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올 팍이 사랑 노래를 낸다. 물론, 그에게서 설탕 냄새 폴폴 풍기는 러브 송을 기대하는 이는 없다.
첫 정규 앨범 <A Bloodsucker>는 그 이름처럼 기묘하고, 어딘가 축축하며, 다소 광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는다. 어쩌면 이건, 사랑의 탈을 쓴 자기 고백일지도 모른다.

<W Korea> 첫 정규 앨범 <A Bloodsucker>가 일주일 후면 세상에 공개돼요. 지금 순도 높은 후련함을 만끽 중인가요?
지올 팍 오, 전혀요. 오히려 긴장 상태예요. 발매가 코앞인데 아직 자잘한 작업이 많이 남았거든요.
지올 팍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이번 앨범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죠?
맞아요. 데뷔 후 처음으로 수록곡 전체를 사랑 주제로 썼어요. 마치 타인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처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 진정한 사랑을 겪으며 변화하는 서사를 담았어요.
여태 어렴풋이라도 ‘러브 송’이라 부를 만한 곡을 발표한 적이 없죠?
네. 가요에서 사랑은 가장 흔한 주제인데, 저에겐 가장 낯선 주제이기도 했거든요. 그래도 언젠간 사랑 앨범을 내보자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제가 ‘진짜 사랑’을 경험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웃음).
우선 그 사랑이 결코 평범하진 않았을 거라 짐작해요. ‘광기 어린 사랑’. 미리 데모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이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내가 더 큰 상처를 얻고, 차이고, 이별의 아픔에 허덕이고. 이런 감정을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 겪어봤어요. 늦은 나이죠. 저는 소위 대문자 T형의 사람이거든요. 주변에서 ‘넌 감정이 없니?’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차갑고, 목적지향주의에 성과주의에, 남에게 상처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어요. 연애 때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고요. 한마디로 이기적인 사람이죠. 그런데 진짜 사랑에 빠지니 많은 것이 달라지더라고요.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 오히려 내가 아프다는 것도 처음 느꼈어요. 그래서 이것에 관한 얘기를 써보자는 게 이번 앨범의 시작이었어요.
이를테면 사랑의 반성문 같은 앨범인 셈이네요?
과거엔 남에게 상처 주는 걸 굉장히 쉽게 생각했거든요. 이걸 스스로 자각하지만 그런 나 자신에 취해 살던 시절도 있고요. 그러다 이별을 겪으며 참 한심하고 교만했구나 자각하게 됐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죽도록 힘들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 느껴봤어요. 실제 공황장애도 왔고요. 그리움에 폭주하다 방에 떨어진 옛 연인의 머리카락을 주워 냄새를 맡는 짓도 했고요.
그 일화가 타이틀곡 ‘Twisted Fantasy’ 가사에도 등장하죠? 당연히 허구를 바탕으로 썼을 거라 생각했어요.
다들 그런 줄 알더라고요. 가사를 쓰면서 주변에 물어봤거든요. 너희는 이별했을 때 자살 시도를 해서 상대를 불러낼 생각을 해봤냐, 머리카락을 주워 냄새 맡아본 적이 있냐. 저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별 가사를 써보자는 의도였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그런 것에 공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였어요(웃음).

솔직히 좀 ‘크리피’합니다(웃음).
그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지올 팍이라면 사랑 노래를 이렇게 쓰겠다’ 생각할 만한 걸 쓰고 싶었어요. 또 이번 앨범에선 록 사운드가 두드러지잖아요. 아주 과감하게 기타 사운드를 써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옛날 브리티시 록을 많이 참고했고, 뱀파이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곡을 썼어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기괴하고 고딕적인 분위기로 앨범이 완성됐어요.
과거 연애 상대에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은 뭐였어요?
‘넌 내 얘기를 안 듣는 것 같아.’ 하지만 이제는 굉장히 잘 듣습니다(웃음). 정말 180도 달라졌어요. 상대가 날 믿어준 만큼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어요. 최근 연애에선 애인이 마치 딸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일하는 이유도 상대 때문이에요. 내가 경제적으로 무너지지 않아야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으니까요. 제가 고집이 무척 센데 상대에겐 무조건 ‘오케이’ 하고요. 뭘 하든 딸 같고 귀여우니까요. ‘나보다 널 더 아껴’라는 마음을 처음 알게 됐어요. 그렇게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이러다 곧 ‘밤양갱’ 같은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를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웃음).
‘명반 같은 앨범을 준비 중이다.’ 작년 여러 인터뷰에서 이처럼 말한 적 있죠. 처음 그렸던 그림과 지금의 결과물, 얼마나 닮아 있나요?
만족도가 그렇게 높진 않아요. 사실 초기 생각한 그림과 완전히 다르게 완성됐어요. 원래는 더 ‘빡셌’어요. 아직 제가 용기가 부족한가 봐요. 더 갈 수 있는, 더 막할 수 있는 용기가. ‘나는 더 깨져야 한다.’ 이번 앨범을 완성하고 되새겼어요.
대중은 보통 지올 팍에게서 ‘파격’을 기대하지 않나요? 얼터너티브 장르, 풍자적인 영어 가사, 기괴한 동화 같은 뮤직비디오. 이 모든 건 K팝 시장에서 살짝 비켜난 엇박 같았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지올 팍의 음악이 사람들을 끌어당겼잖아요. 그래서인지 “용기가 부족하다”는 말이 의외로 다가오네요.
2023년 발매한 ‘Christian’이 예상치 못하게 큰 히트를 쳤어요. 가사와 MV를 분석하는 수많은 영상, 밈이 한동안 SNS를 점령하다시피 했죠. 그때 어떤 ‘맛’을 본 것 같아요. 많은 선배들이 ‘원 히트 원더’에 대해 품는 고민이 엇비슷해요. 이전까진 큰 생각 없이 곡을 만들었는데 한번 맛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신경 쓰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아무도 안 들으려나? 싫어하려나?’ 이런 생각을 본능적으로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이번 앨범은 이것들에서 좀 벗어나고자 했던 결과물인 것 같아요. ‘Christian’이 ‘1’이고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10’이라면, 이번 앨범은 그 중간쯤에 있는 앨범인 셈이죠.

‘Christian’이 지올 팍에게 남긴 건 뭘까요?
국내엔 얼터너티브 장르 시장이 없잖아요. 게다가 영어 가사에, 기괴한 뮤직비디오에, 제 음악은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장르라 느껴요. 그런 신이 없으니까 공략법이 있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혼자 이것저것 깨부수는 연습을 하던 과정에서 나온 게 ‘Christian’이었는데, 이게 소위 빵 떴어요. 뭔가를 노리고 낸 음악이 전혀 아니었는데도요. 기독교인으로서 느끼는 자기 반성을 가사로 썼는데, 그로 인해 ‘종교를 비판하는 곡이다’부터 시작해서 ‘얘는 천재다’, ‘아니다, 천재 호소인이다’ 등등 별의별 말이 쏟아졌어요. 처음엔 당황스럽다가 나중엔 해탈하게 된 것 같아요. 그와 동시에 내 음악으로 또 이런 기회는 오기 쉽지 않겠다, 그냥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이것도 진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창업을 했어요. 어쨌든 ‘Christian’은 엄청난 돈을 남겼으니까요. 저에게 ‘Christian’은 지금 제가 대표로 있는 회사 ‘신드롬즈’를 남긴 곡이죠.
‘미래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다.’ 신드롬즈의 홈페이지에 적힌 말이에요. 정확히 이 회사의 정체는 뭔가요?
애니메이션 브랜드인데 좀 복잡해요. 일단은 ‘애니메이션 숏폼 크리에이터’라고 해둘게요. ‘버키’라는 버추얼 캐릭터를 중심으로 음악을 발매하고 추후 시리즈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에요. 엔터테인먼트 대장주들의 시가 총액을 분석했을 때,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게 바로 애니메이션 산업이었어요. AI가 발달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었고, 게다가 버추얼 캐릭터 IP의 확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죠. 국내에선 버추얼 산업이라 했을 때 가상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 정도가 떠오르지만, 해외 버추얼 시장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요. ‘과연 10년 뒤에 실사 가수가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요. 가면 뒤에 숨는 방식이 얼마나 가성비 높은 방식인지 가수들은 아직 잘 모르는 듯해요.
사실 많은 뮤지션들이 인공지능 활용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추세잖아요. 작년 빌리 아일리시, 니키 미나즈 등의 팝스타들은 인공지능이 예술가의 권리는 침해한다며 AI 사용 중단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AI가 특정 뮤지션을 모방한다 한들 사람들은 결국 그 결과물을 패러디로 받아들여요. 뮤지션 고유의 IP가 이미 굳게 존재하니까요. 물론 AI 기술을 활용해 특정 뮤지션의 신곡을 불법적으로 발매하는 건 문제죠. 그러니까 저는 지금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 단순하진 않나, 우리가 기술을 위협적인 무언가로만 치부하고 있진 않나 고민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기업들의 시가 총액을 분석하고, 테크 기반의 스타트업을 차리는 뮤지션이 몇이나 될까요? 노래 ‘Christian’엔 이런 의미의 가사가 등장하죠. ‘돈이 생기면 좀 살 것 같더라. 근데 넌 그게 지옥행 티켓이라며, 왜? 그게 나빠?’ 지올 팍이 음악을 하고,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는 이와 연관이 있을까요?
글쎄요. 우선 저희 집안이 가난했고 첫 믹스테이프를 낼 당시엔 진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갈증은 있었죠. 그런데 그보다, 시간이 흐르며 앨범을 낼 때마다 버는 돈의 액수가 엄청 크게 뛰었어요. 그에 따라 주변 환경이, 마음가짐이 달라졌고요. 그러면서 ‘이보다 더 위엔 뭐가 있을까?’가 궁금해진 것 같아요. 단순히 ‘돈만 벌면 장땡이다’의 마음이 아니라 그 위엔, 더 위엔 어떤 환경이 있을지 궁금했고, 그 모든 걸 겪고 난 뒤 마지막에 판단해보고 싶었어요. 행복의 가치는 어느 단계에서 가장 크게 존재했나, 스스로 겪은 걸 기반으로 얘기해보고 싶은 거죠. 흔히 돈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저는 저 위에 있는 사람들도 진짜 그렇게 생각할까 궁금했어요. 사람들이 적당히 벌어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닌지, 초월해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궁금했거든요.
뮤지션과 사업가, 창작과 비즈니스, 이 두 축이 서로를 방해한 적은 없나요?
저는 그 둘이 용어 차이일 뿐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창작은 직감을, 사업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행위잖아요. 그런데 직감과 데이터는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예요. 히트곡을 여럿 발표한 뮤지션이 작곡할 때 느끼는 어떤 강렬한 직감은 결국 경험에 따른 데이터라 할 수 있고,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사업가는 직감이 계속해 발달할 수밖에 없어요. 제 경우만 해도 뮤지션 지올 팍과 회사 대표 박지원이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사업에서 배운 걸 음악에 쓰려 하고, 음악에서 배운 걸 사업에 쓰다 보니 결국엔 그 둘이 비슷해졌어요.
지올 팍이 하는 일에서 창의성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창의성은 기억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 내가 뭘 봤고 어떤 환경에 있었는지, 그 20~30년간의 인풋들의 조합이 아웃풋으로 나와요. 그래서 경험이 많을수록 창의성이 올라간다고 봐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기억인 셈이죠.
그럼 지금의 지올 팍을 만든 가장 강렬한 기억은 뭔가요?
저는 어렸을 때 위인전만 읽었어요. 지금 돌이키면 그게 저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크면 클수록 ‘어떻게 하면 위대해질 수 있을까’만 생각하게 돼요. 저에게 위인전은 마치 참고서 같았어요. 누군가 미리 살아본 삶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았더라고요. 삶의 과정에서 꼭 시련이 있었고요. 그래서 그 아픔마저 똑같이 겪고 싶어 한 시절도 있었어요.

지올 팍이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은 어떤 모습이에요?
한땐 위대한 뮤지션을 꿈꿨는데요. 마치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처럼요.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큰 걸 남기고 싶어요. 이제 록스타보다는 현대의 월트 디즈니 같은 사람이 되자는 포부를 품어요. 개인으로서의 성취보다 집단의 꿈을 대변하고 잘 이끌어 다음 세상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디즈니같은 사람을 꿈꿔요. 그렇다고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을 거예요. 사업 덕분에 음악은 이제 저에게 완벽한 쉼터가 됐거든요.
그 완벽한 쉼터에서 내놓은 결과물, 이번 정규 1집이 머지않아 공개되죠. 리스닝 파티를 개최한다고 가정했을 때, 초대장을 부치고 싶은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군가요?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이요. 얼마 전 내한했을 때 만난 적이 있어요. 공연 일주일 전, 크리스 마틴이 비밀리에 주최한 송 캠프에서요. 국내 인디 뮤지션 몇몇을 초청해 진행됐어요. 의자랄 것도 없이 모두가 땅바닥에 둘러앉아 음악 이야기를 나눴죠. 그 당시 저는 사업에 치여, 앨범 작업에 치여 낭만이 ‘제로’에 수렴한 때였거든요. 크리스 마틴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별 대단한 얘기가 아니었어요. 자신이 음악을 하는 이유, 음악을 만들 때 중요시 생각하는 것, 영감을 얻는 방법 등등. 평소라면 귀에도 안 들어올 말들인데 크리스 마틴의 입에서 나오니까 뭔가 확확 꽂히더라고요. 어딘가 모르게 ‘이래서 사람의 위치가 중요하구나’ 느껴졌고요.
은근히 속물 같네요(웃음).
저 은근히가 아니라 그냥 속물이에요(웃음). 사실 그전에도 유명한 사람을 볼 기회는 많았거든요. 그런데 크리스 마틴은 좀 신기했어요. 그냥 기운이 신기했어요. 이번 앨범의 타이틀 중 하나인 ‘Twisted Fantasy’를 들려줬더니 곧장 따라 부르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너의 노래에선 캐릭터가 튀어나오는 것 같다. 너 계속 음악 해야 한다. 관둘 생각 하지 마라.’ 사실 흔한 동기부여의 말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왜 정말 계속해야 할 것 같지?’란 마음이 계속 들었어요. 그때 그에게 얻은 건 다른 게 아니에요. 낭만을 다시 되찾았다는 것. 그래서 이번에 리스닝 파티를 개최하면 그를 초대해야죠. 완성된 앨범을 들려줘야 하니까요.
요즘 지올 팍이 마음속에 품고 사는 문장이 있나요?
‘머리로는 어른처럼 생각하고, 가슴은 아이처럼 뛰었으면 좋겠다.’ 예술가 겸 사업가가 가져야 할 마인드라고 생각해요. 머리는 아이, 심장은 어른, 이게 최악이죠. 둘 다 어른이면 차라리 사업을 하는 게 낫고요. 낭만에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까 겁나요. 그땐 정말 끝이거든요. 그래서 적어도, 심장은 계속 뛰었으면 좋겠어요.
- 포토그래퍼
- 채대한
- 프리랜스 패션 에디터
- 이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