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 코리아 Vol.10 베스트 퍼포먼스 – 고현정

장진영, 권은경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내가 본 고현정은 자기 연민이 없다. 대신 고현정 안에 자리잡고 있는 건 지금껏 살아오면서 거친 수많은 경험치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카메라 앞에서 때로 상상하지도 못한 얼굴을 보여주며 감독을 흥분시키는 배우. 카메라 뒤에서는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연구하며 헌신적인 사람. 궁금했던 고현정의 실체를, 나는 비로소 확인했다.”
드라마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감독 변영주

부드럽고 유연한 실루엣과 상징적인 D 로고 버클이 모던한 브리앙 템포는 Delvaux 제품.

<W korea> 이틀 전에 변영주 감독님과 짧지 않게 통화했어요. 고현정 씨랑 만나기 전에 왠지 감독님 말씀을 먼저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내용 궁금하시죠?(웃음)
고현정 음. 좋은 얘기 들려주셨을 것 같아요(웃음).

감독님은 SBS 드라마 <작별>에서의 고현정이 그렇게 좋았대요. 90년대 그 시절에, ‘현대 여성’의 애티튜드나 모럴을 그토록 보석처럼 표현한 배우와 작가가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고.
그 얘기 저한테도 하셨어요. 제 작품에서 <작별>을 꼽는 분은 처음 만났어요. 김수현 선생님의 힘이죠.

요즘엔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둔 드라마가 워낙 많잖아요. 가끔 ‘선생님’들의 맛이 그리워요.
선생님들의 필력이 있죠. 시각적인 것 외에도 미묘한 감정을 포착한다든지, 대사의 쫄깃함 같은 거. 이금림 선생님, 김정수 선생님 같은 분들도 지금 어딘가에서 뭘 하실 텐데 제가 소식을 다 모르는 것 같아요. 그분들도 작품을 해주면 좋겠어요

정교한 가죽 디테일과 섬세한 스티칭 기법에서 장인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브리앙 아스날은 Delvaux 제품.

SBS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이하 <사마귀>)은 ‘사마귀’로 불리는 연쇄살인마 ‘정이신’으로부터 출발하는 드라마예요. 그 정이신 역에 오직 고현정을 떠올린 건 변영주 감독이고요. 두 분, 첫 만남 때부터 서로 반가워했다죠?
저는 일로 사람을 처음 만날 때 탐색을 잘해요. 상대가 나에게 오해를 갖고 있는지 어떤지, 그런 점을 살펴보는 거죠. 저에 대한 여러 얘기와 떠도는 정보가 있잖아요.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얘기가 있었을 거고요. 저희 둘 다 좀 긴장하면서 만난 듯한데, 만나자마자 서로 알아챈 것 같아요. 모든 게 다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애초부터 서로를 향한 마음이 열려 있어서 그랬나 싶습니다. 감독님은 ‘고현정에 대한 찬가’를 감독의 눈으로, 또 인간의 눈으로 조목조목 들려주셨어요.
저녁 식사까지 하면서 길게 대화했는데, 그러다 보면 어떤 느낌이라는 걸 받잖아요. 일단 배려심이 참 많은 분이더라고요. 사람에 대한 애정도 깊고요. 그래선지 다정하고 유연하세요. 가끔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나에 대한 선입견이 많구나, 이걸 어떻게 풀면서 함께 작업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큰 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럼 하나씩 풀어가면서 작업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서는데, 모처럼 그런 걱정 없이 작품을 시작했어요.

고현정 씨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그런 걱정과 피곤함을 감당하기보다 그냥 내가 할 연기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
배우라는 직업이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요. 이 일은 어떤 상품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 자신, 제 상태가 곧 상품의 상태인 셈이에요. 그리고 할 것만 하고서 빠진다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죠. 연기하는 순간만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인사도 나누고, 소통하고, 오래 대기도 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사회생활처럼 연기와 포개져 있어요. 무 자르듯 경계를 나눌 수가 없어요.

한마디로 정성을 들이시는군요? 사실 ‘내 할 일에만 집중하자’고 되뇌어도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구분되기가 어렵죠.
네, 정성껏 살아야 해요. 물론 정성을 들인다는 것이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확인한 바 없고, 확인된 바 없어요.

아이코닉한 골드 메탈 버클과 부드러운 베이지 컬러가 품격을 더하는 브리앙 MM은 Delvaux 제품.
아이코닉한 골드 메탈 버클과 부드러운 베이지 컬러가 품격을 더하는 브리앙 MM은 Delvaux 제품.

변영주 감독은 당신을 두고 ‘자기 연민이 없는 사람 같더라’고 했어요. 그 말이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팩트 기반으로 짧게 전달해요.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식의 부연 없이. 제가 남의 말 듣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가만히 잘 들어요. 듣기를 잘하다 보니, 내가 나에 관해 말할 때도 어떤 식으로 하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보통 자기 이야기를 할 때는 분출하기가 쉽거든요. 그거 재미없어요. 저는 남한테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자칫하면 타인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일이 돼요.

나에 대해서는 담백하게 꺼내놓고 말지만, 타인과 세상을 대할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고현정 씨를 아는 사람들은 그 점을 ‘측은지심’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스스로 인지하시나요?
그거 나쁜 거 아닌가….

자신에게는 좀 더 너그럽지 못하다는 뜻일 수 있지만, 저에게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에 더 방점이 찍혀 들렸어요. 마침 측은지심은 배우에게 중요한 자질이기도 합니다.
관심과 마음이 있어야 어떤 사람이건 잘 읽어낼 수 있겠죠. 연기할 때는 내 스토리도 있지만 상대역의 스토리도 있잖아요. 그게 대본에 다 나와 있는 건데도 저는 그 대사가 발화될 때 너무나 새롭게 들려요. 배우는 대개 이야기의 끝을 알고 연기하죠. 지금이 아닌 다음의 대사들이 뭔지도 알고요. 하지만 저는 매 테이크를 갈 때마다 그 뒤의 얘기는 잊으려고 노력해요. 이번 테이크를 해보고 잘 안 되면 바로 다른 테이크를 시도해보자는 생각 자체를 안 해요. 인생을 살 때 연습이 없듯이요.

연기하는 그 순간은 인생이 그렇듯 리와인드될 수 없는 지금의 삶이군요. 매 순간 충실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테이크마다 또 다른 모습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그 자리에서, 그 순간에 상대의 말을 듣고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얼마나 새롭게 들리는지. 그래서 상대 배우의 얘길 듣느라 제 차례가 되었다는 걸 까먹는 때도 있어요. 저 가끔 이래요. ‘제 차례예요…?’(웃음)

수영장에서 영감을 받은 푸른 컬러가 시선을 끄는 브리앙 미니는 Delvaux 제품.

<사마귀>의 흥미로운 점 하나는 오래도록 감옥 생활을 하던 정이신과 형사가 된 아들 차수열이 공조 수사를 위해 다시 만난다는 설정에 있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과 처음 대면하는 1화 신에서 정이신의 대사는 다소 센 말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좀 더 확대해서 들여다보거든요. 인생에서 5분 정도의 일이 작품에서는 1시간 동안 표현되기도 하죠. 그렇게 어느 순간을 다 헤집으면서 펼쳐놓을 수도 있고, 반대로 생략할 수도 있고. 그
신의 경우 중요한 목표는 정이신이 차수열을 23년 만에 만났을 때의 느낌에 있어요. 엄마와 아들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봤을 때도 생경함이 들겠죠. 그런데 차수열이 마음껏 삐죽한 말들을 해요. 정이신은 사실 그에게 삐죽할 이유가 없지만, 좀 사이코패스적인 인물이고요. 그럼 정이신이 차수열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했을 때, 적절한 대사였어요. 일부러 입에 붙게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잘 나올 수 있었고요.

세상에는 정형화된 모성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엄마라면 어때야 한다, 어떠할 것이다’같은 명제요. 그 모성애와 맞물린 신파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을까 했는데, 적어도 <사마귀>의 초반에는 그런 기미가 없어서 또 흥미로웠어요. 정이신에게 모성은 뭘까요?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그저 모성에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정형화된 모성이나 미디어에 노출된 모성의 형태를 자기 모성처럼 가져오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직접 겪지 않은 모성이란 저마다 다 다른 것 같아요. 제 경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불행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또 저만의 모성이 있어요. 하지만 연기할 때 저의 모성을 발화점으로 쓴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말씀하신 신파적인 부분에 대해선, 제가 그런 걸 극도로 꺼려요. 엄마와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왜, 타령처럼 흘러가는 거요. 좋게 생각하자면 신파가 ‘뉴웨이브’잖아요. 신파를 해도 좋은데, 그러려면 늘 봐온 게 아니라 새로워야겠죠.

견고한 로데오 카프 가죽 소재로 건축적인 실루엣을 완성한 브리앙 MM은 Delvaux 제품.

신파를 뉴웨이브로 치환하니 굉장히 새롭게 들리네요?
배우가 운다고 해볼게요. 우는 연기가 많죠. 그럼 달라야 하잖아요. 나만의 슬픔이 있어야 하고,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슬픔이 많아야 하고. 표현할 수 있는 행복, 분노, 짜증… 뭘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죠, 배우는. 자기 것은 확실히 있어야 해요. 그래야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이건 다 타인의 감정,이라고 구분이 되고요. 저는 작품에 모성을 건드리는 코드가 있을 때 그렇게 망설여지지 않아요. 오히려 반갑기도 해요. 모성을 많이 표현하고 사는 분도 있지만, 표현되지 못한 자기만의 모성을 가진 분도 있을 것 같거든요. 세상에 여러 모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부모나 자식들에겐 조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공교롭게도 과거 정이신을 검거한 인물(조성하 배우)이 차수열의 유사 아버지 같은 존재로 그 옆에 있어요.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어도 그렇게 기대고 싶거나 지켜주고 싶은 사이가 세상에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요.
맞아요, 그런 감정은 사람이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변영주 감독님도 알면 알수록 지켜주고 싶을 것 같고….

고현정이 누굴 지킨다고요?
저도 뭘 많이 받았으니까. 인지상정 아닐까요? 배우로서도 보답해야겠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도 저의 쓰임새가 있었으면 싶죠. 연기라는 게, 그냥 현재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상태만큼 표현되는 일 같아요. 다르게 말하면 배우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바로 그 배우의 연기예요. 그러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실 때는 캐릭터를 즐기면서, 배우를 한 번쯤 들여다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아닐까 해요. 요즘 저 배우가 어떤 상태일까. 작품에서는 특정 캐릭터로 드러나는 거지만, 결국 배우의 상태가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조형미가 돋보이는 사다리꼴 디자인과 아이보리 컬러의 조합이 우아한 브리앙 MM은 Delvaux 제품.

<사마귀>를 작업하는 동안의 고현정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구사일생이었죠. 제가 아팠잖아요.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었고, ‘일타백피’로 해내고 싶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절실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저는 갈증이 심했어요. 연기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보다 저에 대한 얘기나 심정에 대해서 말할 일이 많았죠. 그게 힘들었어요. 어떤 작품을 했어도 저는 올해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사마귀>여서 더 마음껏 연기할 수 있었고요. 정이신도 참 절실한 인물이라고 저는 느꼈어요. 절실하게 한 연기가, 절실하게 전달되면 좋겠어요.

구사일생으로 만난 작품과 캐릭터. 갈증이 해소되고 채워진 걸 느끼시나요?
채워짐보다 비워냄을 느꼈어요. 확 비워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Ceci n’est pas un Delvaux(이것은 델보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재치 있게 새긴 브리앙 휴머는 Delvaux 제품.

오랜 시간 갈증을 느꼈던 고현정은 그의 진실함을 알아봐주는 감독과 매혹적인 캐릭터를 만나, 자신을 쏟아내고 비워내는 뜨거운 한 철을 보냈습니다. “<사마귀>를 찍을 때, 저는 정말 절실했어요. 구사일생이었죠. ‘정이신’이라는 캐릭터도 참 절실한 인물이라고 느꼈어요. 그런 인물이어서 더 마음껏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장면, 단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그해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더블유> Vol.10은 그들을 위한 빛나는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고현정, 김우빈, 박찬욱과 손예진, 소지섭, 송중기, 임윤아, 주지훈, 한지민. 그 이름을 되새기는 건 지금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도달한 감정의 깊이와 밀도를, 작품의 성취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독자적인 순간이 찬란하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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