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중심지 뉴욕과 파리를 하나로 묶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디올 2024 가을 컬렉션.
지난 4월 뉴욕에 위치한 브루클린 박물관에서 디올의 2024 가을 컬렉션이 열렸다. “브루클린 박물관은 저에게 늘 특별한 곳이었어요. 이탈리아 출신인 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친숙하기는 한데 이탈리아에는 주로 로마 예술과 같이 특정 주제를 깊이 탐구하는 전시가 많거든요. 그런 반면에 브루클린 박물관은 다양한 시대의 전위적인 여러 작품을 동시에 감상하는 시각적 호사를 경험하게 해주었죠.”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후 항상 대규모 아트 센터에서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다고 밝힌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2024 가을 컬렉션 발표를 앞둔 그녀는 뉴욕에 오면 가장 먼저 들른다는 브루클린 박물관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치우리가 브루클린 박물관을 쇼장으로 낙점한 까닭이 비단 개인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물관이 위치한 장소가 뉴욕이기에 그녀는 더욱 망설임이 없었던 것. 이번 컬렉션에 앞서 치우리는 크리스찬 디올의 자서전을 꼼꼼하게 다시 읽었다. 그중 파리-뉴욕 여행을 다룬 챕터에 주목한 그녀는 프랑스와 미국의 외교적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도시이며 패션 산업의 메카인 뉴욕을 쇼 장소로 낙점했다. 더 나아가 컬렉션을 총칭하는 주제로 자유의 여신상을 연결 지으며 단순히 쇼가 열리는 장소를 넘어서 이번 시즌의 핵심 아이덴티티로 삼았다.
독보적이고 탁월한 큐레이팅으로 명성이 자자한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이번에는 또 어떤 예술적 터치로 우리를 사로잡을지 기대를 가지고 쇼 당일 브루클린 박물관에 도착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박물관에 들어서니 작가 수잔 산토로(Susan Santoro)의 방대한 작업이 우리를 맞았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도상학적 연구로 유명한 개념미술가 수잔 산토로, 1층에는 드로잉 작업물이 주를 이루었고 쇼가 펼쳐질 2층 원형 홀에는 개념미술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 컬렉티브가 설치한 대형 작품이 펼쳐졌다. 다양한 색상의 네온 조명으로 각기 다른 여성의 손을 재현한 작품이 하나둘 켜지며 쇼가 시작되었다.
펑키한 사운드가 흐르는 가운데 트위드 소재의 슈트 룩을 입은 모델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이 실루엣의 영감은 디올의 영원한 뮤즈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에서 찾은 것. 메종이 쇼 직전 공개한 티저에서부터 곳곳에 등장한 그녀. 독일계 여배우인 디트리히는 20세기 팜파탈의 대명사이자 진보적인 스타일의 아이콘이다. 1900년대 초반 아르누보 복식과 남성복 스타일을 오가며 보통 사람들이 엄두도 내지 못한 패션의 이중적인 면모를 시도한 그녀는 프랑스와 미국 두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이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그녀에게 영감을 받아 디올의 클래식한 실루엣, 디트리히라는 디바의 강렬하고 신비한 오라, 그녀가 선보인 보이시한 매력, 이 세 가지를 절묘하게 섞은 룩을 제안했다. 그녀가 선보인 젠더리스 스타일의 슈트를 차용해 넥타이, 민소매 베스트 및 와이드한 팬츠를 매하거나 펜슬스커트를 활용해 디올 코드로 재해석한 슈트 룩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해머 처리한 새틴, 크러시드 벨벳, 크레이프 직물 등 특별한 소재를 사용해 디자인의 모던한 느낌을 강조하고, 여기에 은방울꽃, 별, 클로버, 벌 자수 같은 다양한 디테일을 룩에 근사하게 배치했다. 무슈 디올이 소중히 여긴 시그너처 코드이자 룩을 즐기는 신선한 위트 말이다. 한편 정교하고 기발한 기술력이 돋보이는 니트웨어는 기존 디올 컬렉션에서 보지 못한 스포츠 코드가 가미되어 새로운 럭셔리를 느끼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뉴욕 하면 바로 패션 미디어가 떠오른다”라는 치우리의 말처럼 뉴욕이 패션과 소셜미디어에 미치는 영향력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도 엿보였다.
“저는 컬렉션 작업을 하면서 디올의 역사부터 크리스찬 디올의 뮤즈였던 여성들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배우이자 가수인 마를레네 디트리히에게서 영감을 얻었죠.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그녀의 스타일이 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어요”.
<뉴욕 타임스>에서 영감을 받아 신문을 프린팅한 새들 백, 성조기에서 영감을 받은 스웨트셔츠, 자유의 여신상을 자수로 수놓은 토트백 등 다양한 방식으로 뉴욕 모티프를 컬렉션에 아로새긴 디올 가을 컬렉션. 뉴욕의 스카이라인이나 자유의 여신상, 파리의 랜드마크를 묘사한 프린팅은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제작되어 트렌치코트와 이브닝드레스 위에도 입혀졌다. 디올의 20주년을 기념해 1976년 출시한 프랑스&미국 하이브리드 국기 실크 스카프를 스포티한 룩으로 재해석한 점도 눈에 띈다.
치우리에게 가을 컬렉션은 전체적인 시즌의 흐름을 정리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성찰의 시기이다. 여성의 니즈를 개발하고 충족시키는 디자인을 하는 그녀는 이번엔 뉴욕과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영감의 원천이 되어 디올식 코드를 추가한 테일러링 슈트부터 현대 브로드웨이를 연상케 하는 룩, 스포티한 애티튜드를 강조하는 스타일링을 대거 선보였다. 어느 하나 지루할 틈 없이 화려한 가을 컬렉션을 소개한 그녀. 그녀의 끊임없는 탐구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