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가 로랑 그라소의 개인전 <아니마>

전여울

현실과 꿈 사이를 부유하는 듯한 불가사의한 세계관을 펼친 로랑 그라소와의 대화

프랑스 예술가 로랑 그라소는 개인전 <아니마>를 통해 현실과 꿈 사이를 부유하는 듯한 불가사의한 세계관을 펼친다. 2021년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전 <미래가 된 역사> 이후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개인전 <아니마> 현장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로랑 그라소.

< W Korea> 아티스트에게 명함을 처음 받아본다.

Laurent Grasso 원래는 없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러 번 전시하다 보니 명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아시아에선 첫 만남에서 명함을 필수적으로 주고받던데?(웃음)

하하. 6월 17일까지 페로탕 도산파크에서 개인전 <아니마>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선 프랑스 알자스 지역 생트오딜 산의 신화적, 지질학적 현상에 주목한 영상 작품 ‘아니마’(2022)를 선보인다. 실제 작품의 촬영 장소이기도 한 생트오딜 산을 주목한 계기는 무엇인가?

생트오딜 산은 19세기부터 성 오딜을 기리는 영구적 숭배가 행해져온 순례지다. 성 오딜은 맹인으로 태어나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은 알자스 지역 수호 성인으로, 생트오딜 산 꼭대기에는 그를 기리는 수도원이 자리한다. 작가로서 특정 장소에서 발산 되는 힘, 에너지, 역사성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생트오딜 산은 특히나 우주론적 이야기가 담긴 곳이란 인상이 있었다. 수 세기 동안 의식이 치러진 영적인 장소였을 뿐 아니라, 예부터 매우 강력한 우주-대지의 해류가 통과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지구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엔 ‘이단의 벽’이라는 석조 요새가 산을 에워싸며 약 11km에 걸쳐 뻗어 있는데, 13세기 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과거에 지어진 이 벽에서 과학자들은 자성이 감지된다고도 전한다. 한 마디로 신화적, 지질학적, 영적인 힘이 교차하는 장소인 셈이다. 하나의 장소가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적 호기심이 발동한 것 같다.

영상 작품 ‘아니마’(2022).
작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한다.
ADAGP, PARIS, 2023. ANIMA, 2022, FILM HR, 18’14’’. © LAURENT GRASSO

영상 ‘아니마’에서 택한 독특한 편집 및 촬영 기법이 눈에 띈다.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인간, 여우, 바위 등이 등장하는데, 각 대상의 시선에서 바라본 풍경이 혼재되어 있는가 하면, 라이다(LiDAR·3차원 레이저 시스템) 스캐너를 활용해 나무와 돌의 내부를 투시하는 등 인간의 시각을 넘어서는 장면도 등장한다. 그 결과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동물에서 식물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전이가 발생하는데, 이런 접근법을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스테디캠을 주로 사용하되 인간의 눈으론 볼 수 없는 것, 세상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3D 라이다 스캐너, 오버헤드 카메라 등을 활용했다. 그래서 영상에선 어딘가 비현실적인 움직임이 자주 포착된다. 우리가 산을 오를 때 으레 보게 되는 풍경이 아니라, 상하좌우가 반전되거나 물질을 통과해 바라본 관점이 영상에 등장하는 식이다. 기본적으로 ‘아니마’는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작업이다. 그리고 이는 예술의 본질적 의미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평소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정작 그 실상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예술의 역할은 본인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새롭게 일깨워주고 한 번 더 관찰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종의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아니마’ 얘기로 돌아와, 우리는 같은 인간일지라도 사는 지역과 환경에 따라, 부족에 따라 자연과 문화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나. 나아가 과거까진 인간이 꽃이나 나무, 동물 등을 정복할 수 있으며 그들을 계급화, 체계화하려 했다면, 이젠 자연과 동물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시대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인간과 비인간, 식물과 동물 등의 관점을 혼재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도 지성이라 할 만한 그들만의 내면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아니마’ 영상 앞에서 VR 체험을 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만큼 몰입적으로 다가온 작품인데, 언젠가 전시장에 VR 기기를 비치해 관람하도록 할 계획은 없나?

아쉽지만 없다(웃음). 일단 도구 사용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관객이 VR 기기를 착용하는 순간 ‘이건 어떤 기술을 사용해 구현한 거지?’에 관람의 초점이 맞춰진다. 관객이 작품을 통해 어떠한 물리적 경험을 하느냐가 나의 작업에선 상당히 중요하다. 내 작업은 대다수 과학, 사회학, 철학적 연구에 기반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이들을 단지 감각적으로 경험해볼 것을 제시한다. 그런데 요즘 시대 예술을 보면 너무나 많은 개념이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면 관객들은 경험할 수 없고, 감각할 수 없으며, 어떠한 생각도 떠올릴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여우를 품에 안고 있는 어린 소년을 형상화한 조각 ‘아니마’(2023).
ADAGP, PARIS, 2023. ANIMA, 2023, BRONZE, 130 X 44 X 30CM.
PHOTO: TANGUY BEURDELEY. © LAURENT GRASSO

청동으로 제작한 작품 ‘파놉테스’(2022). 나뭇가지 끝에 여러 개의 눈이 달린 형상이다.
PANOPTES, 2022, BLACK BRONZE, 90 X 105 X 15CM.
PHOTO: TANGUY BEURDELEY. © LAURENT GRASSO

예술이 예술 밖의 세상에 무엇을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흔치 않은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 예술은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도 시간을 초월해 간직되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지금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예술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최근 당신을 놀라게 했던 뉴스는 무엇인가?

어젯밤 본 뉴스다. 프랑스 우주비행사 토마스 페스케가 발견한 것으로, 보통 태평양에서만 생성되는 사이클론이 최근 대서양에서 엄청난 규모로 발생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 사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중간에 구멍이 하나 있고, 이를 엄청나게 거대한 구름벽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작가로서 무엇을 회의하나?

가식적인 태도. 인생은 짧은데 가식으로 삶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예술가들도 가식으로 무장해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작품을 표절하는 게 정말 싫다.

지금 스스로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무엇인가?

‘나의 최고의 작품은 이미 탄생했을까? 아니면 앞으로 탄생하게 될까?’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에디터
전여울
사진
최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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