는 자부심과 고민이 모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이들과 그런 고민을 나누기도 하나요?
어우, 우리끼리 그런 얘기는 서로 절대 안 해요(웃음). 만나도 일적인 얘기는 안 하고 그냥 수다나 떠는 거죠. 그저 이렇게 생각해요. 누군가 저를 찾아 줄 때 고마움을 갖고 계속 인사드리는 것. 그러니까 잊히기 전에 꾸준히 나와서 저를 보여주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려면 어쨌든 계속 쓰임새가 있어야 하는데, 물론 그 점에서 쉬운 일은 아니에요.
여러 두려움과 여건 때문에 ‘꾸준히’보다는 ‘신중하게’를 택하는 경우도 있는데, 소지섭 씨는 어느 순간 답을 찾으셨군요.
내가 잘하는 것이든 못하는 것이든, 뭘 하고 나를 비춤으로써 사람들 눈에 어색하지 않게 늙어가는 것도 좋잖아요. 저는 다작은 못해도, 꾸준히는 하고 있어요. 제가 작품 하나를 끝내면 감정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다시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에요. 스스로 창피한 게 싫어서 작품 할 때 제 에너지를 다 쏟아내거든요.
배우로서 갈증이라면 갈증도 있나요?
연기에 대한 갈증은 늘 있어요. 그게 없다면 더 이상 연기를 안 할 것 같아요. 저라는 배우에게 호불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정에 호소하거나 세게 내지르는 스타일의 연기 방식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감정 신이 있어도 그걸 좀 다운시키거나 눈으로 연기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스타일로 연기를 더 잘하는 배우이고 싶고요.
어떤 유의 배우나 작품을 보면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나요?
한국 배우든 외국 배우든 제가 잘 모르는 배우들. 낯선 얼굴의 누군가가 잘하는 모습을 보면, 속에서 뭔가 꿈틀꿈틀하는 게 느껴져요. 반갑기도 하고,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랄까요. 저도 오래 일한 배우이다 보니 시청자나 관객이 저를 봤을 때 새롭게 느껴지기는 쉽지 않잖아요.

소지섭 씨는 해외 영화 수입에 투자하는 거로도 알려졌어요. 그 말을 하는 걸 꺼리신다고 들었어요.
언급하기가 조심스럽죠. 그 일을 업으로 삼는 분들이 있잖아요. 제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해서 그 일을 한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거죠.
하지만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함이 있어요. 한때 ‘소지섭이 영화 수입도 한다’고 알려진 적이 있지만, 정확히는 ‘찬란’이라는 영화 수입 ∙ 배급사에 투자하는 거로 알아요. 찬란 대표님의 안목을 믿고 함께하게 됐나요?
대표님과 친분으로 시작된 일이긴 하죠. 10년이 넘은 것 같네요. 저도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저, 해보고 싶은데 받아주실래요?’ 해서 같이 하게 됐어요. 그 시작이 <필로미나의 기적>이었던 거로 기억해요. 왜 해외 영화제에 가면 필름 마켓이 열리잖아요. 어떤 작품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저도 같이 고민하고 의견을 내는 식이었죠. 그런 커뮤니케이션과 결정이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데, 제가 바빠서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대표님이 워낙 그 일을 오래 하셨고 감이 좋으시니까, 어느 순간부터 저는 대표님을 전적으로 믿고 투자하는 쪽으로 흘러오게 된 거예요.
소위 ‘작은 영화’라 불리는 작품을 비롯해 다양성 영화들은 투자가 있기에 한국 관객과 만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서브스턴스>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같은 주요 시상식 수상작부터 <미드소마>, <유전>, <악마와의 토크쇼>, <카페 소사이어티> 등 지난 10년간 찬란의 수입작이 굉장히 많아요.
저는 투자했다고 100원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물론 수익이 날 때가 있지만, 거기에 보태서 다시 투자하거나 비용 나갈 일이 생기기 때문에 제가 수익금을 챙겨본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런 이야기 하는 걸 지금까지 민망하게 생각해왔는데, 최근에는 생각을 조금 바꿨어요.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고 알려져서 관객이 하나라도 더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 같아요. 작품명이 한 번이라도 더 거론되고 회자된다면 의미 있는 일이죠.
배우로서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투자로도 실천하고 계십니다. 소위 ‘대박’에 대한 욕심은 이제 없지만, 누군가 배우 소지섭을 재발견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있을까요?
연차가 쌓일수록 그 새로운 얼굴을 찾는다는 게 사실 쉽지가 않아요. 이제 현장에 나가면 제가 거의 제일 선배죠. 선배에게는 누가 연기에 대한 주문도 잘 안 하거든요. 선배니까 알아서 잘해야 하는 거죠.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어요. 꼭 새로운 얼굴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할리우드를 보면, 리암 니슨이나 제이슨 스타뎀은 액션 쪽으로 특정 색이 입혀졌지만, 바로 그 색 때문에 나이 들어도 계속 작품을 하면서 사랑받고 있잖아요. 한국에서도 어떤 장르에 특화된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그 한 길을 계속 나아가보면 어떨까 해요. 누가 그 길을 좀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지난 6월, 우리가 알던 소지섭이 돌아왔습니다. <광장>이 전달한 신체적 쾌감, 그리고 액션 속에서도 우수가 어른거리는 정서는 바로 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액션은 재미도 없어요. 그냥 ‘주인공이 나쁜 놈들과 멋있게 싸운다’ 식의 액션이 계속 나오면 그럴 수밖에요. 저는 불필요한 액션도 좋아하지 않아요. 액션도 대사랑 똑같은 거예요.”
단 하나의 장면, 단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그해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더블유> Vol.10은 그들을 위한 빛나는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고현정, 김우빈, 박찬욱과 손예진, 소지섭, 송중기, 임윤아, 주지훈, 한지민. 그 이름을 되새기는 건 지금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도달한 감정의 깊이와 밀도를, 작품의 성취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독자적인 순간이 찬란하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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