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다가 전 세계를 돌며 펼쳐온 현대문화 프로젝트 ‘프라다 모드’의 10번째 개최 도시로 서울을 선택했다.
때는 ‘프리즈 서울’로 이 도시가 열기로 가득하던 9월 초. 예술, 음악, 음식,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현지 고유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프라다 모드의 올해 주제는 다름 아닌 ‘영화’. 김지운, 연상호, 정다희 감독이 영화와 미술의 교집합을 사유하며 전시 <다중과 평행>을 채워갔다.
프라다 모드가 서울에 상륙했다. 2018년 시작된 이 이벤트는 마이애미, 홍콩, 런던, 파리, 상하이, 모스크바, 로스앤젤레스, 두바이, 도쿄를 거쳐 10번째 도시로 서울을 선택했다. 세계적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로 이 도시가 들썩이던 9월 5일과 6일, 프라다 모드가 펼쳐진 인사동 코트는 올해 이벤트 주제인 ‘영화’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다중과 평행>이라는 전시 타이틀 아래 영국 휘트워스 미술관 관장 이숙경이 큐레이터로 참여했고, 그녀가 직접 영화감독 김지운, 연상호, 정다희를 초대해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을 요청하며 프로젝트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프라다 모드의 원칙은 간단하다. 당대의 문화와 현대미술의 광범위한 조우다. ‘프라다 더블 클럽’이라 불린 초기 형태부터 이벤트는 포괄적이었다. 프라다 재단이 기획하고 독일 예술가 카르슈텐 횔러가 감독한 2008년, 2009년의 더블 클럽 행사는 예술과 음악, 음식, 엔터테인먼트가 조화를 이룬 다층적 이벤트였다. 장난스러운 대화형 조각품이 설치되고 레스토랑과 바, 댄스 플로어가 한자리에 뒤섞여 행사 공간을 찾은 이에게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 프라다 모드 서울의 모토 역시 다르지 않다. 이틀간 코트의 밤과 낮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예술에 관한 직간접적인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이 시도 되었고, 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예술적인 퍼포먼스와 전문가 대담의 자리가 마련됐다. 이숙경은 ‘무엇이 현재의 한국 문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시네마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 장르가 어떻게 미술적 맥락으로 전환될 것인지였다. 1층과 2층, 3층의 독립된 공간에서 전시에 참여한 영화감독들은 독자적인 설치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영화라는 키워드는 감춘 채 명백히 한국적인 공간과 어우러진 작업의 결과물이 드러났다.
영화 <달콤한 인생>(2005)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으로 해외 평단에서도 인정받은 김지운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평상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1층의 밝은 공간을 차지한 그의 전시는 직관적으로 ‘텔레비전은 망각을 낳고, 영화는 추억을 낳는다’는 장 뤽 고다르의 언급을 떠올리게 했다. 작가 특유의 장르적 습성은 지워지고, 물질적인 기억의 오브제로 전시관을 채웠다. 이 공간에 당도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아련한 과거를 들춰냈을 것이다. 가운데의 가장 넓은 평상을 중심으로추억이 박제되고, 익숙한 상황의 현실적 화면들이 캔버스 너머 망사 위로 프로젝션된다. 생각해보면 기이한 사소함이다. 과거의 물질이 단지 모기장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노스탤지어가 된다. 평상 위의 말린 고추와 양철 주전자, 동글동글한 모기약과 태극 문양의 부채가 갑자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던 중 어느 관람객이 살짝 모기장을 들춰 휴대폰을 들이댄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장치의 시적 힘이 감지된다. 저 얇은 천 조각은 세상을 분해하고 있다. 선풍기가 돌고 바람이 불면, 망사는 제각각 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풍경이 기억에 각인된다. 그런 면에서 저 푸른 물질이야말로 마음의 기억을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스크린에 투사된 모든 이미지가 매혹적이란 사실을 이 공간은 증명한다.
전시장 2층에는 단편 애니메이션 <움직임의 사전>(2019)으로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은 정다희 감독의 설치 작업이 자리한다. 그녀가 꾸민 공간의 타이틀은 ‘종이, 빛, 유령’. 전시장 입구에는 작가가 그린 드로잉이 설치되고, 그곳에서 고개를 돌리면 비디오 커튼 조각이 보인다. 물질의 비물 질화에 대한 연쇄는 그렇게 시작된다. 방금 본 종이 위의 그림은 스크린을 거쳐서 단단한 물질로 또다시 변화하며 흘러간다. 정다희의 작업은 현실의 한 단면에 집중해서 이를 고정시킨 뒤, 나머지 요소들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면서 진행되는 패턴을 보인다. 시간의 화살을 타고 프레임이 트래킹된다.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미묘한 시각적 변화가 매우 느린 움직임으로 화면에 포착된다. 그 순간의 확장과 기간의 축소, 두 가지 변주가 동시에 일어난다. 방 안에 있는 어떤 누군가는, 특정 공간을 지속적으로서 움직이며 작품의 반복적인 양상을 추론해냈을 것이다. 이 반복이 현실로부터 특정한 시간적 패턴을 끄집어낸다. 역사가 없고 과거도 없는, 따라서 미래도 보이지 않는 자율적인 시간의 형태가 비로소 인지된다. 정다희가 연출한 다중의 공간에서 우리는 시간의 조각을 발견한다.
한편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2021)으로 드라마까지 섭렵한 연상호 감독은 자신의 웹툰 속 한 공간을 코트의 3층으로 옮겨왔다. ‘지옥’이라는 명패가 붙은 세트장 입구에는 ‘고시원’이라 적힌 불빛이 반짝인다. 이 장소에서 사람들은 동일한 경험을 겪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이 마주하는 것은 좁고 긴 복도다. 이 복도를 걷는 과정에서 예외적인 경험은 허락되지 않는다. 꽤 많은 문의 손잡이가 시야에 들어오지만 모두 잠겨 있다. 연출자가 허락한 것은 오직 하나, 복도 끝의 하얀 공간뿐이다. 통제선이 쳐진 주인공의 방 역시 그저 눈으로만 관찰되는 현상의 일부다. 관람 시간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생각의 양상은 비슷해진다. 전시장의 좁은 복도는 이 현장의 원인을 직접 경험하게 만드는 영화적 트래킹 쇼트처럼 기능한다. 그 누구도 제어하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이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 면에서 이 작업은 운명적이다. 미술관에 놓인 영화 세트장을 통해 우리는 시니컬한 현실의 소용돌이를 목격한다.
명백한 기억의 오브제들, 시간의 입체 작업, 그리고 인지적 유형의 장치들이 프라다 모드 서울에 모였다. 세 명의 작가이자 감독이 채우는 아이러니한 즐거움은 이제 기억 안으로 봉인된다. 이 사라짐은 그럼에도 슬프지 않다. 어떤 은유적이고 심리적인 멜랑콜리도 이 이벤트의 즐거운 가벼움은 결코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지옥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면, 손에 음료를든 클럽의 친구들이 기다린다. 음악과 만난 현대의 라이프스타일, 예술과 디자인의 조화가 아름다운 빛을 낸다. 어떻게 보아도 허무할 수 없는 조합이다.
- 에디터
- 전여울
- 글
- 이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