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음이 가득한 쇼장. 이탈리아 남부에서 겪은 자신의 강렬한 기억을 소환한 마티유 블라지의 보테가 베네타 2024 Winter 시즌
밀라노 컬렉션의 마지막 날, 보테가 베네타 쇼장에 들어서자 매캐함이 느껴졌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착각이었다. 곳곳에 그을음 흔적이 있고 유리로 만든 선인장이 우뚝 자리한 채, 석양이 연상되는 주홍색 조명으로 가득한 쇼장.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역을 순행했다는 마티유 블라지는 불타버린 메마른 황무지에서 움트는 새로운 재생의 순간을 목격했다. 과거의 재탄생과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로 인한 재구성과 변화된 형태가 어디론가 향하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옷과 액세서리가 되는 것. 나에겐 지난여름 기록적인 폭염과 이상 기후에 시달렸던 이탈리아가 불현듯 떠올랐다. 마티유 블라지는 그 불타는 여정에서 회복과 부활의 신호를 발견한 것이다.
지난 시즌에 인트레치아토가 컬렉션을 점령한 것에 비하면, 이번 시즌 컬렉션은 장식은 줄어들고 의도적으로 평범한 모양에 기능성을 강조했다. 물론 보테가 베네타의 세부가 그렇게 단순할 리가. 첫 번째 룩은 어깨가 둥근 코쿤 실루엣 코트였는데, 옆구리와 소매를 접어 고정한 3차원적 실루엣이 완성하는 단추 장식은 드레스에서도 사용됐다. 네크라인의 한쪽과 반대쪽 엉덩이를 고정한 비대칭 드레스는 우아한 컬러 블록과 조화를 이뤘다. 혹자는 블라지와 그의 팀이 얼마나 즉흥적으로 핀을 꽂으며 드레스를 만들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고 했다. 조형적이고 예술적인 면모는 쇼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드러났다. 짧고 긴 뾰족한 천 조각들
이 겹겹이 쌓여 불꽃 모양을 형상화한 드레스나 사포로 빗질한 듯한 황금빛 필 쿠페 드레스는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또한 여권 스탬프를 층층이 겹친 ‘기억’ 프린트는 겹겹이 쌓인 시간을, 노트북 위빙 기법은 서로 다른 시간을 포용하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따뜻함을 내포했다. 단순하지만 튼튼한 일상의 옷과 테크닉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고급스러운 직물은 소재의 진실성, 정직한 실루엣이 삶을 가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요란하지 않게 일상에 녹아들 것 같은 새로 선보이는 리베르타 백, 플레인 안디아모, 홉 등의 액세서리에서는 불변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하우스의 가치관이 잘 드러났다.
실용적인 옷의 기류가 매우 심했던 이번 시즌 밀라노 여성 패션위크에서 보테가 베네타가 돋보였던 건 ‘일상의 기념비화’를 이야기하는 블라지의 진심에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뉴멘탈리즘(Monumentalism)이란 실용적이고 유용한 것에 대한 매혹과 자신감을 말해요. 지금처럼 타오르는 세상 속에서 옷을 입는 단순한 행위 자체에는 매우 인간적인 무엇인가가 있죠.” 일상에 대한 경외감은 소중한 것이다. 매일의 무게를 이겨내는 것에는 분명 숭고할 만한 지점이 있으니까.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인, 그런 한편 뛰어난 예술가인 블라지가 ‘데이웨어’를 의미 있게 다룬 것은 개인적으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전해 듣는 뉴스 때문에 요즘 기뻐하기나 축하하기는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부활이라는 개념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땅이 불타고 난 뒤에도 꽃이 피어나면 희망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꽃은 이전보다 더 강하게 자라날 겁니다. 우아함은 회복의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 사진
- Courtesy of BOTTEGA VENE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