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리즈 서울 가이드, 페이스

권은경

동시에 세 전시를 선보일 수 있을 만큼 큰 건물로 서울점을 확장한 페이스 갤러리는 순항 중

서울과 현대미술이 가장 뜨겁게 조우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작년 한국에 론칭한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2023년 9월 6일부터 9일까지 열리기에 앞서 분위기는 일찍부터 달아올랐다. 첫 번째 페어를 경험한 국내외의 모두가 그 활기찬 에너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120여 개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다. 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늘어난 숫자로, 갤러리들의 활동지는 지역별로 다양하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향력을 가진 메가 갤러리들의 경우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걸쳐 지점이 분포되어 있지만, 결국 한 갤러리의 태도와 성향은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더블유>는 미국 동부에서 출발한 두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와 페이스갤러리, 서부에서 출발한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 런던에서 출발한 화이트 큐브와 리슨갤러리를 비롯해 멕시코시티를 뿌리로 거점을 넓힌 쿠리만주토, 자카르타의 영 갤러리인 ROH, 그리고 한국의 중견 갤러리인 갤러리현대와 영 갤러리인 휘슬까지 두루 조명했다. 이 밀도 있는 프리뷰는 광활한 아트페어장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끄는 <더블유>식 가이드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이 탁월한 갤러리들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신의 현재가 조금씩 보인다는 점이다. 갤러리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서울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PACE 페이스

세계 미술 시장을 분명하게 ‘장악’하고 있는 갤러리들 중 한국 서울에 지점을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17년 작은 전시 공간으로 시작해, 2021년 동시에 세 전시를 선보일 수 있을 만큼 큰 건물로 서울점을 확장한 페이스갤러리는 순항 중이다.

로렌스 위너 ‘ON THE LINE OFF THE LINE’(2023)
제목과 내용, 형태가 일치하는 로렌스 위너의 작품은 이것이 문장인지, 그림인지, (작가의 말대로) 언어를 재료로 쓴 조각 작품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LAWRENCE WEINER, ON THE LINE OFF THE LINE, 1997/2023 SCULPTURE, LANGUAGE + THE MATERIALS REFERRED TO DIMENSIONS VARIABLE, NO. 88646 © LAWRENCE WEINER ESTATE, COURTESY PACE GALLERY

“국제적인 아트페어가 열리면,
좋은 갤러리와 컬렉터뿐 아니라 미술 기관과 미술계 사람들이 모이게 되거든요.
그럼 여러 도시에서 모인 많은 미술계 사람들이 한국 미술을 발견하고 새롭게 알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죠.”

-이영주 페이스갤러리 서울 디렉터

“9월 초는 정말 좋은 시즌이에요.” 탁 트인 창 너머로 키 큰 가로수가 적당히 시야를 차단하는 오피스에서, 이영주 페이스갤러리 서울 디렉터가 말한다. “여름에 일본에서 열리는 도쿄 겐다이가 로컬 아트페어 분위기로 자리 잡은 건 시기 문제 때문이에요. 국제적인 규모로 사람들이 모이기에는 여름휴가 시즌과 겹치니까요. 작년에는 프리즈 서울 첫해이기도 해서 굳이 와보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은 관객이 올 거라고 봅니다. 서울이 국제적인 도시로 부상하기도 했고요.” 이영주 디렉터의 말처럼, 작년 9월 론칭한 프리즈 서울은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숨 가쁘게 오가며 벌어지는 아트 마켓 캘린더에 새로운 목적지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6월 중순 열리는 아트바젤을 마치고 여름휴가와 함께 긴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갤러리 관계자 및 컬렉터들은 프리즈 서울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9월의 프리즈 서울과 뉴욕 아모리쇼 이후 10월엔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 플러스가 이어달리기 경주를 하듯 개최된다.

페이스갤러리의 올해 프리즈 서울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 로렌스 위너(1942~2021)와 함께하는 시간이 될 예정이다. 로렌스 위너는 무엇보다 ‘언어’를 작품의 재료로 삼은 개념미술가로, 세계대전 이후의 허무를 뚫고 작가로 성장하며 물질적 제약 너머 개념 자체의 예술을 모색한 ‘예술가들의 예술가’다. 개념미술의 주요 작가로 떨친 명성과 반세기 넘게 후대 작가들에게 미친 큰 영향력에 비해 위너의 작품은 아시아권에서는 그리 많이 소개되지 못했다. 페이스갤러리는 프리즈 서울에서 작가의 1997년 작품 ‘ON THE LINE OFF THE LINE’을 선보이며, 동시에 2016년 작품 ‘PEELED PAST THE CORE’로 한남동 갤러리 건물 외벽을 장식한다. 마침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프리즈 서울 오픈에 앞서 8월 31일부터 로렌스 위너의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내년 1월 28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에서는 그간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위너의 작품을 폭넓게 선보인다. 페이스갤러리는 최근, 로렌스 위너 에스테이트(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관리 하는 주체)와 협의를 거쳐 아시아권, 특히 한국에서 작가와 관련된 판매, 전시 등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위너의 작품에 관심 있는 한국이나 아시아권 컬렉터에게는 좀 더 쉽게 작품을 수집할 수 있는 문이 열린 셈이고, 전시를 통해 위너의 개념적 작업을 소개하고 싶은 아시아권 큐레이터나 미술관에도 반가운 소식이다. 사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회고전은 페이스갤러리와 작가의 에스테이트가 공식적으로 협업 관계를 맺기 전부터 시작 된 프로젝트지만, 페이스갤러리가 서울에 지점을 둔 덕에 준비 과정이 조금은 수월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로버트 나바
‘Chariot Armor’(2023) 152.4 121.9cm.
낙서를 그리기라도 한 듯 거친 모습의 그림은 어릴 적 보드게임이나 동화책에서 한 번쯤 보았을지도 모르는 기호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ROBERT NAVA CHARIOT ARMOR, 2023, PAINTING, ACRYLIC, MICA, AND OIL ON CANVAS 60″ × 48″(152.4CM × 121.9CM), NO. 86447,
©ROBERT NAVA, COURTESY PACE GALLERY, PHOTO BY KRIS GRAVES

아트페어와 갤러리에서의 전시, 이와 동시에 일어나는 미술관 전시는 과감하고 빠른 움직임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술은 대체로 긴 시간이 소요되는 비즈니스다. 작가와 신뢰를 쌓고 함께 일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페이스갤러리는 함께 일하는 작가들과 수십 년에 걸쳐 관계를 맺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1960년 아르네 글림처가 갤러리를 설립한 이후 올해로 63년째를 맞이하는 페이스갤러리는 알렉산더 칼더, 장 뒤뷔페, 바바라 헵워스, 아그네스 마틴 등 여러 작가와 수십 년 넘게 인연을 맺었다. 보스턴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이 갤러리는 이제 뉴욕뿐 아니라 런던, 홍콩, 제네바, 팜비치, LA, 서울까지 전 세계에 여덟 개 전시장을 운영한다. 때로는 짧은 기간 동안 임시로 공간을 빌려 운영하는 등 공간의 실험에도 비용을 아끼지 않는 페이스갤러리가 서울에 둥지를 튼 건 지난 2017년. 처음엔 한남동의 한 빌딩 4층에 오피스 공간 겸 뷰잉룸에 가까운 작은 전시 공간을 열었고, 이후 세 개의 전시를 동시에 선보일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넉넉한 건물로 갤러리를 확장한 때는 4년 넘게 서울이라는 도시를 파악한 뒤인 2021년이었다.

6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갤러리의 시간 감각은 모든 것이 급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서울이라는 도시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페이스갤러리가 한국에 서울 지점을 내기 전부터 함께 일해온 이영주 디렉터는 프리즈 아트페어가 하나의 종착점이나 출발점이 아닌, 일종의 ‘중간적 도약점’이라고 말한다.

전시 하나를 지원하고 오픈하기까지 수년이 걸리기도 하는 것처럼, 아트페어 역시 팡파르를 부는 몇 년의 기간을 지나 좀 더 차분한 연례행사로 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또한 아트페어의 본질은 갤러리가 잠재적 구매자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지만, 작품을 파는 쪽도 사는 쪽도 그저 돈이 오가는 거래를 위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중요한 건 페어장과 갤러리 안에서 일어나는 미술품 거래만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는 계기’다. “국제적인 아트페어가 열리면, 좋은 갤러리와 컬렉터뿐 아니라 미술 기관과 미술계 사람들이 모이게 되거든요. 여러 도시에서 모인 많은 미술계 사람들이 한국 미술을 발견하고 새롭게 알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죠.” 프리즈 서울 기간을 전후로 들썩일 서울의 미술 신과 그 주변은 ‘미술 시장만이 아니라 한국의 공간, 한국의 문화를 보여줄 장소’가 된다. 그리고 이런 데서 곧바로 눈에 드러나지는 않을 수많은 관계가 형성된다. 낮에는 각자의 일에 전념하느라 교류할 기회가 없는 갤러리스트들은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마련한 디너나 파티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페어를 계기로 서울을 방문한 컬렉터나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등은 행사장 밖에 있는 작은 독립 미술 공간이나 작가 스튜디오를 찾아 나설 것이다.

키키 스미스
‘LIght of Nature Ⅲ’(2021) 41.3 57.2cm.
 긴 세월 몸의 문제에 천착한 키키 스미스는 자연과 우주, 영성으로 주제를 확장하고 있다.
KIKI SMITH, LIGHT OF NATURE III, 2021, CYANOTYPE AND ACRYLIC ON LOSIN PRAGUE PAPER 16-1/4″ × 22-1/2″ (41.3 CM × 57.2 CM),
NO. 85494 © KIKI SMITH, COURTESY PACE GALLERY PHOTO BY MELISSA GOODWIN

조엘 샤피로 ‘Untitled’(2023) 36.8 20.3 41.9cm. 조엘 샤피로는 삶에서 마주치는 많은 형상을 단순화한 기하학적 형태로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이는 작가가 70년대 초부터 꾸준히 탐구 중인 주제다. JOEL SHAPIRO, UNTITLED, 2023 WOOD AND OIL PAINT, 14-1/2" × 8" × 16-1/2" (36.8 CM × 20.3 CM ×41.9 CM), NO. 87603, © JOEL SHAPIRO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ARS WILL PROVIDE)

조엘 샤피로 ‘Untitled’(2023) 55.9 48.3 17.8cm. 조엘 샤피로는 삶에서 마주치는 많은 형상을 단순화한 기하학적 형태로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이는 작가가 70년대 초부터 꾸준히 탐구 중인 주제다. JOEL SHAPIRO, UNTITLED, 2023 WOOD AND OIL PAINT, 22" × 19" × 7" (55.9 CM × 48.3 CM × 17.8 CM), NO. 87604, © JOEL SHAPIRO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ARS WILL PROVIDE)

그것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페이스갤러리와 함께 일하고 있는 키키 스미스의 경우처럼, 수십 년 이어지는 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치른 키키 스미스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Light of Nature’ 연작 가운데 몇 점을 선보인다. 이제 노년의 작가는 오랜 시간 탐구한 ‘몸’이라는 주제를 넘어 영성과 신비로움까지 아우르며, 앞으로 쉽게 볼 수 없을 연작을 만들었다. 페이스갤러리와는 2022년부터 함께하고 있는 이건용의 작품도 갤러리 부스에서 만날 수 있다. 로렌스 위너, 키키 스미스와 같이 서구 미술사의 성좌에서 별이 된 작가들의 작품과 호흡을 맞출 듯한 기세라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마침 프리즈 서울 개막 직전인 9월 1일부터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을 다룬 전시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이 열린다. 이건용은 이 전시의 참여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밖에 이번 페어에서는 색과 형태, 움직임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1941년생의 미국 조각가 조엘 샤피로의 소형 나무 조각, 그리고 요시토 모나라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미술사 교과서에 이미 한 페이지씩 자리 잡고 있을 법한 작가만 페이스갤러리 부스에서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프리즈 서울에서 신작을 공개하는 로버트 나바는 1985년생으로, 갤러리가 소개하는 다른 작가들처럼 미술사가들의 연구나 미술관 전시를 통해 호출된 적이 많지 않은 작가다.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 석사학위를 땄지만 미술 교육을 통해 자신에게 ‘주입된’ 것들을 의식적으로 해체하는 로버트 나바의 삐뚤빼뚤한 그림은 로렌스 위너의 개념적 언어 작품, 줄리언 슈나벨이 깨진 도자기 조각과 유화로 만든 강인한 회화처럼 미술관이나 전시 도록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작품들 사이에서 경쾌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나바의 작품은 프리즈 서울 기간과 겹쳐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도 나라 요시토모, 데이비드 번의 작품과 함께 소개된다.

이미 여러 갤러리와 컬렉터에게 주목받은 로버트 나바가 페이스갤러리에 합류한 시점은 비교적 최근인 2020년이다. 나바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마크 글림처 회장은 작가의 스튜디오를 직접 찾아가 납작한 스마트폰 화면이나 컴퓨터 모니터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나바 작품 특유의 감각을 확인했고, 이를 통해 이 젊은 작가는 페이스갤러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어쩌면 서울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프리즈 서울의 기간은 나흘에 불과하지만, 아트페어의 막전 막후에서 마크 글림처 같은 세계 톱 아트 딜러가 로버트 나바의 스튜디오를 찾아간 것과 같은 작은 우연들, 미술사를 장식한 로렌스 위너의 대규모 전시를 뒤늦게나마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만남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길 기대해보자. 빠르면 내년 프리즈 서울에서, 혹은 수년 안에 어느 미술관에서 우리 모두가 그 결과를 누리게 될지 모른다. 갤러리 입장에서 이것은 수십 년을 넘게 이어질 또 다른 작가와의 관계의 시작일 수도 있다. “프리즈를 마치 올림픽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프리즈가 아트바젤과 함께 전 세계 아트페어를 양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홍콩이 아닌 다른 아시아 도시에서 그런 아트페어가 열렸다는 건 굉장히 주목할 만한 이슈이고,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줄리안 슈나벨
‘Trees of Home (for Peter Beard) 4’(2020) 182.9 152.4cm.
45년 넘게 친구로 지낸 사진가 피터 비어드를 기린 작품. 캔버스와 깨진 접시를 결합해 친구가 떠난 뒤에도 묵묵히 남은 나무를 묘사했다.
JULIAN SCHNABEL, TREES OF HOME (FOR PETER BEARD) 4, 2020 OIL, PLATES AND BONDO ON WOOD,
72″ × 60″ (182.9 CM × 152.4 CM), NO. 86722, © JULIAN SCHNABEL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ARS WILL PROVIDE)

2023 프리즈 서울 가이드, 메리 웨더포드

2023 프리즈 서울 가이드, 화이트 큐브

에디터
권은경
박재용(통번역가, 독립 큐레이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