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연말결산, ‘K-아트’편

권은경, 전여울

올 한 해를 돌아보며 K아트에 던진 10개의 질문과 시선들. K아트를 둘러싼 진단 혹은 사담의 줄타기에서 2023년의 삼라만상이 고개를 내밀었다.

1. 2023년 미술계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박재용(독립 큐레이터)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유동 자금 덕분에 대중화된 미술품 컬렉팅과 프리즈 및 키아프 개최를 통해 미술 향유의 저변이 넓어지는 건 좋다. 하지만 이야깃거리가 미술 ‘시장’에 관한 것뿐이라면 곤란할 따름. 미술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은 아트페어나 작품 컬렉팅만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목 놓아 외쳐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마치 주식이 올랐다 내리는 것처럼 흐름을 타는 미술 시장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는 대신, ‘미술적인’ 생활이나 삶에 대해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이소영(컬렉터) ‘화산 폭발 이후의 잔열’. 지난해 ‘한국 미술 시장의 활성화’라는 거대한 화산 폭발이 일어난 이후, 그 남은 따뜻한 온도로 올해 역시 미술 시장이 분주히 작동되는 인상이었다. 또한 넘쳐나는 신생 아트페어로 컬렉터를 비롯한 아트 러 버들은 지칠 법도 했지만 그 모든 소란을 통과해 다시금 깨달은 게 있으니, 이러나 저러나 아트 마켓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고 조용한 것보다 시끄러운 게 낫다.

강보라(프리랜스 에디터) ‘풍요와 빈곤의 공존’. 기획 전시가 전에 없이 많아졌고, 두번째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의 연합은 첫 번째보다 떠들썩했다. 그렇지만 정작 미술 시장은 추락하는 경제 상황과 더불어 세계 정세의 불안 등으로 움츠러든 것 같다. 잘 되는 갤러리와 잘나가는 작가들은 건재했지만, 신진들에게는 어떠했을지 생각해보면 그 간극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밝은 면을 보자면 ‘예술과 미술’이라는 분야가 저만치 멀리 있거나, 특정 계층의 향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난 듯하다는 것. 극장에 가듯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고, 패션이나 인테리어 소품을 쇼핑하듯 아트 작품을 구입하고 소장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본다.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과도기’. 비단 미술계뿐만이 아니라 예술, 문화계 전반으로 그 세대와 매체가 교체되고 그에 따라 산업과 시장, 예술가들의 포지셔닝, 기관과 갤러리들이 작가와 함께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시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큰 물살 속에서 2023년 미술계는 ‘성장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의미한 한 해를 보냈을까? 해외 갤러리의 서울 입점이 한국 미술계에 과연 어떤 이점이 있을까? 한국 미술계는 정말 한국 미술계를 위하고 있을까? 이러한 원론적인 질문은 시간이 답해 주기 마련일 터. 그럼에도 한 가지 궁금증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수많은 작가, 작품, 전시, 프로덕션 등이 과거에 비해 콘텐츠적으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우리가 미술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미술품이 수십, 수백억의 금전적 가치가 붙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2. 키아프·프리즈 서울 위크에서 마주친 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BANKSY, LOVE IS IN THE BIN, 2018, SPRAY PAINT AND ACRYLIC ON CANVAS MOUNTED ON BOARD, FRAMED BY THE ARTIST, 142×78×18CM, SIGNED ON THE REVERSE ©BANKSY 2023.

박재용 키아프와 프리즈 둘 다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었을까.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두 아트페어에 모두 참가한 한국 갤러리들이 있었다. 키아프는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행사이니 참가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국제적인 프랜차이즈인 프리즈를 놓칠 수도 없으니 난감하지 않을까 추측만 해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페어 오픈을 앞둔 마지막 밤(스태프들이 쓸 수 있게 미리 개방된) 카페테리아에서 전 세계에서 온 갤러리스트와 설치 테크니션들이 다투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는 일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갤러리 부스는 완성해야 하고, 이 와중에 잘잘못을 가리는 말싸움은 해야 하는데, 도너츠랑 샐러드는 또 맛이 있고… (나는 올해 ‘투어 프로그램’ 진행자로 프리즈에서 일했다.)

이소영 돌이키면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해외 아트페어를 방문했다. 급기야 프리즈의 경우 LA, 런던, 뉴욕, 서울 4곳 모두를 찾았다. 프리즈 서울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개최 기간 동안 프라다, 디올, 샤넬 등의 패션 하우스가 서을 전역을 무대로 밀도 높은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것. 패션과 미술의 만남이 더는 특별함으로 치환되지 않더라도 각 브랜드가 현대미술과 협업하는 것은 언제든 반길 만할 일이다. 다만 몇몇은 동시대 미술 작가난 시장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급히, 무엇보다 모두가 하니까 관성처럼 기획한 행사 같아 아쉬웠다. 키아프에서는 주요 프로그램보다 신생 갤러리 및 신진 작가를 소개하는 섹션인 ‘키아프 플러스’가 더 흥미로웠는데, 급조한 건지 뭔지 몰라도 카펫 바닥에 부스를 설치한 점은 오래도록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강보라 고덕동에 위치한 라이트룸 서울에서 해가 저문 밤에 펼쳐진 성능경 작가의 퍼포먼스. 작가의 대표적 퍼포먼스인 ‘신문 읽기’를 100명의 외국인과 함께 진행했다. 특유의 제례의식인 퍼포먼스 선언문을 적은 종이를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한 이날의 퍼포먼스. 마치 텅 빈 공장과도 같은 공간에서 스페인,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폴란드 등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외국인 100명과 동시에 신문을 펼쳐 읽는 장면은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이었다. 언론 검열이 극으로 치닫던 유신체제 초중기 홀로 외로이 진행한 ‘신문 읽기’를 2023년 여든이 된 작가는 하얀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아무 거리낌도 없이 능청맞게 외국인 100명과 함께 다시 또 했다. 그리고 문득 스친 생각 하나, 그때와 지금이 그렇게나 다를까?

전여울 단 이틀만 펼쳐진 프라다의 ‘프라다 모드’. 프리즈 위크에 열리는 온갖 파티와 이벤트는 지나치게 ‘전투적’인 게 문제다. ‘옆집’이 파티를 연다니 울며 겨자 먹기로 황급히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어설픈 명분을 세우고, 하지만 겉 포장지는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유일하게 한 명의 관객으로 의미 있게 즐긴 건 ‘프라마 모드’뿐이었다. 오랜 시간 테이트모던의 수석 큐레이터로 활약한 이숙경에게 전시 기획의 방향키를 맡기고, 영화와 미술의 낯설지만 기발한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고, 전시와 스크리닝, 대담, 공연, 미식을 넘나드는 촘촘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인사동 ‘코트’ 공간을 거대 자본을 들여 ‘프라다 모드 유니버스’로 완전히 탈바꿈시켰지만, 이 밀도 높은 행사를 단 이틀만 진행한 것에서 어떤 화끈함(?)도 느껴졌다.

3. 박서보는 한국 미술사에서 어떤 존재였나?

박서보. COURTESY OF HYEA W. KANG
박서보, ÉCRITURE (描法) NO. 110502, 2011,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70X230CM. ©PARKSEOBO FOUNDATION.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박재용 나 자신이 미술사가는 아니기에 질문을 슬쩍 비껴서 답해보자면, 내게 박서보는 오랜 시간 ‘으음’, 이라는 반응을 자아내는 존재였다. 나는 그의 작업을 잘 알지 못했고, 다른 많은 작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부터 교수로서 안정적인 삶을 이어온 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독재 시절에는 저항적 미술 활동을 하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끌려간 작가들도 있었으니, 밑도 끝도 없는 편견은 아닐 테다.) 작가로서의 성취나 정치적 지향에 대한 논의를 떠나, 박서보라는 작가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놓은 한국 미술계와 미술사 그 자체다.

이소영 한국 미술 시장이 성장해감에 따라 해외 갤러리와 적극적으로 손잡고 베니스 비엔날레 등을 통해 세계에 단색화의 위상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등 한 거장이 열정과 야망이 있으면 어떻게 글로벌하게 발전하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인스타그램 등의 젊은 채널을 통해 보다 넓게 관객과 스킨십하려 했다는 것, 심지어 오랜 시간 미술 교육인이자 저자로서 활동해왔다는 점으로 보아 여러 방면으로 한국 미술사에 오래 남을 이름일 테다.

강보라 박서보의 존재감을 온전히 평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올해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지만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는 열망에 항암 치료를 포기한 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붓을 들었던 그는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처럼’ 살다 간 존재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4. 올해의 발견이라 칭하고픈 아티스트는?

김윤신

박재용 김윤신. 오랜 시간 자신의 활동을 지켜낸 작가의 존재는 창작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준다. 단순히 ‘버티면 뭐든 된다’는 희망을 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가 믿는 바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을지 상상하게 해준다는 이야기다.

강보라 단번에 그리고 누구에게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그림. 화가 이소연의 그림이 그랬다. 갤러리 스탠에서 열린 개인전 <Solace>에서 펼쳐진 몽환적이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른한 꿈결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여러 겹의 아크릴 페인트와 오일 페인트를 섬세하게 중첩해 투명감과 깊이를 동시에 표현하는 그녀의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차세대 글로벌 팝아티스트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성능경. COURTESY OF JANGHYUN HONG.

전여울 올해로 여든을 맞은 국내 1세대 실험미술가 성능경이야말로 2023년의 ‘신예’였다. 일찍이 국내에서 개념 사진 장르를 개척하며 반세기 넘도록 활동해왔지만, 세상은 그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본 눈치였다. 3월 백아트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부터 5월 국립현대미술관 단체전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8월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한 생애 두 번째 상업 화랑 전시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9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순회전까지. 나아가 해외 메이저 갤러리 리만 머핀의 부름을 받아 내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니 올해 그보다 더 분주히 달린 작가는 없을 거다. 작가는 올해 자신에게 일어난 소동을 두고 “그냥 가난한 길로 돌아갈까 생각해요. 사실 예술가의 길이란 그런 거거든요”라고 말했지만 부디 그가 오래도록, 더 자주 미술계에 문을 두드려주길 바랄 뿐이다.

5. 올해 미술계에 일어난 인상적인 사건 세 가지를 꼽자면?

박재용 첫째, 국립현대미술관은 다시 한번 전임 관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임명 과정부터 논란이 일었던 윤범모 전 관장은 사퇴 과정도 썩 명쾌하지 않았고, 김성희 신임 관장은 소리 소문 없이(?) 일을 시작했다. 둘째, 광주비엔날레에서 일었던 박서보 예술상 논란. 비 내리는 날 열린 오프닝 행사에선 미술대학교 학생이라고 밝힌 이들이 박서보 예술상 반대 플래카드를 흔들었고, 보안 요원들에게 제지당해 행사장 밖으로 쫓겨났다. 셋째, 미술계만 아니라 예술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사건. 예술가들에게 창작 기금을 제공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금 신청에서 실행, 정산까지 모든 걸 1년 안에 끝내는 ‘빨리빨리 시스템’을 벗어나 처음으로 ‘3년간 지원’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한국의 예술가들도 ‘3년 뒤의 미래’라는 걸 꿈꿔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소영 첫째, 1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광주 정신을 바탕으로 한 비엔날레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지역 미술인들의 거센 반발이 끊이지 않았던 것. 좋은 의도로 후배 작가들에게 100만 달러를 수여하려고 해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지 못하면 무용지물임을 배운 사례. 둘째,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뱅크시의 ‘풍선을 든 소녀’가 약 16억9000만원에 낙찰된 순간, 작품의 절반이 자동으로 파쇄됐다. 뱅크시는 액자 속 분쇄기를 장치해 낙찰 순간 이를 가동시켰고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21세기 미술계 최고의 이슈 중 하나로 꼽힐 이 사건의 중심에 선 작품이 ‘풍선 없는 소녀’란 새 이름으로 프리즈 위크 기간 한국에 상륙한 일은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회자될 거다. 셋째, 올해 역시 프리즈 위크를 기념해 진행된 청담, 한남, 삼청 나이트의 열기. 한 도시에 건강한 아트페어가 생기면 도시 전체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전여울 첫째,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인전<We>에서의 ‘웃픈’ 해프닝. ‘1.5억짜리 바나나’로 알려진 전시작 ‘코미디언’을 서울대 재학생으로 알려진 이가 먹어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아침을 안 먹어 배가 고팠다’는 이유는 꽤 그럴싸했을지 모르지만,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한 행위예술가가 퍼포먼스로서 ‘코미디언’을 먹어 치운 사건을 복사, 붙여넣기 하는 데 불과한 이 싱거운 해프닝이 연이은 전시 흥행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로 소리 소문 없이 묻혔다는 결말까지 어쩐지 ‘웃펐다’. 둘째, 다소 아쉬움을 남기며 닻을 내린 제1회 디파인 서울. 아트부산의 야심작이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한국에 없던 디자인과 미술을 결합한 새로운 모델의 아트페어라는 점에서, 성수동을 돌며 관람하는 로컬 친화적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걸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홀로 빛났던 국제갤러리의 홍승혜 전시 부스뿐이었다. 셋째, 올해도 쇄도한 ‘한국행’ 행렬. 4월 페레스 프로젝트의 삼청동 지점 개관, 9월 화이트큐브와 화이트스톤의 개관, 타데우스로팍의 확장 소식이 알려졌다. 약 100년을 이어온 프랑스 예술 출판사 까이에다르도 서울을 거점으로 아시아에 첫 공식 론칭한 상태. 내년 역시 한국행 열차는 만차이지 않을까?

6. 올해의 행보를 지켜보았을 때 앞으로가 기대되는 신생 미술 공간은?

‘새 모양 토기’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84-84, 1984, 미상의 나무, 145×38×35CM, 개인 소장.

박재용 작가 노두용이 운영하는 실린더는 갤러리를 표방한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활발했던 ‘대안공간’과 잠깐 반짝했던 2010년대 중반의 ‘신생공간’이 그동안 한국의 신생 미술 공간을 대표하는 유형이었다면, 실린더는 (혹은 이와 비슷한 세대의 공간은) 과거의 미술 공간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비영리 공간이나 시민 운동을 연상케 하는 방식이 아니라, 곧장 갤러리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시장을 향해 직진한다. 그래서, 실린더에 대한 기대는 약간의 불안함 그리고 호기심이 동반된 종류의 것이라 하겠다.

이소영 여전히 을지로 부근의 소규모 갤러리들이 기대된다. N/A, 오브(OF)가 대표적. 나아가 봉천동에 이어 올해 용산에 또 하나의 지점을 개설한 실린더에도 젊은 컬렉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한편 한남동에 위치한 파운드리 서울은 구찌 가옥과 한집살이(?)를 하고 있기에 문화 예술에 관심 많은 이들 사이 더더욱 주가가 높아질 듯하다.

강보라 아트 전용 공간은 아니지만, 올해 대전에서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 헤레디움이 둥지를 툰 건축물은 올해로 지어진 지 101년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으로, 일본이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대표적인 수탈 기관으로 사용된 공간이며 현재 국가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헤레디움은 이곳의 건축적 가치를 보존하고 복원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아픈 역사를 딛고 현재의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만으로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곳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말했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니까. 헤레디움은 그 첫 전시로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안셀름 키퍼와 함께했다. 작가의 국내 전시 <가을Herst>은 ‘폐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헤레디움의 철학에 작가가 공감했기에 성사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대전으로 향한다. 서울에 집중된 수준 높은 문화 공간을 지방 지역으로 확대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실린더

전여울 실린더. 개인적으로 실린더의 정체성은 이들이 2021년부터 전개한 전시 시리즈 ‘Torque’가 아닐까 생각한다. ‘Torque’란 매해 연말 졸전을 진행하는 학부생들의 작업으로 구성한 전시로, 올해 역시 그 세 번째 시리즈로 장순원, 최선아 2인전 <Torque 3 / High Beam>을 개최했다. 작가와 ‘함께’ 성장하고 이를 원동력으로 공간을 운영하겠다는 올곧은 기조가 단편적으로 ‘Torque’ 프로그램만 봐도 느껴진다. 한편 올해 프리즈 서울의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도 단연 이들이었다. 부스 내 커튼을 여닫는 행위를 통해 ‘탈진실(Post Truth)’이라는 전시 주제를 효과적으로 보여준 것은 물론, 정지된 설치가 아닌 하얀 가벽 너머 유무형으로 작동되는 부스 형태를 보여준 참신한 시도였다. 이들에게 최고의 부스상인 ‘포커스 아시아 스탠드 프라이즈’가 돌아간 것은 당연한 처사였을지도 모른다.

7. 제14회 광주비엔날레를 둘러싼 기대 이상, 기대 이하의 면은?

엄정순, 코 없는 코끼리, 2023, 철판, 양모, 천. 300×274×307CM. 작가 및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박재용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기대 이상으로 밋밋한, 음식으로 따지면 마치 평양냉면과 같은 맛을 자아낸 전시였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전시는 기대 이하의 면을 보이기도 했다. 유명한 평양냉면 가게들은 냉면만큼이나 사이드 메뉴에 힘을 주곤 한다. 국제적 규모로 치러지는 비엔날레에서 이런 사이드 메뉴에 해당하는 건 매끄러운 운영이나 더 다채로운 접근성 프로그램, 박서보 예술상처럼 결과적으로는 논란이 될 만한 결정에 대한 영리한 판단이 아닐까.

이소영 (지금은 사라졌지만)박서보 예술상을 수상한 엄정순과 같이 숨은 좋은 작가를 조명한 것은 단연 기대 이상의 지점이었다. 평소 엄정순 작가가 운영하는 ‘우리들의 눈’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미술 교육을 하는 기관이다. 작가는 인도네시아,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의 수난 여정을 따라가는 작업을 프로젝트로 하면서, 그 경로 선상의 도시에 사는 시각 장애 학생들과 함께 오랜 시간 작업을 진행한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시각장애 친구들이 청각과 촉각, 후각으로 느낀 코끼리를 표현한 조형물을 재해석하고 실제 코끼리 크기로 대형화한 설치 ‘코 없는 코끼리’를 선보였는데 비엔날레에 온 관객들이 직접 조형물을 만져보고 경험해볼 수 있도록 운영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가 대상을 느끼는 다양한 감각에 대해 재고해보는 소중한 기회를 이번 비엔날레에서 맛봤다.

8. 올해 당신에게 최고의 전시는?

박재용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이 전시가 아니었다면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나 1984년에 홀연히 아르헨티나로 떠난 88세의 작가 김윤신의 존재를 영영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전시가 끝나고 한참 뒤 직접 만난 작가는 아흔을 앞둔 지금도 전기톱을 들고 나무를 켠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혹은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섬세하고도 호방한 사람이었다.

이소영 첫째, 일민미술관 <I Like to Watch>. 프리즈 위크에 맞춰 진행한 런던 기반의 젊은 작가 이시 우드의 개인전. 올해 글로벌 미술계에서 가장 뜨겁게 호명된 이시 우드의 서울 전시는 과연 귀한 시간이었다. 둘째, 국립중앙박물관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기획 전시는 나날이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삶을 마치는 자와 함께했던 수많은 토우의 종류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 뭉클했던 전시다. 또 미디어 기술을 전시에 적확하게 활용한다면 어떠한 극적 장면이 탄생할 수 있는지 재확인한 사례. 셋째, 호암미술관 <한 점 하늘, 김환기>. 시작부터 끝까지 숨죽이며 관람한, 단연 올해의 전시. 김환기의 생애를 한 공간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강보라 아모레퍼시픽미술관 <Under the Sun>. 돌이키면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예상치 못한 작가의 어마어마한 기획 전시로 한 번씩 큰 울림을 주었다. 올해 로렌스 위너 회고전 역시 마찬가지다. 개념미술, 특히 언어를 주재료로 한 ‘언어조각’이 미술관의 널따란 공간에 아로새겨져 있는 풍경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주체적 대상’, ‘과정’, 동시적 현실’이란 주제 아래 작가가 만들어놓은 글자의 명확한 인지 속에 담긴 세상과 문화, 역사의 담론과 시선을 곰곰이 곱씹다 보면 마음이 금세 벅차 오른다. 미술관이 소장한 고미술 작품과 언어조각이 함께 전시된 공간도 백미였다. 이는 평소 작가의 지론을 따른 구성이기도 했다고.

국제갤러리 3관(K3) 알렉산더 칼더 개인전 설치전경 © 2023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여울 국제갤러리 <Calder>. ‘뮤지엄에서나 할 법한 전시인데?’ 어쩌면 이는 갤러리 전시에 던질 수 있는 최고의 한 마디가 아닐지. 올 상반기 국제 갤러리에서 진행한 알렉산더 칼더의 개인전을 보고 빠져나온 사람들의 입에선 저 말이 슬며시 터져 나왔다. 확실히 무균실과도 같은 K3 전시 공간에 중앙을 가로지르는 삼각 모양의 거대 가벽을 설치한 것은 ‘박력’이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 맞춰 갤러리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엔 이런 문장이 있다. “모빌의 독특한 생동력과 그로써 추동하는 공간적 역동성이 잘 드러나는 조각 전시.” ‘Fawn’ 등의 사색적 스탠딩 모빌을 감상하다 벽을 도는 순간 천장 공간을 채운 ‘Guava’가 명랑하게 흔들리는 극적인 장면을 마주한 이라면, 저 문장에 담긴 의미를 오롯이 알 수 있을 터다. 2003년부터 긴 시간 칼더 재단과 손잡아온, 긴밀한 협업자만이 할 수 있는 전시였다.

9. ‘K아트 시장’은 핫한데 과연 ‘K아트’도 핫할까?

박재용 한국에 있는 미술관과 옥션, 아트페어에서 이른바 ‘핫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들이 누군지 한번 살펴보라. 한국에선 오랫동안 미술 시장과 미술 기관, 미술 저널리즘이 마치 서로 발을 마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모인 이인삼각 달리기 주자처럼 엇박자를 내며 굴러왔다. 이 와중에 미술 시장에 관심 가진 이들은 늘어났고, 해외에 본사를 둔 글로벌 아트페어가 서울에 등장해버렸다. 기준은 올라가고 있는데, 과연 그걸 따라갈 준비가 되었는지는, 미술계 종사자라면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다.

이소영 개인적으로 K아트가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하고 있다고 본다. 그 예로 이미 해외 갤러리들이 올해 수많은 한국 작가를 영입했다. 리만 머핀은 성능경을, 타데우스로 팍은 정희민과 제이디 차, 스테판 프리드먼은 양유연, 페레스 프로젝트는 류예림과 함께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K아트 작가들도 선방하고 있다.

전여울 해외 메가 갤러리들이 너도나도 ‘서울행’을 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K아트 시장이 핫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그만한 이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한국의 실험미술가들이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LA 해머미술관을 순회한다는 것만 봐도 K아트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미술계의 시선을 거두고 보다 대중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도 여전한가? 돌이켜보면 백남준 이후의 큰 ‘임팩트’가 몇이나 될까 싶다. 종종 단순히 ‘-계’의 자화자찬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10. 서울에 지점을 둔 외국 갤러리 중 지금 가장 영리한 행보를 보이는 곳은?

페이스갤러리

박재용 ‘영리함’의 기준은? 이라고 되묻고 싶다. 다른 갤러리와 태생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곳을 하나 꼽자면, 페이스갤러리가 아닐까 한다. 페이스갤러리는 갤러리 창립자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운영하는 대신, 다음 세대의 젊은 대표가 ‘체계’를 갖추고 운영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혹자는 갤러리 창립자인 마크 글림처의 운영 방식이 카리스마적인 창립자 한 사람에게 크게 의존하는 기존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뜨거운 미술을 조금은 차갑게 다루는 페이스갤러리가 서울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이소영 콕 집어 어느 한 갤러리가 영리하다고 할 수 없다. 영리한 행보를 보인다고 결과까지 영리한 것은 아니니까. 진정성 있는 행보를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강보라 에스더 쉬퍼 작가군의 이름은 익숙하지는 않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인 이름이 대부분이고, 그들의 작품 세계 또한 다소 난해한 경우가 많다. 작년 경리단길 주택가에서 건물 한 채 규모로 오픈했지만 떠들썩한 오프닝 행사도 열지 않았다. 해외 갤러리들이 대대적으로 서울 진출을 알리고 잘 팔리는 스타 작가들의 전시를 선보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결의 행보를 이어간다는 인상이다. ‘이런 작품도 상업 갤러리에서 보여줄 수 있구나’라고 많이들 느끼는지 종종 대안공간이 아니냐는 질문도 받는다고. 상반기에는 최하늘, 전현선, 김택상 등으로 구성해 한국 동시대 미술을 조망하는 전시 <뒤집기>를 서울과 베를린에서 동시에 개최했다. 해외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판매한다는 서울 지점의 1차적 목표를 넘어 한국 미술계와 더 단단한 맺음과 기여를 고민하고 도모하고 있는 것이 ‘영리한’ 행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더 깊이 멀리 나아가는 갤러리로서의 존재감은 확실하겠다는 인상이 든다.

전여울 타데우스 로팍. 올해 첫 전시로 한국과 한국 디아스포라 작가 3인의 단체전 <지금 우 리의 신화>를 올려 조심스레 시장 분위기를 살피고 이후 9월 1987년생의 젊은 회화 작가 정희민과 소속 계약을 맺었다. 해외 갤러리가 한국에 입점했을 때 피할 수 없는, ‘그리하여 한국 미술계와 어떻게 상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어느 곳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응답했다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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