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Spring 발렌시아가 컬렉션이 펼쳐진 상하이의 밤.
지난 5월 30일 저녁, 중국 상하이 푸둥에서 열린 2025 Spring 발렌시아가 컬렉션은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발렌시아가 쇼이자 에디터가 직관하는 첫 발렌시아가 쇼다. 시답잖은 각종 의미 부여를 하고서 도착한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 발렌시아가의 상하이 접수는 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곳곳에는 발렌시아가 캠페인이 걸려 있고, 입국 심사를 거쳐 도착한 호텔에서는 발렌시아가 로고가 새겨진 나무 키 카드를 건넨다. 호텔 방으로 들어가니 동그란 찜기 속 딤섬 모양의 쇼 초대장과 발렌시아가 로고가 새겨진 ‘윈-윈’ 케이크가 자리하고 있다. 괜스레 로익 고메즈(뎀나의 남편이자 BFRND로 알려진 그는 발렌시아가의 모든 쇼 사운드트랙을 작곡했다) 음악을 호텔 방이 울리도록 크게 틀어놓는다.
포스트 코로나라고는 하지만, 중국에서 이토록 큰 패션 이벤트를 여는 일은 아직 쉽지 않다. 입국 심사 중 느낀 알 수 없는 긴
장은 괜한 것이 아니었을 터. 제도적 불안감은 차치하고서라도, 날씨 또한 발렌시아가의 편이 아니었다. 쇼 시작이 가까워질
수록 폭우가 거세졌고, 관객들은 우산을 쓰고 쇼 장소인 아트 푸둥 뮤지엄으로 힘들게 걸어갔다. 장 누벨이 건축한 푸둥 뮤지
엄의 스카이라인 뒤로 보이는 상하이의 장대한 야경과 빌딩을 덮은 거대한 발렌시아가 로고들. 그 광경에 현혹되려 할라치
면,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비가 또 퍼붓는다. 간신히 찾아간 좌석은 이미 비가 잔뜩 스며 축축했고, 자리엔 검정 우산만 덩그
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그래, 이 또한 발렌시아가답다며 한 번 더 의미 부여를 하고 만다. 검은 우산 군단이 겨우 자리에 앉은
순간, 이른바 ‘뿅뿅’거리는 음악이 시작되고 강렬하고 반복적인 전자음악과 함께 로익 고메즈가 첫 순서로 걸어 나왔다.
뎀나의 뉴에이지 테일러링으로 시작된 2025 봄 컬렉션. 검고 긴 테일러링 룩들을 뒤이어 7인치 플랫폼에 올라탄 모델들이 잰걸음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신발 상자 모양의 클러치, 셔츠와 재킷, 코트를 변형해 만든 숄더백, 새깅 팬츠로 보이도록 만든 두 겹의 팬츠 등 뎀나 특유의 도전적인 디자인은 말해 뭣하랴. 더 길어진 코트와 바지는 빗물에 끌려다녔다. 그와 동시에 모델들의 헤어는 평소 발렌시아가 쇼의 스타일뿐 아니라 레트로한 단발 스타일을 새롭게 선보여, 중화권의 영화에서 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중국의 가장 큰 모바일 결제 플랫폼 중 하나인 알리페이와의 티셔츠 협업, 언더아머와의 파트너십으로 완성된 의상들은 쇼가 끝난 직후 웹사이트에서 예약 판매를 시작하기도. 컬렉션 후반부는 AI가 만든 프린트의 이브닝 가운을 지나 쿠튀르의 영향을 받은 드레스가 채웠다. 고급스럽고 고상하기만 한 드레스 대신 슈트케이스와 같은 일상의 소재로 의외성을 더한 드레스 또한 뎀나가 가장 즐기고 가장 잘하는 트위스트 중 하나. 분홍색 깃털이 달린 가운을 입은 엘리자 더글러스의 걸음을 마지막으로 이 폭우 속 쇼는 막을 내렸다. 휘황찬란한 동방명주 탑의 야경은 안개 속에서 어렴풋한 존재감만 내비칠 뿐이었다. 상하이는 처음이었지만, 짐작으로 상상하던 상하이의 밤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그야말로 상하이 펑크의 정수를 보여준 쇼가 끝난 후, 홀딱 젖은 찝찝함은 잊은 채 비가 쏟아져 더 드라마틱했다는 기억 미화, 팬심에서 나온 무한 긍정주의가 발동한 순간!
쇼장을 나오며, 패션쇼에 해당 브랜드의 컬렉션을 갖춰 입고 온 관객이 이렇게나 많은 쇼장의 광경은 처음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다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은 온통 뎀나의 자장 아래 있다. 바닥을 쓸고 다니는 데님 팬츠, 어깨가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과장된 슈트, 타월 스커트, ‘Lays’ 과자봉지 가방, 고글 선글라스, (진짜일지 모를) 쿠튀르 컬렉션의 헤드피
스까지. 펑키한 고스족부터 이브닝웨어를 입은 여인, 베벌리힐스 걸(사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경계조차 무의미했다.) 등 발
렌시아가의 다양한 시즌이 혼재되어 두서없이 펼쳐지는 인간군상의 향연. 뎀나는 전 세계에서 발렌시아가의 매장이 가장 많
은 중국에,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발렌시아가 쇼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한 번이라도 오버사이즈 코트에
투박한 운동화를 매치해본 적 있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뎀나가 만든 스타일을 입어본 셈일 테다. 이것은 그가 발렌시아가의 맹
목적인 패션 팬뿐만 아니라 다수의 대중에게 이미 스며들었다는 방증이다. 상하이를 상징하는 높다란 기둥을 중심축으로 구
슬 세 개를 꿰어놓은 듯한 동방명주의 탑이 발렌시아가 행성으로 보이고, 상하이 푸둥을 거대한 발렌시아가 유토피아로 착각
하게 만드는 마력. 뎀나는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대신 계속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간다라는 필연적 결론을 내린다. 친
절하진 않지만 그만의 방식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