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만난 고상지와 박준면

전여울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와 배우 박준면의 인연은 다소 독특하다. 음악으로 돌연 시작되어, 음악으로 이윽고 무르익은 두 사람. 그녀들의 변주와 같은 만남은 올해 서울재즈페스티벌에서 펼쳐질 참이다.

왼쪽 박준면이 입은 블랙 원피스는 줄라이칼럼, 스트랩 샌들은 막스마라 제품.
오른쪽 고상지가 입은 블랙 튜브톱 드레스는 전연주, 롱 슬리브 톱은 뮈글러, 메탈 장식 샌들은 마이클 코어스 제품.

<W Korea> 두 분이 함께 서울재즈페스티벌 3일차 무대에 서죠. 반도네온 연주자와 배우의 만남, 다소 낯선 ‘투샷’입니다. 어떤 인연으로 이번 합동 무대를 꾸리게 됐나요?
고상지 사실 예전부터 준면 씨를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준면 씨가 재즈 피아니스트 곽정민의 연주에 맞춰 스탠더드 재즈 넘버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반했거든요. 노래를 무척 잘 하시더라고요. 그것도 너무. 오래전부터 박준면이란 배우는 알고 있었는데, 그런 소울을 가진 분이라곤 생각도 못했죠. 투박하면서도 무심히 ‘툭’ 던지는데 ‘탁’ 하고 나오는 그 느낌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걸 본 후로 언젠가 같이 무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배우다 보니 왠지 개런티가 높을 것 같아서 선뜻 연락을 못 드리겠더라고요 (웃음). 그러다 작년 가을쯤 제가 섭외차 연락을드린 적이 있어요. 마침 예산이 넉넉한 공연 행사
가 하나 잡혀서(웃음).

박준면 어휴, 안 비싸요!(웃음) 제가 곽정민 씨에게 재즈 피아노 레슨을 받거든요. 평소 ‘Lullaby of Birdland’나 ‘My Funny Valentine’ 같은 곡을 합주하다 즉흥적으로 인스타그램에 20~30초짜리 영상을 올리곤 했어요. 그걸 상지 씨가 본 거예요. 그런데 아쉽게 작년 가을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죠? 지금은 한창 뮤지컬 <맘마미아>로 바쁘지만, 그땐 뮤지컬 <미세스 다웃 파이어>로 옴짝달싹조차 못하던 시기여서.

그러다 마침내 올해 서재페로 두 분의 진짜 인연 시작되는군요.
고상지 그렇죠. 작년 서재페 당시엔 첼리스트 홍진호, 포레스탈라의 테너 조민규 씨까지 투 게스트로 무대를 꾸려서 올해는 게스트 없이 혼자 무대에 설 계획이었어요. 그러던 참에 지난 3월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 준면 씨가 올린 글을 본 거예요. 올해 서재페 티케팅에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다는. 그때 번뜩 떠올랐죠. ‘오, 그럼 이참에 함께 무대를 해버리면 어떨까?’

박준면 저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1일 차에 공연하는 그레고리 포터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웃음). 그런데 10분 만에 티켓이 매진되는 걸 보면서 아쉬워하던 차에 상지 씨로부터 인스타그램 DM이 온 거예요. “안녕하세요. 저 고상지입니다”로 시작하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 DM을 캡처해 저장해뒀어요(웃음).

화이트 플러피 셋업은 민유림,
화이트 스퀘어 토 뮬은 마이클 코어스 제품.

결국엔 인스타그램이 맺어준 인연이네요.
고상지 제가 이래서 인스타그램을 끊고 싶어도 못 끊습니다(웃음). 박준면 하하. 제가 언제 서재페 같은 무대에 서보겠어요. 상지 씨 덕분에 꿈같은 무대에 서게 된 셈이에요. 무대에서 입으려고 잘 아는 의상실에서 드레스도 하나 맞췄어요. 심플한 블랙 드레스로.

이번에 두 분이서 채울 무대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됩니다.
박준면 이번에 두 곡을 불러요. 하나는 에스트렐라 모렌테의 ‘Volver’인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귀향>의 주제곡이기도 해요. 스페인어 가사라 뜻도 모르는데 굉장히 오랫동안 흠모해온 노래였어요. 마치 버킷리스트처럼 언젠가 꼭 한 번 불러보고 싶은 곡이었다고, 제가 상지 씨에게 강력히 주장했죠. 다른 하나는 제가 아는 유일한 탱고인 피아졸라의 ‘길 잃은 새(Los pajaros perdidos)’ 예요. 우연히 1980년대 피아졸라가 일본에서 진행한 라이브 실황을 담은 CD를 구매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처음 듣고 반한 곡이에요.

2014년 박준면 배우는 싱어송라이터로 변신해 앨범 <아무도 없는 방>을 발매했죠. 전곡 작사, 작곡해 9개 트랙으로 앨범을 채웠는데, 그해 한 신문사에서 <아무도 없는 방>을 ‘2014년 가장 과소 평가된 앨범’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박준면 2014년은 제가 마흔을 1년 앞둔 해였어요. 일 없고, 돈 없고, 남자가 없던 시기기도 했죠(웃음). 그 당시 자주 가던 술집이 있었는데 뮤지션 강산에 오빠도 그 집의 단골이었어요. 오빠가 술김에 ‘준면아 너도 노래 만들어봐!’라고 던진 말이 왜인지 심장에 확 와닿았어요. 역시 헝그리 정신이 중요한지, 그땐 건반 앞에 앉으면 노래가 뚝딱 나오더라고요. 생애 첫 자작곡 ‘낮술’을 포함해 9개 곡이 모였고, 정규앨범을 냈죠. 음악 전공자가 아님에도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순전히 오랫동안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인 듯해요. 지금도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는데 360GB가 모자랄 정도고요. 또 워낙 어릴 때부터 뮤지컬을 해왔는데 뮤지컬에선 정말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야 하거든요. 재즈부터 록, 클래식까지. 그게 알게 모르게 산공부가 된 듯해요.

지금이나 당시나 흔치 않은 ‘어덜트 컨템퍼러리’ 장르의 음반이었는데, 당시 평단으로부터 호평이 잇따랐다 들었습니다.
박준면 에이, 제 딴엔 힘을 줬는데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예산이 5000만원뿐이었는데 친한 뮤지션 동료들이 헐값에 발 벗고 도와줬어요. 밥이라도 좋은 것 먹이고 싶은 마음에 제작비의 절반이 밥값, 술값에 든 것 같아요(웃음). 대출받아 음반을 만들었지만 저는 그때의 제가 참 좋았어요. 배우 생활을 할 땐 100~200명이 넘는 스태프들 앞에서 항상 밝음을 유지한 채 있어야 해요. 그런데 음악을 하니까 ‘나’가 ‘나’인 채로만 존재하면 되더라고요. 2014년 앨범을 발매하고 홍대 벨로주에서 쇼케이스를 했는데 그때 앙코르 한 곡 안 불렀어요. 멘트도 안 쳤고요. 저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나 이런 사람이야. 실은 나 되게 우울한 여자야. 이런 얘기를 내가 음악으로 하고 있잖아. 더는 나한테 물어보지 마. 그냥 들어!’의 느낌이었달까요(웃음).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박준면 배우 자택에 있는 CD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하던데, 거기엔 고상지 연주자의 음반도 있을까요?
박준면 그럼요. 2014년 상지 씨가 발매한 1집 <Maycgre 1.0>도 소장하고 있어요. ‘찐팬’의 입장에서 상지 씨만큼 성실한 뮤지션은 없다고 생각해요. 상지 씨 덕에 반도네온이란 악기의 매력에 눈뜨기도 했고요. 뭐랄까, 반도네온은 분명 건반 악기임에도 마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잖아요. 악기를 접었다 펼 때마다 바람이 ‘슉슉’ 불기도 하고요.

패치워크 패턴의 베스트와 미디스커트,
메탈릭 펌프스는 모두 메종 마르지엘라 제품.

고상지 연주자는 어쩌다 처음 반도네온을 만나게 됐나요? 탱고 불모지에 가까운 국내에서 반도네온이란 낯선 악기를 고상지 연주자 덕에 알게 된 이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김창완밴드의 ‘시간’, 김광석 20주기 추모 앨범 <김광석, 다시> 등에 참여 한 바 있죠.
고상지 대학생 때 밴드 동아리를 했어요. 여러 악기를 조금씩 익히다 어느 날 탱고 음악을 접했는데 모르는 악기 소리가 들려온 거죠. 그게 반도네온이었고요. 사실 반도네온 연주를 업으로 삼고 싶을 만큼 이 악기를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국내엔 작곡도, 연주도 능한 분들이 많지만 그들 모두가 음악만으로 별탈 없이 생계를 유지하진 못하잖아요. 저는 어쩌면 ‘블루오션’이라 느껴서 반도네온을 택했죠(웃음). 처음엔 독학 아닌 독학으로 연주를 익혔어요. 학교가 대전에 있었는데 언젠가 취미로 재즈 색소폰을 하는 외국인 교수님과 함께 대전 번화가에서 버스킹을 했어요. 그때 지나가던 학교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의 반도네온 거장인 료타 고마츠에게 메일을 보냈죠. ‘한국에서 혼자 열심히 연주하는 여자애가 있는데 선생님이 파이팅해주면 그녀가 기뻐할 것이다.’ 이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일본으로 떠나 그분께 반도네온을 배웠죠. 3개월에 한 번 가서 3주씩 머무는 식으로. 한국에 있을 땐 아르바이트를 하고요.

반도네오니스트로서 처음 돈을 번 공연을 기억하나요?
고상지 2005년 연주를 시작했으니까 2006년쯤이었을 거예요. 이태원에 있는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공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거든요. 처음 3만원으로 시작했다가 5만원, 7만원으로 일당이 오른 기억이 있네요. 어느 날에도 평소같이 연주를 하는데 엄청나게 우아하신 할머니께서 제게 오셔서 손을 붙잡고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어요. ‘아가, 연주는 너무 좋은데 시끄러워요.’(웃음)

하하. 2014년 정규 1집 <Maycgre 1.0>의 경우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천원돌파 그렌라간>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따 앨범명을 지었죠. 2017년엔 만화 <헌터×헌터>에서 모티프를 얻어 <Tears of Pitou>를 완성하기도 했고요. 유독 애니메이션에서 출발한 음악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상지 어린 시절 지상파에서 <아벨탐험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같은 TV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OST가 너무 좋았어요. 또 갓난아기 때부터 드래곤 퀘스트 같은 RPG 게임에푹 빠져 살아서인지 그때 질리도록 들은 애니메이션, 게임 속 음악이 알게 모르게 제 뼛속까지 깊이 침투한 듯해요. 어릴 땐 만화와 게임상 전투, 던전 신에서 흐르는 배경음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흥분 되는 기분이 막연히 좋았는데, 훗날 그 음악들의 코드 진행이 피아졸라의 것과 유사하다는 걸 알면서 탱고에 빠지기도 했고요. 어쩌면 유년기 좋아 했던 애니메이션, 게임이 제 음악적 뿌리라 할 수 있죠.

올해부터 앞선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를 재해석하는 프로젝트 ‘El Homenaje’를 전개한다 들었습니다. 프로젝트의 첫 문을 여는 동명의 싱글 ‘El Homenaje’를 올해 4월 발매했고요. 바흐의 ‘Invention’ 시리즈 중 한 곡을 재해석한 곡이었는 데, 프로젝트의 첫 주자로 바흐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고상지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80~90년대 RPG 게임 음악이에요. 그 시절 RPG는 주로 성에서 주인공이 왕의 명을 받아 모험을 떠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성에서 흐르는 음악의 다수가 바로크 음악이에요. 드래곤 퀘스트도 예외 없이 게임상 성에서 흐르는 음악이 바흐의 ‘Invention’ 시리즈 중 하나와 상당히 유사하죠. ‘El Homenaje’ 프로젝트를 통해 앞으로 다양한 음악가를 다루게 될 것 같아요. 바흐, 쇼팽부터 정재형 등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어 ‘Homenaje’는 존경을 뜻하죠. 그렇다면 두 분이 오래도록 흠모하고 존경한 음악가는 누구인가요?
고상지 저는 무조건 이분입니다. <에반게리온>의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

박준면 엘라 피츠제럴드. 특히 전성기 앨범을 들으면 ‘신들렸나?’ 생각이 들어요. 스캣할 때 보면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들고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맑죠. 하이 테크닉을 구사하는데 맑은 사람은 엘라 피츠제럴드가 유일한 것 같아요.

머지않아 서재페가 개막합니다. 뮤직 페스티벌을 즐기는 두 분만의 기막힌 방법은 무엇인가요?
고상지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웃음). 늘 제 무대를 준비하느라 혼이 쏙 빠지곤 해서 제대로 즐긴 경험이 없네요. 즐기는 건 20년 후에나 가능할 것 같아요. 제 코가 석 자라. 박준면 별거 있나요? 음악을 즐기러 거금을 들여 황금 같은 주말에 페스티벌에 온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 삶을 충분히 행복하게 누리고 사는 분입니다.

자유를 노래하는 밴드 새소년

뮤지션 이승윤의 서사

장기하식 리듬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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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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