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K팝 월드 투어는 규모도 방식도 판을 달리한다.
투어는 더 커지고, 더 길어지고, 더 많은 도시를 찍고 있지만 이제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남을 것인가’다. K팝 투어링의 현재가 여기 있다.

미국, 독일, 일본 등 다국적 팀으로 협업하는 건 기본값이에요. 프로덕션 인원만 80여 명에 달했죠. 12m 길이의 물류 컨테이너 총 12대가 동원됐고요. 투어 도시가 한두 곳이 아니니, 이 동일한 물류를 총 4세트나 제작해야 했어요.” 2019년 방탄소년단의 월드 투어 ‘Love Yourself: Speak Yourself ’를 공동 연출한 플랜에이 서동현 PD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이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고 2025년에 서 있는 지금, K팝 월드 투어 산업은 이전과는 비교 불가의 수준으로 유례없는 황금기를 보내는 중이다. 올해 제이홉은 전역 후 첫 솔로 투어 ‘Hope on the Stage’로 국내 솔로 가수 최초로 2만2,000석 규모의 미국 BMO 스타디움에 입성하며 티켓 파워를 입증했고, 전 세계 34개 도시를 순회하며 7월까지 이어지는 스트레이 키즈의 ‘Dominate’는 총 200만 관객을 동원해 K팝 역대 최다 모객 신기록을 갈아치울 예정이다. 이 바통을 이어받아 완전체로 돌아온 블랙핑크는 총 18회 차 스타디움 투어를 개최하며 국내 걸그룹 월드 투어의 신기록을 노리는 중이다. 이러한 최근 흐름에 관해 엔터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대신증권 임수진 선임 연구원이 말했다. “올해는 공연 중심의 성장이 본격화되는 해 예요. 팬데믹 기간 세계적으로 SNS 사용량이 크게 증가하며 해외 팬덤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어요. 이런 팬덤 성장은 즉각 음반 판매량 성장세로 나타났지만, 공연의 경우는 좀 달랐죠. 팬덤 수요를 확인하는 데 아무래도 시차가 걸릴 수밖에 없고, 모객에 실패하면 적자가 크게 발생하는 구조라 공연 규모를 보수적 측면에서 결정했거든요. 그래서 작년까진 수요 대비 작은 규모의 월드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월드 투어는 대부분 매진세를 보였고, 보수적 입장을 취해온 엔터사와 공연 프로모터 입장에서는 올해가 되어서야 규모를 크게 늘릴 근거가 생긴 셈이죠.”
과거만 해도 K팝 뮤지션에게 도쿄돔은 꿈의 무대, 단일 입성 자체로 대서특필할 만한 영예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의 K팝 월드 투어의 스케일은 공연장의 규모, 도시의 수, 대륙 간 이동 거리에 있어 모든 것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시아 투어에서 월드와이드 투어로, 아레나 투어에서 스타디움 투어로, 단일 공연에서 멀티 쇼로의 진화는 이제 보편적인 풍경에 가깝다. “그런데 ‘투어의 대형화’가 단순히 규모 확장이 아니라, 아티스트 브랜드의 상징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예요. 예전엔 월드 투어를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성장의 지표였다면, 지금은 그 출발선 자체가 달라졌어요. 데뷔 1~2년 차의 4세대 아티스트도 스타디움 투어를 기획하고, 해외 팬덤의 충성도나 소비력이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로 바뀌었죠. 지금 뮤지션들에게 월드 투어는 이들의 향후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하는 무대로 거듭났어요.” 아이브, 몬스타엑스 등의 국내외 투어를 기획 및 제작하는 공연 제작사 쇼노트의 글로벌콘서트사업본부 관계자의 말이다.
전 세계적 팬덤의 확장, 팬데믹 이후 현장 공연에 대한 수요 폭발 등 월드 투어 대형화에 불씨를 지핀 요인은 다양하지만, 최근 들어 프로모션 방식의 획기적 변화는 투어가 기획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놨다. 특히 코첼라, 롤라팔루자 같은 초대형 뮤직 페스티벌과 월드 투어를 유기적으로 연계해 프로모팅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 전략의 중심에는 라이브네이션과 AEG, 즉 전 세계 공연 산업을 양분하는 두 메이저 프로모터가 있다. 각각 롤라팔루자와 코첼라를 소유한 이들은 단순한 공연 유통사가 아니라, 페스티벌부터 단독 투어까지 뮤지션의 글로벌 노출 경로를 설계하는 기획자에 가깝다. 최근 몇 년간 K팝 뮤지션이 이들의 네트워크에 본격 편입되면서, 페스티벌 출연과 월드 투어가 하나의 세트처럼 묶이는 흐름이 가속화됐다. 제니, 엔하이픈 등이 코첼라 무대에 선 뒤 AEG 주관 월드 투어를 돌거나 제이홉, 아이브 등이 롤라팔루자 출연 전후 라이브네이션과 투어 일정을 이어간 것이 대표적인 예다. K팝 뮤지션이 글로벌 팝스타 반열에 서게 됐고, 북미 페스티벌의 현장 동원력이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헤드 프로모터들의 입장에선 K팝 아티스트가 티켓 세일즈를 견인할 유효한 카드로 작동한다. 동시에 뮤지션 입장에선 페스티벌을 통해 글로벌 노출을 확보하고, 이후 투어의 모객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에게 이득인 구조다.
“과거 북미 톱급 프로모터와 K팝 그룹의 투어를 함께 제작한 적이 있어요. 저희야 그룹의 세일즈 파워를 알고 그간의 데이터가 있으니, 그들에게 티켓 판매 과정에 대해 조언했죠. 그런데 오픈 직후 폭발적인 세일즈가 이뤄지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경험하며 그들도 알게 된 거죠. 확실히 K팝 투어의 지위가 달라졌어요. 과거엔 글로벌 프로모터 회사에서 K팝 공연을 한정된 부서에서 도맡았다면, 이제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글로벌 투어링 등을 담당하는 총괄 부서에서 핸들을 쥐는 상황이에요. 미팅에도 이전까진 절대 얼굴을 비치지 않던 고위급 담당자가 등판하는 수준이죠.” 공연 기획자 A의 말처럼 K팝 투어는 점점 글로벌 투어링 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음악 산업을 넘어 타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는데, 특히 글로벌 패션 하우스들은 뮤지션의 투어 커스텀 의상을 직접 제작하고 나서는 등 투어를 전략적 파트너십의 장으로 삼아 공격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는 투어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베르사체 코리아 PR 담당자 김문주는 지난해 브랜드 디렉터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스트레이 키즈 현진의 ‘Dominate’ 투어 전용 커스텀 의상을 제작한 사례를 언급했다. “사실 커스텀 룩 제작이 흔한 경우는 아니에요. 현진의 경우만 해도 디자인 스케치, 제작, 피팅, 세관 통과에 이르기까지 무려 2~3달이 소요됐거든요. 베르사체가 워낙 패밀리십이 강한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투어에서 자사의 룩이 노출되는 것 자체를 주요한 PR 수단으로 바라보는 게 커요. 기존 컬렉션에서 보여주지 못한 아카이브나 기술력을 커스텀 룩을 통해 보여줄 수 있고, 나아가 K팝의 주요 소비층인 Z 세대와 스킨십을 만들어 미래 잠재 고객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SM 프리즘 프로덕션의 김욱 총괄 디렉터도 말을 보탰다. “공연 한 회에 최소 20곡을 소화하잖아요. 많게는 4개 섹션으로 공연을 나눌 때, 섹션마다 의상이 필요한 셈이에요. 특히 오프닝 섹션은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뮤지션이 처음 관객 앞에 서는 순간이기 때문에 의상에서 가장 힘이 실리는 구간이죠. 여기서 커스텀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 들어선 하우스 브랜드에서 먼저 투어 커스텀 의상 협업을 제안하기도 해요. 언제든 ‘웰컴’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죠.”

한편 과거까진 ‘투어 지도 확장’이 트렌드였다면, 지금은 투어의 밀도와 완성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많은 도시를 도는 것이 아니라, 각 도시에서 얼마나 강력한 브랜드 경험을 주고, 현지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팬덤을 구축하느냐가 핵심이 된 셈이다. “팬들의 눈높이가 얼마나 높아졌는데요. 공연의 완성도가 낮으면 반복 구매가 결코 이뤄지지 않아요. 사실 해외 K팝 팬덤은 특정 그룹에만 애정을 쏟기보다 여러 그룹을 동시에 팔로우하는 경우가 많아요. 즉 이들은 ‘K팝 전체의 팬’에 가깝다고 봐야 해요. 공연 소비도 마찬가지죠. 한 해에 여러 그룹의 투어를 복수로 관람하는 일이 흔하고, 팬데믹 이후 K팝 공연이 거의 매주 해외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상황에서, 팬들은 더는 모든 공연을 다 따라가지 않아요.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에선 티켓 한 장이 한 달 월급에 맞먹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환경에선 당연히 더 냉정한 선택이 이뤄지죠. 누가 퀄리티 떨어지는 공연을 보고 스스로의 환상을 걷어내고 싶어 하겠어요?” 올해 지드래곤, 르세라핌, 엔하이픈 등의 아시아 투어를 제작한 공연 기획사 애플우드 최유성 대표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결국 K팝 투어는 이제 ‘얼마나 멀리, 또 많이 가느냐’보다 ‘어떤 인상을 남기느냐’가 중요한 질적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플랜에이 서동현 PD의 말처럼 “공연 자체의 스펙터클보다 스토리,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공연 연출이 중요해진 것은 물론, 투어 비주얼, 연계 콘텐츠, 투어 굿즈까지 공연 전체가 하나의 패키지처럼 설계되는 요즘이다. “이제 ‘경험’ 중심의 소비로 변하고 있어요. 그런 이유로 요즘은 공연 전후의 경험까지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게 중요해졌죠. 결국 중요한 건, 해당 지역 팬들이 공연을 어떻게 ‘기억’할지입니다. 단순히 ‘성사된 공연’이 아닌 ‘반응이 돌아오는 공연’을 만드는 게 현시점의 주요 과제예요.” 쇼노트 글로벌콘서트사업본부 관계자의 말이다.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에서, 투어 실황을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방식도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이는 공연의 여운을 연장하고, 오프라인에서 경험하지 못한 팬들에게 투어의감각을 전달하는 또 하나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동시에 엔터사에겐 공연 콘텐츠의 수익 구조를 다각화할 기회가 되고, 영화관 입장에선 자사의 특별관 경험을 부각할 수 있는 전략적 접점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투어는 무대 위의 한순간에 머물지 않고, 콘텐츠 확장을 아우르는 복합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성대한 잔치를 펼치는 K팝 월드 투어는 이제, ‘다음’이 가능할 것인지를 묻는 지점에 와 있다. 불이 붙는 건 쉬웠지만, 오래 타오르려면 장작을 어떻게 쌓느냐가 관건이다. 이미 입증된 흥행력 다음으로, 이 흐름이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를 진지하게 묻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 2~3년 사이 대형 엔터사는 유례없는 수의 신인 그룹을 데뷔시켰어요. 신인 그룹의 경우 첫 월드 투어를 진행하기까지 1~2년, 그리고 두 번째 월드 투어부터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합니다. 이러한 시기가 2027년에 집중되어 있어 높은 성장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죠. 또 중국의 한한령 해제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어요. 한한령이 없었다면 국내 엔터사가 적극적으로 웨스턴 시장 진출에 집중했을까 싶을 정도로 중국은 매력적인 시장이에요.” 대신증권 임수진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중국에서 개최된 상업 공연의 누적 관객수는 약 8,000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증가했는데, 동기간 국내 공연 시장의 관객수 약 1,000만 명의 기록과 비교하면 규모에서 8배 이상 차이가 난다. 참고로 공연 선진국인 일본은 동기간 2,400만 명 수준이다. 즉, 중국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경우 K팝 투어는 또 한 번의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모든 전망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그 이면을 짚는 목소리
도 존재한다. 엔터테인먼트 관계자 B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지금 K팝 투어가 완전한 포화 상태긴 해요. 예전엔 프로모션 지표가 나와서 투어를 갔다면, 지금은 너도나도 일단 뛰어들고 보는 형국이에요. ‘우리 투어 돈다’라는 대외적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500석 규모로라도 도는 거예요. 돈? 당연히 안 남죠. 상대적으로 영세한 중소 기획사의 경우 뮤지션에게 제안해요. ‘투어 시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면 마이너스인데 그래도 탈래?’ 씁쓸하지만 투어답지 않은 투어도 분명 있어요.”
시장은 분명 커졌지만, 그만큼 복잡해진 셈법을 풀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과열과 기대 사이에서, 상황을 더 면밀히 보는 시선도 있다. 공연 기획자 A는 말한다. “올해가 분기점이 될 거라 생각해요. 이례적인 투어 규모를 기록한 올해, 머지않아 성적표는 나올 테죠. 성공한 공연과 실패한 공연, 이 판가름이 말해주는 것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방탄소년단의 완전체 투어를 모두가 기대 중이고, 그로 인한 투어 붐은 또 한 차례 일어날 거예요. 하지만 그 붐의 바통을 이어받을 이로 누가 있느냐의 질문이 남아있죠. 북미 시장으로 봤을 땐 스트레이 키즈, 에이티즈가 선방하고 있지만 그 후속 타자는 사실 잘 안 보이는 상황이거든요. 이로 인해 K팝 투어 흥행에 공백이 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또 투어 포화로 인해 누적된 팬들의 피로감, 아이돌에 한정된 K팝 장르, 그에 따른 공연 래퍼토리의 획일화 등 해결할 숙제가 있을 거고요.” 그의 말처럼 물론 숙제는 많지만 K팝 월드 투어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가장 역동적인 이야기를 쓰는 중이다. 어떤 방향이든, 이 장르는 늘 예상을 비껴가며 다음 장을 열어왔다. 그러니 잠시 속도를 조율하는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셋업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이 판은 충분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