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에 다채로운 감정과 상상력을 불어넣는 지휘자이자 공감각의 예술가. 이보다 이 사람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르 라보의 향을 지휘하는 글로벌 브랜드 프레지던트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데보라 로이어와 북촌에서 대화를 나눴다.

향에 이끌려 오래된 한옥에 들어섰다. 곧 주변 자연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되고 오감이 깨어난다. 르 라보가 북촌 한옥마을에 한국에 첫 플래그십을 오픈했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공간은 정교한 나무 마루와 닥나무 종이, 수작업으로 마감한 삼베 소재 등 자연 친화적인 요소로 채워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미감을 구현했다. 두 채의 한옥을 연결해 하나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플래그십에서의 여정은 르 라보의 조향 철학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원료 중심의 감각적 체험 공간인 ‘프래그런스 오르간 룸(Fragrance Organ Room)’에서 시작된다. 향수를 조합하는 장인의 손길이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전 세계 네 번째로 선보이는 르 라보 카페에서도 르 라보만의 고요한 박자가 이어진다. 르 라보의 아이덴티티이자 철학인 ‘슬로우 퍼퓨머리(Slow Perfumery)’와 ‘와비사비(wabi-sabi)’가 북촌 한옥마을에서 한국 전통의 미학과 깊이 교감한다. 이곳에서 르 라보 글로벌 브랜드 프레지던트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데보라 로이어(Deborah Royer)’와 나눈 대화는 향으로 시작해 향으로 귀결되었다.

북촌에 한국의 첫 번째 플래그십을 오픈했습니다. 르 라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기분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Deborah Royer 한국에 르 라보 플래그십을 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슬로우 퍼퓨머리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장인 정신을 북촌에 옮긴다는 것은, 북촌이라는 특별한 장소가 지닌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것을 이어가는 뜻 깊은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북촌에 르 라보 부티크 오픈을 준비하는 과정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품은 독보적인 정서를 비롯해 건축과 자연의 상호 관계에 깊이 몰입하고 탐구한 특별한 여정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작업이 이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르 라보 부티크는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닌 그 이상의 장소로 느껴집니다. 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장소가 되길 바라나요?
Deborah Royer ‘실험실’을 의미하는 브랜드명처럼 르 라보의 부티크 속 랩은 ‘슬로우 퍼퓨머리’를 구현한 공간입니다.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바로 신선하게 블렌딩하고 맞춤형 라벨링까지 진행하죠. 향료가 지닌 매력을 보다 선명하게 담아내는 것은 물론,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지극히 내밀한 개인적 경험을 선물합니다. 많은 이들이 르 라보 부티크에서 평소 지나칠 수 있는 감각을 발견하고 그 감각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길 바랍니다.
공간과 향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궁금합니다.
Deborah Royer 향에는 공간이 담아낼 수 있는 감정의 폭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향은 순간을 각인하고 고정된 인식을 전환하죠. 향은 감정을 공간까지 스며들게 합니다. 낯선 공간에서 익숙한 향을 맡는 순간 공간과의 연결감은 더 커집니다. 반대로 친숙한 공간에서 새로운 향을 접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해요. 이는 후각이 다른 감각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죠. 르 라보가 공간을 선택할 때 공간과 향의 상호작용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입니다.
르 라보 부티크를 북촌이라는 지역과 한옥이라는 공간에 문을 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Deborah Royer 르 라보는 기억을 품은 장소에 끌립니다. 수 세기에 걸쳐 보존된 한옥에 담긴 세심한 손길이 르 라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존의 것을 존중하면서도 다가올 미래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습니다. 북촌 한옥이 바로 그런 공간이었죠. 북촌은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중심에서 사색적인 고요함을 간직한 듯 했습니다. 주변의 자연과 긴밀하게 연결된 느낌도 있고요. 우리는 한옥 고유의 전통적인 구조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한옥 자체가 이미 우리가 꿈꾸던 분위기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촌 플래그십은 두 채의 한옥이 연결된 구조입니다. 그 중심에 프래그런스 오르간 룸을 두어 한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 주변 자연 경관과의 어울림, 르 라보의 장인 정신이 조화롭게 대화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르 라보의 와비사비 철학은 브랜드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죠. 이것이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나요?
Deborah Royer 와비사비는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의 문화적 미의식 중 하나이자 르 라보가 향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가치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절제된 디테일,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여백 속에 존재합니다. 한옥은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정함과 모든 것이 완벽히 대칭을 이루지 않는 고아한 멋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죠. 북촌 플래그십 오픈을 준비할 때 한옥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 한지 위에 옻칠한 벽지나 거친 나무와 같은 한국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들보,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기와, 천장에 남겨진 배선 자국 등도 그대로 살렸습니다.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북촌 플래그십에 구현한 와비사비입니다.
르 라보의 가치관과 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Deborah Royer 프랑스 시골에서 자란 저는 오감으로 세상을 느끼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키웠고, 세상에 전하고 싶은 것들의 토대가 되었죠. 저에게 아름다움은 거창하거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섬세하고 고요하며 겸손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지금 르 라보가 전달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하죠. 또한 진정성, 장인 정신, 과정을 존중하는 태도 등 르 라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은 제 삶의 철학이자 일상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르 라보’하면 향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Deborah Royer 르 라보의 향수 이름은 원료명과 숫자로만 구성됩니다. 첫 번째 단어는 향의 중심이 되는 향료를, 숫자는 그 향수에 포함된 전체 구성 요소의 수를 의미하죠. 이런 단순함은 한발 물러서기 위해 의도한 것입니다. 특정 서사를 미리 부여하지 않고, 향에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도록 여지를 주기 위해서죠. 서울에서 영감을 받은 시티 익스클루시브 향수 ‘시트롱 28’은 서울을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28가지 성분을 사용했습니다. 고전적인 시트러스 향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 익숙한 시더와 머스크 향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레몬과 생강, 재스민 향취를 더하는 반전을 꾀했습니다. 시트롱 28은 곧 전통성과 개방성, 절제와 속도를 동시에 지닌 서울의 균형감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향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Deborah Royer 영감은 거의 완성된 형태로 떠오르기도 하고, 수년에 걸쳐 천천히 펼쳐지기도 합니다. 특정한 시간에 방 안을 가로지르는 빛의 일렁임, 낯선 도시를 방문했을 때의 생경함, 어린 시절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형태가 없는 강한 감정일 때도 있어요. 저에게 조향은 단순히 창작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를 듣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마음에 떠오르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수락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창작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북촌 플래그십이 사람들에게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나요?
Deborah Royer 이번 작업에서 가장 크게 깨달음을 얻은 순간은 한옥의 중정이 플래그십에서 갖게 될 중요한 역할을 이해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중정을 그대로 살리고 한옥의 문이 그 풍경을 자연스럽게 액자처럼 감싸도록 설계했습니다. 보존된 나무들과 시간에 따라 바뀌는 햇빛이 어우러지며 시시각각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죠.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중정은 과거와 현재, 움직임과 고요함 사이를 잇는 감각의 문턱이 되어주었습니다. 한옥은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으로 깊은 영혼을 지닌 공간이더군요. 공간의 모든 요소가 저마다 고유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북촌 플래그십이 앞으로도 이러한 고요한 에너지와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무르며 사색에 빠지세요. 삶의 본질과 마주할 때 코 깊숙이 들어오는 르 라보의 향을 기억해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