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 혹은 시작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리는 이들을 향해 각자의 온도로 목소리 내는 두 이야기를 건넨다
‘사랑의 시작’이라는 시제를 던지자, 이에 대한 서로 다른 고백 두 편이 배달되었다. 나는 또다시 기꺼이 바보가 되어 불안전하고 생기 넘치는 그 세계로 돌진할 것인가? 또다시 나를 돌볼 기회를 잃어버리며 손상되기 전에 무엇을 점검해야 하나?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 혹은 시작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리는 이들을 향해 각자의 온도로 목소리 내는 두 이야기를 건넨다.
우리 멋진 바보들에게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이 말을 믿어요. 네. 저는 시인입니다. 농담이 아니고요. 이 말은 제가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문자 그대로 제가 시집을 출간하고 시를 써서 원고료를 받는 원고 노동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항상 사랑에 빠진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랍니다. 이건 허풍이 아니고, 직업윤리의 문제예요. 아, 하지만 제가 말하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 그런 종교적 사랑을 뜻하지는 않아요. 만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사랑도 아니고요.
시인으로서 제가 읽고 쓰는 사랑이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랑이에요. 서로 한없이 독점적이(길 바라는)며 다소 편파적인 사랑. 도대체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 할 때의 그 사랑, 황금을 내주지도 않고 산을 옮기지도 않는 사랑. 황금처럼 애지중지 전전긍긍하면서 누가 탐낼까 봐 지레 걱정하고(보통은 아무도 탐내지 않지만요), 도처의 능선만 봐도 눈이 닮았네 코가 닮았네 옆에서 보면 다소 심하게 주책을 떠는 그런 사랑(닮았을 리가 없지만요) 말이지요.
인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오직 너, 닮은 사람 아닌 너 하나만을 향하는 그런 사랑. ‘혹시 만약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만물을 사랑하게 된다면, 네 눈이 닿는 이 세상의 전부가 사랑스럽기에 세상을 사랑한다는 바보가 기꺼이 되어버렸단 뜻이야’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 말이에요. 그리고 아시나요? 바보… 가 되면 세상이 아름답거든요. 정말로. 정말로요. 그리고 아시나요. 바보가 되면 세상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쉽거든요. 하하. 비웃으라지요! 사랑에 빠지면, 세간의 시선이 두렵지 않아요. 두려운 것은 이 사랑이 끝나는 일뿐이죠. 그리하여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께 우리들이 멋진 바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 중 하나인 당신께, 혹은 언젠가 사랑을 시작해봤던 당신께, 그러니까 시인인 당신들에게 ‘우리 바보잖아요’ 하고요. 작은 권유도 하나 하고 싶고요.
저의 경우 시인의 사랑이란, 막 시작하는 연인이 하는 것과 유사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시인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래요. 항상 잘 보이고 싶어서 조금 무리하고,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지만 너무 그거로 날 놀리지 않아주었으면 좋겠고, 상대방이 내 앞에서 조금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귀엽고 더 잘해주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이 언제나 발생하는 상태와 유사하죠.
이를테면, 저는 언제나 오늘부터 1일인 그런 사랑 상태에 저를 두는 것이 목표예요. 시를 쓴다는 건 그런 상태와 좀 비슷하거든요. 상대방이 저를 좋아할까 좋아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해소된 상태를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이것은 헤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감정의 온도나 속도가 일치하지 않잖아요. 결국 상대방에게 우리의 피부를 모두 열고 있으면 있을수록 늘 새롭게 상처받거나 감동하게 되는 그런 문제니까요).
시인으로서 저는 시작하는 연인들이 하는 사랑과 유사하게 매일매일 사랑하는 일의 새로움에 놀라워하며 살아가려고 해요. 사랑이 쉽냐고요? 사랑이 만만하냐고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상 그 어떤 바보에게도 사랑이 만만하진 않다구요. 하지만 제 경우에는 사랑에 빠지기란 쉽네요. 왜 ‘빠진다’고 하겠어요. 불가항력이란 뜻 아니겠어요. 저항하지 못하고 빠지는 게 사랑이죠(‘사랑은 의지’라는 시가 있기도 하지만, 그건 시작 단계에서는 아직 이른 말 같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의 특징을 한번 나열해볼까요. 시인들이 하는 짓과 정말로 유사해요. 첫째, 항상 기다립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더욱더 사랑에 빠지게 하는 방법은 기다리게 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누가 누구를 기다리게 한다고 할 수 있나요. 1분 1초도 언제나 아쉽고 기다리게 되는데요. 다 아시잖아요? 시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시인들 좀 보세요. 마음이 먼저 마중 나가 기다립니다. 둘째,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죠. 한밤중에 갑자기 벅찬 마음을 주체 못해서 그 사람이 사는 집도 모르면서 괜히 그 사람이 사는 동네 편의점에 가서 음료수를 사 오는 등등 본인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게 돼요. 시인들은 비상식적인 일 많이 하니까 일일이 적지 않을게요. 셋째, 무엇을 봐도 상대방이 떠오릅니다. 저는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과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작동시키는 인지 방식이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독창적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과자 봉지를 봐도 네가 떠오르고 맨홀 뚜껑을 봐도 네가 떠오르는 것과 같죠. 닮은 점이 정말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든 닮은 점을 찾아낸다고요. 넷째, 상대방으로 인한 긴장감과 설렘이 구별되지 않아요. 상시 도파민이 널뛰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게 관계를 정립하는 초반에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인데도 언제나 당황하고 새롭게 고통스러워하죠. 이 괴로움을 조금 즐기기도 하고요.
그리고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특징은 이거예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만나는 누구에게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 어떤 대화를 해도 주제가 자꾸 내 사랑으로 향해요. 만약 대화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면 머릿속이 온통 사랑하게 된 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휘청거리는 느낌을 줘요. 붕 떠 있는 느낌 그거요. 사랑의 시작은 역시 좋은 거 맞네요. 시인이 되게 해주잖아요. 바보가 되게 해주고요.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해주고요. 세상의 모든 말들, 밋밋하기 그지없던 말에 전부 생기가 돌 거예요. 그리고 그 생기가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향해 돌진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멀미는 좀 나겠지만, 마음껏 휘둘리시길. 혹… 시작이 주는 신선함이 좀 짧게 느껴진다면 시를 써보시는 건 어떨지 싶어요. 사랑을 시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지만 진짜로 시를 쓰는 일은 또 드물잖아요. 제가 시인으로서 보증할게요. 사랑을 시작했는데 시도 쓰기 시작한다? 와, 당신 정말, 사랑을 바보처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내가 처음 사랑했던 그 사람의 그 첫 얼굴과 손바닥의 온도는 잊어도 시는 남아요. 약속해요.
– 김복희(시인, 산문집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시집 <스미기에 좋지> 저자)
온당한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며
상대에게 모든 것을 쏟았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다. 모든 신경이 다 한 사람에게로만 쏠리고 머리에 피가 끓어올랐다 차갑게 식기를 수십 번 반복하던 그 시절. 모든 오감으로 상대를 느끼고자 했던 그때. 나는 폭설이 내리는 날에 그 사람을 만나서, 폭설이 내린 것 또한 그 당시에는 운명인 줄로만 알았다. 웃기지도 않는 열망들. 우리는 우리를 만나서 우리가 되지만, 반대로 우리라서 우리가 아님을 쉬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같은 산책 코스를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면서 지겨운 줄을 모르던 때, 떡볶이 2인분을 나눠 먹고 함께 PC방에 가 서로의 캐릭터를 서포트해주던 10대를 지나 내가 <라라 랜 드>의 엠마 스톤이 된 줄로만 알았던 20대 때의 사랑들···. 나는 그 시절의 사랑들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어떤 놀라움을 느낀다. 그렇게 다성적인 감정을 느꼈던 그때의 내 모습에 말이다. 그리고 종내에는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시시껄렁하게만 느껴지는 지금의 내가 되어 있다니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 어린 시절 다이어리를 한참이나 뒤졌고 그 작업은 나를 낯 뜨거움에 여러 번 좌절하게 했다. 20대의 나는 거듭되는 만남과 이별에 지친 나머지 다이어리에 남몰래 콜드플레이의 ‘The Scientist’라는 노래 중 몇 구절을 적어두기도 했다. 가사를 직역해보면 ‘돌아와서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나는 원으로 내달려 우리의 꼬리를 쫓아 결국 우리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는 내용이다. 지금의 나는 한동안 이 노래만 주야장천 들으며 질척거리는 감정에 젖어 있던 그때의 나를 좀처럼 견디기가 힘들다. 그리고 뭐랄까, 조금 안타깝다. <환승 연애>나 <솔로 지옥> 같은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 놀라운 것이, 출연진이 모두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의 관계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몹시 매끄럽게 이야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순간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고, 그럼에도 밀려오는 후회를 받아들이고, 눈물이 나오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러나 분명한 건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주 미숙했고 엉망진창이었으며 꼴사나웠다.
한때는 서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서로의 집을 번갈아 데려다주기를 반복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자체가 좋았고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가 내게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한번은 신정역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신정네거리역에서 한참 상대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결국, 내가 잘못된 곳에 왔음을 깨닫고 원래 만나기로 한 역으로 달려갔지만, 애인은 나에게 아주 크게 화를 냈다. 내가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만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나는 그렇게 주저 없이 화를 내는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그때는 상대를 화나게 하는 내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까 그때 나의 문제는 나를 정말 한 치도 몰랐다는 것이다. 내가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었고 내어주면서 지켜야 할 나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관계라는 건 에너지 그 자체다. 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을 잘 조율해서 만들어가는 생동의 네트워크. 그것이 2인 체제든 3인 이상 체제든 힘든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나를 지키는 일이 상대에게 나를 내보이지 않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나를 내보이되, 마음속 깊은 곳, 손상되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그것을 지켜내는 일에 가깝다.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이 어떻게 되든 간에 상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고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손상되어서는 안 될 것이 단단히 손상되어버렸고, 그래서 나는 그때 연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지 못하다. 지금의 비틀린 나를 만든 것만 같아서.
다들 알다시피, 연애는 구질구질하다. 옹졸하고 끈덕지며 너무 덥게 혹은 춥게 만든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때의 나는 너무 쉽게 매달렸고 불같이 화를 냈으며 그럴수록 나의 마음은 너무도 빠르게 헐어갔다. 내가 나를 너무 돌보지 않아서 애인을 힘들게 했고 애인도 애인 나름대로 내 성화를 못 이기고 자신을 돌볼 기회를 잃어갔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여유도 없었다는 뜻이다.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추천해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 술>을 읽겠다고 들고 다닌 적이 있다. 아이들은 책 제목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고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그 책을 몇 줄 읽지도 않은 채 얼른 반납했다. 그리고 20대의 지난한 연애가 끝난 뒤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내가 얼마나 안일한 기대와 가치관으로 상대를 피곤하게 하고 스스로를 자학해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사랑을 그저 쉽게 빠져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며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을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을 던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공을 사이에 두고 함께 에너지를 조율하며 터질 듯 말 듯 그 공을 함께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을 꽤 오래 가졌고, 그 덕분에 오히려 사랑에 대해 멀어진 상태로 나의 사랑을 점검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지금의 나는, 사랑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2인 체제(?)의 사랑에 대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3인 이상의 체제를 꾸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냥 서로 주고받는 성애적 관계에 크게 골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고, 오히려 나는 그런 다양한 사랑의 의미에 더 골몰하게 되었다. 모든 사랑이 맘 놓고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는 게 지금으로선 내 사랑의 최선이다.
물론 어떤 상대 자체가 내 삶의 최선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절을 종종 후회한다. 후회하는 게 잘못된 버릇인 줄 알지만, 그래도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좀 더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에게 마음을 내어줄걸,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요즘 이루고 있는 이 많은 사랑에는 좀처럼 후회가 없다. 그건 아마도, 이제 내가 누울 자리를 알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누울 자리를 알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는 말 그대로 사랑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 서술하면서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말에 정말이지 크게 공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온당한 마음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대상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자신의 사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야 마는 그날이 지금 내 사랑이 가닿는 곳이다.
– 예소연(소설가, 소설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 저자)
- 글
- 김복희, 예소연
- 사진
- getty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