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에민, 그녀의 두 번째 인생

권은경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이 암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영국 마게이트 지역 곳곳을 갤러리와 스튜디오, 예술가 레지던시로 개조하는 과감한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외로웠지만, 이전의 삶은 죽었다’고 말하는 이 문제적 인물은 다시 예술의 여정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영국 마게이트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그림과 함께.

영국 켄트 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 마게이트(Margate). 이 마을의 동쪽 끝, 과거 세관 사무소였던 드루아 하우스(Droit House) 외벽에는 ‘그댈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어요(I Never Stopped Loving You)’라고 쓰인 네온사인이 설치되어 있다. 마게이트에 화려한 빛을 더해주는 그 설치물은 2013년 대영제국 훈장을 받은 아티스트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작품이다. 에민은 런던에 거주하던 2010년 그 작품을 완성했다.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을 향한 경의이자 아득한 과거에 바친 헌사. 당시 에민은 1990년대 영국 현대미술을 주도한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일원으로서 화려한 커리어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그 작품이 훨씬 더 사적이고 현재의 삶을 반영하게 될 줄은 에민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녀는 2016년 마게이트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봤고, 2020년에는 방광암 진단을 받으며 끔찍한 투병 과정을 지나왔다. 그리고 61세가 되어 다시 고향을 찾았다. 물론 평범한 주민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에민은 마게이트를 중심으로 한 예술 스튜디오를 조성했다. 그뿐 아니라 지역 비즈니스에 투자하고,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까지 만들어내는 과감한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에민이 고향 동네의 건물을 처음 구입한 때는 2017년이다. 그녀는 오래된 인쇄소 건물을 수영장까지 갖춘 주택으로 개조했다. 이 주택은 대규모 작업실일 뿐 아니라 본인의 작품과 그녀가 수집한 작품을 보관하는 아카이브 시설 역할도 한다. 2021년 에민은 마게이트의 옛 공중목욕탕 건물을 인수해 아티스트들을 위한 공간인 ‘TKE 스튜디오’(에민의 미들네임 ‘ Karima’를 넣어 완성한 이름)를 열었고, ‘TEAR(Tracey Emin Artist Residency)’라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신진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과 학습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옛 술집 건물의 내부를 비우고 새하얗게 칠한 뒤,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한때 마을의 영안실로 쓰이던 곳도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시 태어났다. 에민은 자주 찾는 마을 레스토랑의 운영자에게 그 공간을 맡겼는데, 일명 ‘트레이닝 키친’으로 개조하기 위해서였다. 에민의 작품명을 차용한 그 키친의 이름은 ‘성장을 위한 완벽한 장소(The Perfect Place to Grow)’. 앞으로 이곳은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요리 경력을 쌓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작업대 뒤로 보이는 그림은 ‘There Is an End to Everything’(2024).

지난 5년간 에민은 TEAR 레지던시로 총 17명의 작가를 맞이했다. 2년 전에는 해변에 자리한 약 2만8,000㎡(약 8,400평) 규모의 파빌리온을 매입했고, 지금 그곳은 공공 샤워 시설, 사물함, 카페, 아티스트 스튜디오가 들어선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녀의 청사진이 여기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점이 놀랍다. 클럽 하우스와 라이브 이벤트용 무대도 설치할 예정이고, 향후 거주할 공간 겸 문서와 사진 기록 보관소로 사용할 조지안 타운하우스 세 채의 보수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올해 1월에 오픈한 에민의 두 번째 레지던시, ‘빅토리아 하우스’에는 두 명의 아티스트가 입주한 상태다. “에민은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에요. 지역 사회에 깊이 헌신하고,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죠. 그녀의 에너지가 마게이트를 완전히 바꿔놨어요.” 마게이트의 현대미술관, 터너 컨템퍼러리(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J.M.W. 터너의 이름을 딴)의 관장이 말했다. 런던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다가 에민과 비슷한 시기에 마게이트로 이주한 에민의 오랜 친구, 칼 프리드먼도 이에 동의한다. “트레이시는 단순히 예술가를 돕는 데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한 도시 전체를 돕고 싶어 해요. 이 정도 규모의 사회적 프로젝트에 시간과 자금을 기꺼이 투자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요?”

에민은 ‘보피스(Boffice)’라고 부르는 공간에서 작업하는 걸 즐긴다. 에민이 이름을 붙인 보피스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스케치를 하거나, 일 관련 통화를 하고 회의도 하면서 지내는 그녀의 침실을 뜻한다. 이번 인터뷰와 화보 촬영도 이 보피스에서 진행되었다. 사진가 유르겐 텔러는 에민의 친구이기도 하다. 처음 보피스에 들어서서 모두와 인사를 나눌 때, 에민 옆자리 베개에서는 에민의 반려묘 ‘티컵’과 ‘팬케이크’가 쉬고 있었다. “보통 정오까지는 그냥 침대에 계속 있어요. 푹 쉬어야 해요. 안 그러면 다시 병이 나거든요.” 에민이 장거리 비행 중에 얻은 파자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청년 시절 에민은 켄트에 있는 메이드스톤 예술대학과 런던의 왕립예술대학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갔지만,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초기 시절은 한동안 노숙 생활을 할 정도로 매우 고단했다. 에민의 직설적이고 자전적인 작업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 이후다. 대표작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도 그 시기에 발표한 것이다. 파란색 텐트 안에 에민과 함께 ‘침대를 쓴’ 102명의 이름을 새긴 작품. 그 안에는 연인뿐 아니라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1998년 작 ‘나의 침대’는 트레이시 에민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확실히 각인시킨 작품이다. 정리되지 않고 흐트러진 상태인 자신의 침대를 그대로 전시한 설치작으로, 침대 주변에는 사용한 콘돔, 보드카 병, 더러워진 속옷, 담배꽁초 등이 흩어져 있다(2014년 경매에서 약 46억원에 낙찰되었다). 에민은 1999년 터너상 후보에 올랐다. 런던 테이트 모던, 뉴욕 MoMA와 구겐하임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파리의 퐁피두 센터 등이 에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아직 완성 전인 그림.

1978년, 열다섯 살이 된 그해부터 에민은 집을 떠나고 싶어했다. 에민의 부모님은 마게이트에서 호텔을 운영했는데 사업이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에민이 고향집을 떠난지 40년이 넘은 후, 어머니가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그즈음부터 에민은 고향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었다. “새벽 4시에 전화를 받았어요. 지금 바로 와야 할 것 같다고, 그래야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차를 타고 달려서 아침 6시에 도착했는데, 해변 위로 거대한 무지개가 떠 있었어요. 마치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같았죠.” 그녀는 이런 말이 진부하게 들릴까 봐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엄마가 정말로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나는 절대로 마게이트와 헤어질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에민의 어머니는 그로부터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에민과 큐레이터 칼 프리드먼은 각각 6억원씩 공동 투자해 폐건물 여러 채를 매입했다. “석면투성이에 비둘기 똥으로 뒤덮인 건물들이었죠. 보수 공사에만 4년이 걸렸어요. 원래는 런던에 살면서 주말이 낀 연휴마다 이곳에 내려올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 계획은 2020년 에민이 암 진단을 받으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섹스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10년 동안 스스로 금욕 생활을 선택하고서 몸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산부인과에 갔다가 놀랄 만한 소식을 들은 것이다. 한창 팬데믹이 번지던 시기라 에민과 의사 모두 마스크를 쓴 상태였지만, 에민은 의사의 눈빛만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알아챌 수 있었다. 정밀 검사 결과 방광에서 진행성 편평세포암이 발견되었고, 한 전문의는 에민에게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6개월 정도라고 말했다. 4주 후, 그녀는 7시간 반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방광, 자궁, 요도, 대장의 일부, 몇 개의 림프절, 질의 절반을 잃었다. “마취실로 내려가기 직전에 의사가 물었죠. 수술 들어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그래서, 제발 가능하다면 클리토리스는 꼭 살려 달라고 했어요. 수술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 의사가 다가와 그러더군요. ’곧 다시 잠들게 될 거예요. 그전에 한 가지 알려드리자면, 클리토리스는 남아 있답니다’라고요.” 중요한 기관을 지킨 덕분에 에민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일부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은 평생 요루주머니를 착용해야 하며, 복부 오른쪽에 인공으로 만든 배뇨 구멍을 통해 소변을 봐야 한다.

체력은 예전만 못하지만, 마게이트에서 그녀의 창의력은 오히려 더 꽃을 피우고 있다. “전 정말 열심히 일해요. 쉬지 않고 일하죠.” 에민의 스튜디오는 인체 드로잉이 담긴 거대한 캔버스로 가득하다. 이 그림들은 개인적이고 내밀하며, 피를 연상시키는 색조로 채워져 있다. “예전에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니, 하고 싶다고조차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지금하고 있어요.” 올해 3월, 에민은 두 개의 중요한 전시를 선보였다. 플로렌스에 있는 팔라초 스트로치 재단에서 공개한 <섹스와 고독(Sex and Solitude)>은 이탈리아에서 열린 그녀의 첫 대규모 기관 전시였다. 또 미국 뉴헤이븐의 예일 브리티시 아트 센터에서 열린 <아침까지 당신을 사랑했어 요(I Loved You Until The Morning)>는 미국 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다. 내년 초에는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개인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날 땐, 지금의 제가 장기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기억하려고 해요. 제가 겪은 정도의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사람은 단 30%라고 하더군요.” 에민은 현재 암 완치 판정을 받았으며, 담당 의사는 그녀를 ‘기적의 여성’이라고 부른다.

작업 중인 그림 앞에서, 트레이시 에민과 그의 고양이 ‘티컵’.

인터뷰를 위해 마게이트를 방문하기 일주일 전, 그녀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열린 캔터베리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교의 학위 수여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 전, 에민은 학장과 마주 앉아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두 번째 삶을 선물 받은 걸까요? 아니면 이미 예전에 한 번 죽었고, 지금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중인 걸까요?” 수여식에서 에민은 학생들에게 인류 역사 속 예술이 지닌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던 시절, 동굴 속 사람들은 서로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지 않았습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예술은 우리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고귀하고 평화로운 본성에 가깝죠.”

한때 비평가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가 예술의 감성적이고 평화로운 특성을 강조한다면, 누군가는 의외라고 생각할 것 같다. 이 말에 에민이 즉시 되물었다. “제가 누구한테 혼란을 일으켰다는 거죠? 누구를 불편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말해봐요.” 그 ‘누구’란 예술계, 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평범한 ‘시스템’이 아닐까? 그녀의 초기 작업은 당시 사람들이 입 밖에 꺼내지 않거나 못한 주제들, 가령 성폭력, 강간, 낙태 등을 과감히 드러내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이 점을 언급하자, 에민이 비웃듯 대답했다. “전 지금도 그런 얘기들을 해요. 그래서요? 그 ‘시스템’이 절 따라잡은 건가요? 지금은 수많은 여성 예술가가 낙태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들이 30년 전에 그런 이야기를 꺼냈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에민의 아카이브는 팬레터로 가득하다. “예전에는 감옥에 있는 여성이나, 낙태를 경험한 싱글맘,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주로 제 작품이 큰 힘이 됐다고 감사를 전하는 내용이나, 예전엔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 작품을 계기로 예술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을 전해주었죠.”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이런 메시지를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저는 예술계 안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예술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예술계 안의 특정 계층은 절 좋아하지 않았죠. 그들은 제가 말하는 방식과 태도를 싫어했어요. 제가 욕하는 방식은 더더욱 마뜩잖아했죠. 싫으면 꺼지라는 듯한 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예요.” 에민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날 좋아했죠. 제가 그들의 언어로 말한다는 걸 알았거든요.”

침실과 사무실이 결합된 이른바 ‘보피스’. 에민은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사후의 삶을 계획하는 기분은 어떨까? “마치 위대한 이집트인이 된 것 같아요.” 에민이 농담하듯 말했다. 마게이트는 그녀에게 일종의 피라미드인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생각을 70대, 80대가 되어서야 하잖아요. 그런데 전 정말로 죽을 뻔했어요. 자식도 없고, 결혼도 안 했고, 돌봐야 할 대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마게이트의 부동산을 사들이기 위해 그녀는 처음에는 개인 자금을 사용했고, 이후 ‘트레이시 에민 재단’을 설립했다. 2022년에는 이 재단의 기금을 마련하고자 회화 ‘피투성이 구름처럼(Like a Cloud of Blood)’을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았다. 이 작품은 그녀가 병을 앓은 이후 제작한 그림 중 하나로, 경매에서 약 42억원에 낙찰되었다.

해리 웰러(Harry Weller)는 에민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는 16년 전에 2주짜리 인턴십을 신청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에민의 곁을 지키고 있다. 현재 웰러의 직함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지만, 본인은 ‘에민의 오른팔’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에민이 마게이트로 이주하기 전에는 스튜디오 직원이 16명이었지만, 지금은 웰러 혼자다. 그는 트레이시 에민의 전시를 큐레이팅하고 아카이브를 관리하며 언론 및 자선 관련 요청을 조율하고, 이미지 저작권과 가격 정책을 포함하는 등 그녀의 커리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맡고 있다. “상상하시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에민이 그림 그릴 때 유일하게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저예요. 그녀를 밀어붙이기도 하고, 승부욕을 자극하기도 하죠.” 에민은 자신이 건강과 재단, 차세대 예술가들을 돌보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전반을 웰러에게 맡기고 있다. 엘리사 크레이(Elissa Cray)는 TKE 스튜디오, 트레이시 에민 레지던시(TEAR), 빅토리아 하우스 레지던시의 디렉터다. 크레이는 에민과 함께 수백 건의 TEAR 지원서를 검토한다. 지원자는 우간다, 헝가리,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러시아,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다. 웰러는 에민을 지켜보며 늘 영감을 받는다고 말했다. “에민이 이곳을 떠난 뒤에도 이 프로그램은 자립적으로 운영되며 예술가들을 계속 지원할 거예요. 개인 스튜디오는 그녀의 작품을 교체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뀔 겁니다. 그녀의 집은 그대로 보존해 방문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유지될 거고요. 이 모든 것은 트레이시 에민의 유산을 기리는 동시에 마게이트 지역에 기여하고, 더 많은 예술가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암을 이겨내고 고향으로 이주하면서 에민의 삶에는 새로운 경계선이 생겨났다. “예전에는 외로웠어요. 런던 이스트엔드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나무도 자연도 없었죠. 외롭게 스튜디오까지 걸어가곤 했어요.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환경도 아니었고, 곁에 가까운 친구도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제가 평생 알아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무척 친숙하고, 절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죠. 전 마게이트의 건축과 바다를 사랑하고,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멋진 순간들을 깊이 체감해요. 가장 오래된 친구인 칼 프리드먼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데다, 공교롭게도 그는 갤러리 운영자이고요.” 그리고 에민에게는 그녀의 많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들도 있다. 그녀는 현재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과 함께 작업도 하고, 그들의 전시를 큐레이팅하면서 보낸다. “저는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어요. 이전의 삶은 죽었죠.” 그녀가 ‘보피스’에서 머그잔을 들고 말한다. “주변을 보세요. 저는 지금 천국에 있어요.”

포토그래퍼
JUERGEN TELLER
크리에이티브 파트너
DOVILE DRIZYTE
프리랜스 에디터
DEREK C. BLASBERG
포토 어시스턴트
FELIPE CHAVES
포스트프로덕션
LOUWRE ERASMUS AT QUICKF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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