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페 두배 즐기기 위한 사전준비

권은경

2023 서울재즈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세르지오 멘데스, 미카 그리고 그레고리 포터와의 인터뷰

일 년 중 서울 동쪽의 너른 잔디 공원이 가장 음악적으로 물드는 날. 제15회 서울재즈페스티벌(Seoula Jzz Festival)이 역대 최다 아티스트와 함께 흥과 멋과 감격을 선사한다.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올림픽공원 내 야외와 실내, 수변무대 등에서 국내외 뮤지션 60팀의 뜨거운 공연이 펼쳐진다. ‘바로 이것이 음악 축제’임을 보여줄 그 시간을 더욱 알차게, 또 취향대로 즐기기 위한 안내서를 <더블유>가 마련했다.

그레고리 포터

낙관주의자의 마음

2014년 앨범 <Liquid Spirit>과 2017년 <Take Me To The Alley>로 그래미를 두 차례나 수상한 재즈 보컬. 노랫말을 알 수 없어도, 그 노래에서 따뜻함과 신실함이 느껴지는 묵직한 사람. 그레고리 포터는 ‘계속해서 사랑받고 싶다’고 한다. 2015년 서재페로 처음 내한했을 때를 두고 ‘젊은 친구들이 내 노래를 따라 불러주는 건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특별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고 회상하면서.

<W Korea> 최근 2년 사이, 당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

그레고리 포터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일하지 못했고, 내 동생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낙관주의가 약간 흔들렸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을 휴식기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애도와 슬픔의 시간이었다. 재밌는 것은 내가 직업적으로 멈춘 그 시기에 어둠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것이 음악이었다는 사실이다. 팬데믹 직전에 만든 음반인 <All Rise>의 수록곡 몇 개는 팬데믹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한 내용이다. 내가 쓴 메시지가 결과적으로 나의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당신은 어머니를 향한 각별한 마음을 여러 인터뷰에서 드러냈다. 어떤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나?

어머니는 훌륭한 스승이셨다. 사람들을 돕겠다는 신념을 가진 영혼이 충만한 여성이었고, 극단적인 낙관주의자이기도했다. 우리 집은 부동산 사업을 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부서진 집에 들어갈 일이 종종 있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이 집을 고칠 수 있어’라고 하면 우리는 ‘안 돼, 절대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옆에서 어머니는 이런 식이었다. ‘그래, 우리가 고칠 수 있어.’ 그러고선 도움이 필요한 마약 중독자, 매춘부, 알코올 중독자 등을 찾아 거리를 뒤지셨지. 와우. 나도 그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낙관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 노래 ‘Take Me To The Alley’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머니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나는 어머니 정도까지는 절대 도달하지 못할 거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재즈를 뭐라고 설명하나? 1976년 그래미에서 멜 토메가 엘라 피츠제럴드에게 이 질문을 했을 때 엘라는 대답 대신 스캣을 시작했는데.

재즈는 정말 개방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한 음악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면 그 음악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볼 수 있다. 재즈가 배타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사실 다양한 문화에 개방적인 음악이 재즈다. 다양한 리듬과 다양한 사운드가 존재하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물론 팝 음악에도 사용된다. 가스펠 음악을 부르며 자랐고, 소울 음악을 좋아하며, 싱어송라이터가 된 나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릴 적 음악으로 인해 스파크가 튄 적이 있나? 그레고리 포터 비긴스’라고 할 만한 순간 말이다.

내가 마마보이였을 때, 교회에서 솔로곡을 부르는데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시고 교회 사람들도 흥분하는 모습을 본 적이있다. 그때 ‘와, 음악의 힘 좀 봐’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엔 형제가 8명이나 있으니, 어머니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열세 살 때쯤인가 변성기를 지나 노래할 때면 울림과 힘이 느껴졌다. 내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래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 건 슈퍼스타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 프로 뮤지션이 되겠다는 생각은 대학 졸업 후 에야 했고, 그 무렵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게 음악을 권장하셨다. “음악을 잊지 마. 음악을 잊지 말렴. 네가 하는 일 중 가장 좋은 일이야.” 오랜 시간 가난하게 살아온 내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어머니가 주신 셈이다.

1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내 노래를 통해 지난 인생에 있었던 몇몇 문제를 해결하는 중’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더라. 그러면서 아버지, 인종차별 문제, 어린 시절에 겪은 두려움 등을 살짝 언급했는데 과연 어떤 사연인지 들어보고 싶다.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이 일어나고 내가 스스로 분석한 뒤에 결론에 도달한 건데, 뭐 이런 거지. 사람들이 ‘노래하는 목소리는 어디서 났어요?’ 라고 물어보면 이제 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대답한다. 평생 아버지가 내게 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비로소 그런 깨달음에 이르렀달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게 없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게 뭔가를 주셨다고 말하는 건 내 내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셨지. 무대 위의 나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면, 내가 시와 목소리에 재능이 있다면, 아버지에게 공을 돌릴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용서하는 게 된다. 나는 많은 곡을 쓰는데, 그 근본적인 의미와 이면의 의미는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의 순간이나 관련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거다. ‘Painted On Canvas’도 그런 곡이고, ‘Our Love’는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쓴 곡이다. ‘1960 What’도 그렇고, 인종차별에 대한 기억과 그 에너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 ‘No Love Dying’도 마찬가지. 부정적인 에너지에 맞서 싸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Painted On Canvas’ 같은 곡은 한 발짝 물러서서 내 관점을 감상하자는 생각으로 쓴 경우다. 모든 사람을, ‘아름다움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피부색으로만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먼저 인정하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안 그러면 좀 별로다.

유명 재즈 뮤지션들이 ‘재즈는 왜 인기가 없어졌을까’라는 물음에 답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히트 앨범 <Liquid Spirit>을 보유한 그래미 수상자로서 당신은 이 물음에 뭐라고 대답하겠나?

댄스 스타일은 변한다. 청년들의 관심사도 변하고. 우리는 세대에 따라 변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변화가 며칠, 몇 주 단위로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이 뒤집힌 거다. 문화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예술이 옷차림, 옷감 등 모든 것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한 장르가 세월이 지나도 정적으로 보존되고, 또 리스너들과 여전한 관련성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현대의 이야기, 현대의 정치적 메시지, 현대의 리스너와 관련 있는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 곧, 살아있는 음악이어야겠다. 중요한 것은 음악의 유산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콘을 기념하고 모방하되,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가 계속 연주하면 대중 문화도 따라올 거다. 재즈는 사라지지 않고 많은 이들의 삶 속에 있으며,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욘세도 한 적이 있는 걸. 저스틴 팀버레이크나 케이티 페리도 한다. ‘빅 밴드 곡이 필요한데?’ 하면서 만들곤 하는 거지. 아델도 그녀가 원한다면 재즈 가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당신이 음악계의 한 전설적인 아티스트에게 궁금한 한 가지를 질문한다면, 뭘 물어보고 싶나?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주제의 깊이와 폭에 매료되었다. 버트 배커랙(Burt Bacharach)의 음악이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테마를 생각해내고 멜로디에 맞춰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음악이 탄생했지? 사실 이젠 그 이유를 알겠다. 음악의 완벽한 순간은 마법과 같다. 나는 그가 고인이 되기 전까지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마법을 믿으시나요?’ 라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아티스트가 몇 명 더 있다. 완벽한 멜로디. 그리고 그 멜로디 위에 얹어진 완벽한 시. 정말 대단하다.

음악 외 관심사는 뭔가?

요리, 클래식 자동차를 좋아한다. 전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 자동차 박물관이나 경매장 같은 곳에 들르려고 하는데, 보기만 할 뿐 구매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주 작은 컬렉션으로 집에 다섯 대 정도는 두고 손을 본다. 그림에서 영감을 받고, 박물관도 아주 좋아한다. 두뇌가 확장되는 기분을 즐겨서. 노래는 뭐 거의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려서, 박물관에서 조용히 하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내 가슴에 이런 문구가 쓰인 띠를 둘러주면 좋을 것 같다. “이 사람에겐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서재페를 통해 당신에게 더욱 관심 갖게 될 한국 독자를 위한 질문이다. ‘그레고리 포터를 잘 느낄 수 있는 세 곡’을 꼽아본다면?

‘Hey Laura’, ‘No Love Dying’, ‘Liquid Spirit’. 세 곡 모두 낙관주의와 사랑에 관한 노래다. ‘Hey Laura’는 아직 로라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로라가 돌아올 거라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이건 지나친 낙관주의, 아마도 조금은 병적인 낙관주의다. ‘No Love Dying’의 경우 앞으로도 계속 반복하게 될 내 메시지가 담겼다. ‘Liquid Spirit’은 물을 사랑의 은유로 사용한 곡이다.

참, 당신은 늘 니트 모자를 쓴 채 사람들 앞에 등장한다. 그 모자와 한 몸이 되었나?

음, 나 말고 이런 모자 아무도 안 쓰지. 그렇다, 사람들이 늘 궁금해한다. 10년 전부터 이 스타일을 고수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이게 내 스타일이고, 내 공연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모자를 쓰고 바다에서 수영을 할까? 샤워할 때도 모자를 쓸까? 아니다. 하지만 이 모자를 쓰면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이제 모자를 벗으면 나도 내 자신을 거의 알아보지 못하겠다.

소리 질러! ‘서재페’는 못 참지

세르지오 멘데스

오, 세렌디피티!

1941년 브라질 태생인 세르지오 멘데스가 모던 재즈의 본고장이며 보다 자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60년이 흘렀다. 2000년대 이후에는 윌 아이엠, 저스틴 팀버레이크, 에리카 바두, 커먼 등과 협업하며 브라질의 리듬을 동시대적으로 변주해왔다. 피아니스트로서, 또 작곡가로서 그는 평생 35개 이상의 앨범을 녹음했고, 2020년엔 앨범 <In The Key Of Joy>를 냈다. 이 거장은 자기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로 ‘세렌디피티’를 꼽는다.

<W Korea> 초여름부터 내년 초까지 공연 스케줄이 꽤 촘촘하다. 요즘 어떤 날을 보내고 있나?

세르지오 멘데스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서 감사해하며 지낸다. 나는 화창한 LA에서 내 뮤즈이자 오랜 기간 리드 싱어로 활동한 아내, 그라시냐 레포라시와 산다. 자식과 손주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여행이나 공연 일정이 없을 때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왕성하게 투어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우선 충분히 자야 한다. 신선한 망고처럼 맛있는 열대 과일과 커피, 베이글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지. 실내 자전거로 운동하고, 최대한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칭을 많이 한 다음, 오후에는 책을 읽으며 쉰다. 이른 저녁에 친구나 가족과 함께 이탤리언, 프렌치 음식과 와인을 즐기는데, 물론 매일 밤 그러는 건 아니다. 투어 중에는 최대한 제대로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건 정말 짜릿한 경험이어서 가능한 한 오래, 계속 공연하고 싶다!

과거 당신이 어떤 전설들과 연주하고 공연했는지 소개해줄 수 있나? 요즘 구글과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으니까, 1990년대생 독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 인생에는 정말 놀라운 순간이 가득하다. 행운이지. 아름다운 공연과 작업이 많이 떠오르는데,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프랭크 시내트라와 작업한 거다. 그와 함께 투어했다. 공연을 하면서도 내가 프랭크 시내트라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정말 멋진 연주자이자 가수이고, 그만큼 멋진 인간이자 친구였다. 내 커리어에서 최고의 경험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60여 년 활동한 아티스트는 지금 음악에 관해 어떤 화두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날 많은 음악에 멜로디가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멜로디 없는 노래는 내 마음속에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기억에 오래 남지 못하고 잊히지. 나는 거슈윈, 콜 포터, 최근 세상을 떠난 버트 배커랙, 그리고 위대한 스티비 원더와 같은 작곡가들의 멜로디가 그립다. 그들의 음악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멜로디 때문이다.

음악을 하면 할수록 당신이 깨우친 ‘음악에 관한 진실’은 뭔가?

공연할 때면 내 자신과 동료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냥 음악을 받아들여라.’ 그게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노래에 진심을 다하고 즐겨야 한다. 자신을 즐길 것. 또 놓아 버릴 것(Let It Go).

긴 음악 인생에서 특별히 결정적인 순간을 꼽자면?

‘세렌디피티(우연)’는 내 인생에서 엄청난 역할을 했다! 기억에 남는 매우 뜻깊은 순간은 허브 앨퍼트(Herb Alpert)와 제리 모스(Jerry Moss)가 레이블 오디션 세션에서 우리 밴드를 발견하고서 계약을 추진한 때다. 그들의 레이블인 A&M 레코드와 내 오리지널 밴드인 세르지오 멘데스&브라질 ’66이 계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우리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 사이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만남은 윌 아이엠이 내 앨범을 한 아름 안고 우리 집에 찾아 왔을 때다. 내 음악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려주었지. 예상치 못한 그 방문에서부터 우리의 우정도, 매우 즐겁고 의미있는 협업도 시작되었다.

1960년대 미국의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당신의 밴드가 연주하는 영상을 봤다. 사회자가 세르지오 멘데스&브라질 ’66을 두고 ‘뉴 사운드’라고 소개하던데, 당시 미국 분위기는 어땠나?

보사노바의 물결이 미국과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었다. 너무 기뻤다. 60년대 초반 뉴욕에 머물면서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보사노바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모든 라디오 방송국에서 조빔의 ‘Desafinado’와 ‘Girl from Ipanema’를 틀었을 거다. 그 곡들은 전 세계의 모든 위대한 재즈 연주자와 가수들 에게 영향을 미쳤다.

음악 외 관심사는 뭔가?

음악 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지만, 축구를 좋아한다. 전 세계의 경기를 즐기고 있다. 음식도 좋아하는데, 특히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는 데서 흥미를 느낀다. 한국에 가면 한국 음식 먹는 것을 즐긴다. 나는 와인을 사랑하고, 인생도 사랑한다.

서재페에서 만날 관객에게 미리 한 말씀을 !

서재페에 다시 참여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번 무대에서는 우리 공연 때면 관객들이 가장 많이 요청하는 음악인 브라질 ’66의 모든 클래식을 연주할 예정이다. 나는 서울에서 만날 관객들처럼 전 세계의 관객과 함께 오래된 곡, 새로운 곡, 최고의 히트곡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미카

자유의 다른 말, 미카

꼬박 7년 만에 미카가 한국을 다시 찾는다. 그사이 미카는 마치 일기장과도 같은, 그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음악을 여럿 발표했다. 어쩌면 그 음악들은 미카가 자신과 ‘화해’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써 더 솔직하고, 자유로워진 미카는 서울재즈페스티벌 1일 차 무대에 헤드라이너로 서며 우리 앞에 선다.

<W Korea> 서울재즈페스티벌로 7년 만에 한국 관객을 다시 만난다. 지난 2020년 3월 월드투어 ‘Revelation’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을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공연이 취소된 적 있다. 오랜만의 내한인데 소감이 어떤가? 

MIKA 지난 7년이라는 긴 시간 사이 모두가 알다시피 팬데믹이 닥쳤고 공연 문화가 많이 변했다. 온라인에서 가수와 팬이 유대를 쌓는 것이 제법 흔한 일이 되지 않았나.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차가운 쇼가 아닌,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번 무대는 한국 관객과의 오랜만의 재회이기도 하니 아주, 아주, 아주 인터랙티브한 공연으로 꾸릴 예정이다. 관객들 앞으로 걸어가 음악으로 이런 얘기를 건넬 거다. ‘좋아요, 우리 대화합시다. 내가 뭘 할 건지 보여줄 테니, 당신도 뭘 할 건지 보여주세요!’

‘Revelation’ 투어는 2015년 4집 <No Place In heaven> 이후 무려 4년 만에 발매한 5집 <My Name is Michael Holbrook>을 기념해 진행됐다. 언젠가 당신은 5집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잃지 않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담은 앨범’이라 설명한 적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인지하든 못하든 성장하고 나이가 들면서 ‘절제된 어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휩싸이지 않나. 물론 책임감 있게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 가지고 있던 순진무구함을 조금은 허용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어렸을 땐 자신에게 엄격하거나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함에야말로 마법 같은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항상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습 중 하나는 펜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결과물을 정말, 정말, 정말 자랑스러워하라고 조언한다. 그런 다음 두어 시간 정도는 결과물을 보관하고, 이후 백만 조각으로 찢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비록 남들 눈엔 초라한 결과물일지라도 그 과정의 작은 제스처가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킬 진정한 순간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될 테니까.

당신의 본명을 직접적으로 지시해 <My Name is Michael Holbrook>이란 앨범 제목을 지었다. 미카와 마이클 홀브록은 서로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오, 세상에! 우선 마이클은 주차위반 딱지나 가스 요금, 전기세 고지서를 받을 때 보는 이름이다. 즉 돈을 내야 하거나 곤경에 처할 때마다 마이클 홀브룩 페니맨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셈이다(웃음). 반면 미카는 자유를 뜻한다. 음악이고, 예술이고, 퍼포먼스다. 둘은 DNA야 같겠지만 사실 모든 면에서 정반대고 바로 이 지점이 나에게 해방감을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사실 5집은 어머니가 긴 시간 투병하다 돌아가신 후 세상에 나온 앨범이다. 돌이키면 어머니와 늘 함께였다. 7세 때부터 하루 4~5시간씩 어머니가 날 트레이닝시켰고, 8세 때부터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적어도 토요타 프레비아를 타고 어머니와 유럽 전역을 돌았을 거다. 어쩌면 어머니는 나에게 음악을, 가수란 직업을 주신 분이나 다름없다. 한편 아버지와는 늘 떨어져 지냈고 소원한 관계였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 같다. ‘좋아요, 당신은 제 안에서 무엇인가요?’ 마이클 홀브록 페니맨 주니어로서,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5집은 ‘나’와의 화해라고 불러도 좋을 거다.

4집 <No Place In Heaven>을 기점으로 당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더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있다. 그렇기에 차기 앨범에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지금 준비 중인 앨범에 대한 힌트를 준다면?

글쎄, 차기 앨범은 ‘빠른 속도(High Velocity)’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빠른 속도에 힘입어 노래를 듣는 순간 다른 에너지 상태로 진입하게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 중이다. 그래서 작업할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너무 ‘쿨’해지려고 하거나, 라디오 친화적으로도 작업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인지 요즘 피아노 앞에서 혼자 작업을 많이 한다. 그 순간엔 완전히 ‘나’ 자신이 되어 무아지경에 빠져서 모든 즐겁고 행복한 우연이 담긴 곡을 쓸 수 있으니까. 아마 올해 말, 새 앨범을 들을 수 있을 거다.

최근 당신의 인스타그램에서 블랙핑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반가웠다. 함께 협업해보고 싶은 K팝 뮤지션이 있나?

사실 10년 전에도 K팝 뮤지션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때 당시 주변에서 “안 돼, 너무 상업적이잖아”라며 하도 말려서 “아니, 근데 정말 재미있잖아?”라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지만. 그런데 이제는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블랙핑크든 BTS든 K팝 슈퍼스타를 향한 세계 각국의 뜨거운 반응이 너무 놀랍다. 이런 현상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것 같다. 비욘세 콘서트에서도 이토록 뜨거운 에너지는 못 봤으니까. 음악과는 별개로 시카고의 15세 아이, 파리의 30세 어른, 스웨덴의 할머니까지 동시에 사로잡은 K팝의 요소는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K팝 뮤지션만큼 각자 고유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제시하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 온라인에서 보고 경험하기에 최적화된 시대이지 않나. 지구 멀리서도 그들이 음악, 비주얼,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세계관을 보고 희열하지 않을 이는 극히 드물 거다.

그래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K팝 뮤지션은?

지금은 그저 구경꾼이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웃음)

당신을 마이크 앞에 서게 만드는 순간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느껴지나?

없다! 정말 재미있는 건 수십, 수백 번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항상 다른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뮤지션은 마지막 공연으로 그 자신이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가 마지막 공연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래서 나에게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은 항상 신성한 일처럼 다가온다. 비로소 내가 변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가끔 젊은 뮤지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건들건들 마이크를 쥐면 정말이지 화가 난다. ‘미쳤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곤 한다. “당신이 지금 그 물건을 손에 쥘 땐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당신이 목소리를 실어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하기 위해 선택한 물건인 셈이니.”

뮤지션으로서 당신이 고수하는 철칙은 무엇인가?

즐길 것,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즐길 것.

머지않아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 선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서울에서 휴식을 보낼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

우선 평소 먹고 싶었지만 참아온 한국 음식을 잔뜩 먹을 거다(웃음). 또 한국 전통 직물을 좋아한다. 20년 동안 개인적으로 수집해온 것 같다. 서울에 올 때면 항상 전통 직물을 취급하는 곳을 찾아 비단이며 삼베를 산 기억이 있다. 그걸 재료로 직접 옷을 만들기도 했다. 이번에도 직물점에 들르고 시간이 남는다면 글쎄,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전에 한국을 방문한 때가 마침 정월 대보름이었는데 한복을 입고 고궁을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마치 회색 도시 속에 피어난 꽃잎 같달까. 이번에도 산책을 하며 이 도시를 좀 더 탐험해보고 싶다.

뉴진스 민지 서재페 특별판 커버

빈지노가 7년만에 앨범을 낸다

에디터
권은경,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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