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가 베네타가 다시 ‘엮임’이라는 말을 꺼냈다. 인트레치아토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 공예와 현대 조형이 마주 앉은 전시를 통해. 단순한 협업을 넘어선 감각의 대화다.
보테가 베네타가 서울 아름지기 문화재단에서 탄생 50주년을 맞이한 ‘인트레치아토(Intrecciato)’를 기념하는 특별한 전시 <세계를 엮다 : 인트레치아토의 언어>를 개최한다. 1975년 처음 선보인 인트레치아토는 보테가 베네타의 장인 정신과 창의성을 상징하는 수공예 기법으로, 로고 없는 철학을 지켜온 보테가 베네타가 수공예만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를 시적이고 감각적인 시선으로 확장한 이번 전시는 전 세계 단 한 점씩만 존재하는 다섯 가지 디자인의 보테가 베네타 크리에이션과 동시대 한국 아티스트 9인이 ‘엮임’의 조형 언어와 그 철학적 깊이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시간을 직조하는 손의 언어
이광호
산업적 재료와 수공예적 방식이 만나는 지점을 집요하게 탐구해온 이광호 작가는 다양한 로프와 와이어, 금속과 PVC를 엮어낸 <Obsession> Series를 통해 재료의 속성을 넘어, 연결 그 자체가 조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서로 다른 재료를 엮어 조각적인 형태로 풀어내는데, 실용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는 점에서 인트레치아토와 미학적 감각과 닿아 있다. 기존 시리즈 외에도 이번 전시를 위한 외부 파사드를 위한 맞춤형 대형 설치 작품과 관람객이 직접 가죽 스트립을 엮어 완성하는 체험형 작품을 선보인다.
전통이 짜낸 시간의 가치
온지음 집공방
온지음 집공방은 대나무 발 분야의 국가무형문화재 조대용 장인을 중심으로, 매듭 공예 전수자 박진영, 금속 공예 장인 박병용이 협업한 취렴(翠簾)을 선보인다. 실과 재료를 교차해 하나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조대용 장인의 작업은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치아토와도 미학적 유사성을 지닌다 ‘보테가(Bottega)’가 공방을 의미하듯, 온지음 집공방은 공방의 정신을 작품에 담았다. 온지음 집공방이 장인과 함께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얇게 저민 대나무와 다채로운 색실, 금속 구조물이 정교하게 엮여 있다. 전통과 모던함이 공존하는 감각적 공간 오브제로서 공간에 섬세한 결을 구현한다.

공간의 악보를 직조하다
강서경
강서경 작가는 전통 기보법의 격자 구조에서 출발해, 개인과 사회 구조 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조형물은 단순한 형태를 넘어, 조각과 영상, 퍼포먼스를 오가며 공간 자체를 안무화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둥근 유랑(Rove and Round), 따뜻한 무게(Warm Round), 자리(Mat) 등의 작품에서 직조는 하나의 상징이다. 인트레치아토가 단순한 가죽 공예 기술을 넘어, 한 사람의 삶과 사회적 존재를 엮는 감각적인 메타포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보테가 베네타의 유일무이한 아이덴티티
브릭 아 브락
브랜드 아틀리에에서 탄생한 크리에이션, 브릭 아 브락(Bric à Brac) 시리즈도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제품 제작 후 남은 무수한 가죽 조각을 엮어 완성한 것. 보테가 베네타만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크리에이션으로 브랜드 철학의 구현물이다.
빛과 기억의 스크린
이규홍
유리 작업에 천착해온 이규홍 작가는 시간과 기억의 퇴적을 투명한 매질 위에 재현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접이식 유리 스크린은 빛과 반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트레치아토의 유기적 흐름을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240210은 하나의 장면이자 시공간의 궤적이며, 각각의 선과 굴절은 유동적 기억의 단면으로 작동한다. 이규홍의 작업은 말하지 않고 전달되는 감각의 언어로, 전시의 메시지를 조용히 확장시킨다.
직조를 통해 회복되는 기억의 언어
홍영인
동등성이라는 화두를 예술을 통해 끌어내는 홍영인 작가는 바느질과 직조 같은 수공예 방식을 통해 여성의 몸, 기억, 노동을 엮는 작업을 선보인다. 이는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치아토처럼 손을 통한 엮임이 단순한 장식이 아닌 구조와 시간, 감각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Woven and Echoed는 1960~80년대 섬유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그들의 기억을 시각적 언어로 엮은 대형 태피스트리 작업이다. 공업용 니들 펀치 기계를 활용한 직조 기법은 잊힌 서사를 물리적 섬유 구조로 되살린다.
손으로 짓고 유약으로 묶다
이헌정
작가 이헌정은 15세기 조선 청자의 유약 기법을 기반으로 전통 공예 기법과 현대적 감각을 융합해 완성한 독특한 직조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Island와 Untitled, Box series는 도자와 콘크리트를 결합한 아트 퍼니처 작업으로 인트레치아토가 가진 정교한 엮임과 균형미를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하는 동시에 수공예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작가만의 독창적 세계를 보여준다.

지층처럼 쌓은 엮임의 기록
박종진
세라믹 아티스트 박종진은 점토 슬립을 바른 종이를 층층이 쌓아 만든 구조물을 통해 적층과 기억을 시각화한다. 시간의 퇴적물처럼 겹겹이 쌓인 세라믹 조각은 하나의 조형적 언어로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치아토 짜임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Artistic Stratum 시리즈를 통해 교차되고 반복된 층위를 통해 인트레치아토의 구조적 감각을 재해석하고 ‘엮임’과 ‘적층’이라는 개념을 물리적이면서도 은유적으로 탐구한다. 재료를 직조하듯 쌓아 올리고, 굽고, 조각하는 과정은 하나의 물질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 감각의 차원을 횡단할 수 있는지 묻는다.

나무를 통해 사유하는 공간과 비움
정명택
목공예와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정명택 작가는 전통 한국 건축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공간성에서 영감을 얻는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Creating a Void> Series는 공간 속 의도된 부재를 중심으로 단순한 구조 안에 존재하는 질서와 긴장감을 담고 있다. 비움과 형태, 공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엮임’을 구현하며, 전통적 수공예의 미학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다. 이는 실과 가죽을 정교하게 엮어 구조를 만들어내는 인트레치아토와 개념적으로 맞닿아 있다.
섬유의 숨결로 쌓은 우주
박성림
섬유 예술가 박성림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종이와 면과 같은 섬유 소재에 명상적인 감성을 담아낸다. 작업 중심에 있는 매듭은 보테가 베네타의 디자인 언어의 핵심적인 모티프이기도 하다. 매듭이라는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는 공간을 구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는 인트레치아토가 구현하는 구조적 질서와 연결의 미학과 깊은 접점을 이루며, 섬유라는 물성을 통해 보테가 베네타의 디자인 철학을 시적으로 재해석한다. 출품작인 My Universe 040323은 섬유를 통한 ‘엮임’이 내면의 우주로 확장되는 과정을 조용히 들려준다.

이번 전시장에서는 포토그래퍼 잭 데이비슨(Jack Davison)과 협업한 보테가 베네타의 글로벌 캠페인 ‘Craft is our Language’도 소개된다. ‘손’이라는 창작의 도구를 중심에 두고, 인트레치아토가 인간의 창조성과 연결의 본질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전시 <세계를 엮다: 인트레치아토의 언어>는 6월 21일부터 22일까지, 종로구 아름지기 문화재단에서 무료로 공개된다. 카카오톡에서 사전 예약 가능하며, 현장 접수 시 상황에 따라 대기 시간이 발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