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씨피카의 차원

권은경

한국 음악의 바운더리가 더 넓어지면 좋겠다는 씨피카가 말하는 그의 음악

가수, 프로듀서, 혹은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공감각적 심상의 음악을 선보이는 씨피카.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보편적인 감정도, 과학과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도, 씨피카를 통과하면 하나의 차원으로 어우러진다.

컷아웃 드레스는 한 코펜하겐, 보디 체인 주얼리는 그레테 앙리 제품.

<W Korea> 유튜브에서 ‘씨피카’를 검색합니다. 씨피카의 뮤직 비디오나 공연 영상을 보죠. 어느 순간, 익숙지 않은 차원으로 이동한 듯한 나를 느껴요. 정신도 좀 몽롱한 것 같고.

Cifika 좋게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그만큼 몰입했다는 거니까.

씨피카의 음악이 그렇게 만들어주죠. 그렇다면 너무 좋네요. 얼마 전까지 미국에 있었다고요?

네, 3월에 앨범이 나왔을 때도 미국에 머물고 있었어요. 텍사스에서 열리는 SXSW(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 2023에 참가했거든요. 이번이 공연을 위해 세 번째로 간 SXSW예요. 작년에도 참가했고요.

멋진 미디어 페스티벌이죠. 저를 알딸딸하게 만든 영상 중 작년 SXSW 당시 촬영된 영상도 있네요. 씨피카는 우영미 의상을 입고, 어두운 공간에서 하이드로 복스(Hydro Vox)라는 이름의 공연을 했어요.

그 공연 장소가 교회였어요. 그즈음이면 오스틴의 시내 전체가 축제 기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그렇게 공연장으로 오픈해줘요. 꽤 큰 공간이었는데 공연 반응이 좋고 관객이 많아서 입장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하이드로 복스는 제가 오디오 비주얼 프로젝트로 몇 번 선보인 적 있는 공연이에요. 커다란 원통형 구조물 안에서 저는 노래를 하고, 원통 구조에 맞게 프로젝트로 계속 영상을 투사하기 때문에 공연장이 암전 상태여야 해요.

그 공연 연출은 구조물을 스크린 삼아 물결이나 빛이 씨피카의 주변에 일렁이는 느낌이라 신비로워요. 심해 생명체가 부유하는 듯한 순간도 있죠. 그런 공연을, 성스러운 교회에서…(웃음).

외계인의 음악 같은 무엇을 불렀죠(웃음). 공연을 위해 높이 3m 정도의 원통형 구조물을 설치했는데, 그 위치 바로 위에는 엄청 큰 십자가가 걸려 있었어요. 그 장면이 참 아름다워요.

2021년 11월 아르코 미술관에서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라는 전시를 할 때, 오프닝 퍼포먼스로 역시 암전 상태에서 그 공연을 하셨죠. 국립현대미술관이 팬데믹 기간 동안 진행한 비대면 온라인 공연 프로젝트 ‘MMCA 라이브’도 흥미롭게 봤어요.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씨피카의 음악이 만나니 색달라요.

‘MMCA 라이브’를 여러 뮤지션이 했는데, 제 차례 전에는 기리보이와 페기 구의 공연 촬영이 있었을 거예요. 관계자가 누군가로부터 저를 추천받았다고 해요. 저도 미술관 측에 얘기했어요. 한국에 저 말고도 일렉트로닉 아티스트가 많으니 이러이러한 팀과도 꼭 해보시면 좋겠다고.

음악이 부리는 마술 중 하나가 청각적 요소인 소리로 공감각적 심상을 일으킨다는 점이에요. 씨피카는 특히 시각의 음악화, 음악의 시각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걸 아주 좋아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리된 거예요. 배워서 알고 제 몸에 익힌 걸 음악으로 옮기는 셈이죠. 저는 미대를 나왔어요.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고, 그림이나 시각적인 것을 만드는 경험과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요. 음악에 대해선 그렇지 못했고요. 음악은 독학했거든요.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미술로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라는 식의 말씀을 자주 해주셨지만, 저는 미술 천재 쪽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이 세뇌한 건데(웃음).

자란 환경이나 재능에 있어서 예술과 관련된 배경이 있었나요? 아니, 이번 정규앨범 제목이 <이온(Ion)>이고 양자 중첩 현상 같은 과학 분야에 관심 많은 뮤지션이니, 그와 관련한 배경을 물어 봐야 할까요?

주변에 과학 쪽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참 좋아요. 엄마는 예술에 관심 많고 예술을 존경하는 주부세요. 제가 여러 예술을 접하며 자라도록 해주셨죠. 아빠가 반도체 관련 일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집 안에 전자기기가 많긴 했어요. 인터넷이 막 보편화되기 전부터 인터넷으로 동영상 보는 법이나 웹사이트에 등록하는 법을 알려주셨죠. 초등학생 때도 휴대폰 최신 모델을 사용했고(웃음). 기기에 친숙해요. 테크라는 개념이 이른 시기부터 제 안에 들어왔어요.

전자 음악 요소는 이제 K팝에서도 필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소리인데, 이 장르에 대해선 유독 ‘쉽지 않다’라는 오해나 편견이 있다고 느끼나요?

네. 그래서 씨피카, 라고 하면 ‘어려운 음악 하는 뮤지션’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나봐요. 고민을 많이 합니다. 곡을 더 단순하게 써보기도 하고요. 아마 제 패션에서 보이는 면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는 오해가 더 생겼나 싶어요.

뮤직비디오만 봐도 씨피카의 스타일이 평범하지 않기는 하죠(웃음). 유니크함을 추구한 결과인가요?

그렇죠. 이번 앨범 타이틀곡인 ‘허쉬’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직접 제작한 의상이나 학생들 작품을 입었어요. 액세서리 역시 동묘에서 산 재료로 만들었고요. 뮤직비디오는 제 예술 세계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통로잖아요. 기성복에 나를 맞춰 등장하기보단 최대한 특별한 저를 보이고 싶죠. 매거진 화보나 라이브 콘텐츠에서의 모습은 성격이 좀 다를 수 있겠지만요.

장갑은 톰 브라운, 톱은 펜디 제품.

로고 프린팅 톱과 스커트, 레깅스, 펌프스 힐은 발렌티노 제품.

음악적으로는 고민을 거쳐 어떤 결과에 이르렀나요? 최근 발매한 <이온>은 두 번째 정규앨범이에요.

일단 아주 팝적인 구성이에요. 당분간 실험적인 음악은 안 할 거예요. 실험 같은 건 훗날 팝 음악을 아주 잘 만들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도전해보고 싶어요. ‘허쉬’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도 K팝을 전문으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온 ‘세가지 비디오’의 김현수 감독님을 찾았어요. 저의 제일 좋은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인 댄서 아이반과 함께하는 안무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이건, K팝이에요!(웃음)

팝적인 음악이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한 음악이라고 한다면, 그를 위한 공식은 뭔가요?

팝에는 꽤 명백한 요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코드 구성이 아주 심플하고, 반복되는 멜로디가 많고, 따라 부르기에도 쉽도록 멜로디에 사용되는 음폭이 너무 넓지 않게. 곡의 흐름도 인트로와 아웃트로, 벌스, 후렴, 브리지 식으로 딱딱 나눌 수 있죠. 벌레로 치면 그 한 마리가 머리, 몸통, 다리로 부위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처럼.

음악 얘기하면서 비유를 벌레로 드는 거예요? 아, 파충류에도 관심 많다는 거 알아요.

사람에 비유하자니 더 징그러울 것 같았어요(웃음). 그렇게 곡의 덩어리들을 팝음악에서 잘 보이는 구조로 구성했다는 말이죠.

앨범 커버에는 연금술사로 변신한 씨피카의 모습이 보입니다.

연금술사는 여러 물질의 화학적 조합을 통해 금을 만들어내요. 중세시대의 과학자죠. 저는 감정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고 싶어요. 어떤 감정을 느끼든지 그걸 성장 에너지로 변환시킬 줄 아는 사람. 어떤 일을 겪어도 그 영향으로 자꾸 다운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계기로 다시 튕겨 올라가듯 제자리를 회복하는 사람. 이번 앨범에 담고자 한 건 그런 ‘회복탄력성’이에요. 부정적인 감정도 결국 금처럼 만들고 다루고 싶다는 점에서 연금술사 캐릭터를 떠올렸어요.

당신은 감정적인 사람인가요?

저는 감정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할 때, 대부분 감정에 따르는 판단을 해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걸요?

‘나는 선택을 내릴 때만큼은 이성과 논리를 따르는 사람.’ 이렇게 믿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요!

인정하기 싫고, ‘나는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논리와 이성을 따른다고 생각할 때도 자신의 아주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내가 그것으로 인해 기쁜가, 슬픈가’에 대한 문제가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모든 감정을 잘 다루고 연마할 줄 알면 좋겠죠.

다양한 감정은 곧 다양한 상태를 말해요. 물질의 상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분자나 원자가 변화무쌍하게 움직인다는데, 감정을 화두 삼은 씨피카의 앨범에 그 주제와 거리가 먼 듯한 ‘이온’이라는 단어가 왜 쓰였는지 알 것 같아요.

양가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거나 행동을 하려면 감정이 필요한데, 감정이란 게 양가적일 때가 있죠. 사랑에 빠지면 내가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그 감정으로 인해 사람이 변해요. 동시에 상대를 잃을지 모른다는, 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기도 하고요.

최근에 펑펑 운 기억이 있나요?

‘펑펑’까지는 아니지만, ‘허쉬’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울어버렸어요. 자유롭게 안무를 하는데 그 순간의 내가 너무 좋더라고요. 사실 최근 몇 년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시기를 보냈어요. 꽤 긴 시간이었네요. 비로소 새 출발을 한 게 작년부터예요. 이번 앨범은 제가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낸 앨범입니다. 준비 과정에서 ‘대중적이지 못하다’, ‘메이크업이 좀 어글리해 보인다’ 같은 말을 들을 일 없이 오로지 내가 원하는 메이크업과 차림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던지.

속상하거나 슬퍼서 운 게 아니라, 감정이 벅차올라 울었군요.

독립적으로 앨범을 만든다는 건 제가 누군가의 서포트를 받기보다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이게 설득해야 한다는 거고, 모든 자금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에요. 모든 과정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임해왔어요. 그런데 촬영 중간에 의상 상태를 봐주던 스타일리스트 친구가 ‘너 방금 정말 예뻤어. 우리 다 놀랐어. 여
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하면서 우는 거예요! 저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이자 가까운 친구들은 제가 지나온 힘든 시기를 아니까 슬픈 상황이 아닌데도 울음이 나온 거죠. 그때부터 저도 눈물이 나왔어요. 지켜보던 감독님을 비롯해 주변 모두가 그 분위기에 젖어서는… 현장의 모두가 신경망처럼 연결되는 듯한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컷아웃 장식의 드레스와 벨벳 케이프, 슈즈는 톰 포드 제품.

2020년 <더블유>와 인터뷰했을 때, 김창완을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죠. 산울림의 ‘청춘’을 씨피카 스타일로 소화한 ‘Youth’를 발매하기 전 그를 만났는데 ‘노래 부를 땐 예쁘게 불러야지, 슬프게 부르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었다고요. 예쁘면서 슬픈 보컬의 순간 역시 슬픔이라는 감정과 듣기 좋은 미감이 공존하는 성격 같네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부른다고 해서 슬픈 노래가 완성되는 게 아니라, 낼 수 있는 최대한 예쁜 목소리로 불러야 슬픈 거라는 말씀. 그 점을 여전히 제 노래에 적용하고 있어요. 억지로 감성을 강요하는 스타일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목소리는 기본적인 제 목소리로 가되, 코드나 소리 등 작곡 면에서 어떤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려 해요.

음악이든 비주얼이든, 씨피카가 좀 더 대중적인 이름이 되기 위해 고민하다 보면 결국 자주하게 되는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여러 고민과 변화 속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심지에 대한 결론 말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저는 현재 팝 음악을 좋아하고 그를 추구해요. ‘대중음악’에 포함되고 싶다는 것과는 좀 달라요. 어떤 음악을 하든 아티스트에겐 최소한의 스타일이라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보여주고 싶고 말하고 싶은 거, 자신 안에서부터 표현하고 싶은 거요.

씨피카의 음악이 K팝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하나가 되길 바라나요?

저는 늘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저를 사용하고 싶어요. 한국 음악이라는 범위가 있다고 하면, 그 한가운데에 있기는 싫어요. 가장자리에 있고 싶어요. 저 하나로 인해 한국 음악의 바운더리가 더 넓어지면 좋겠거든요.
예를 들어 국내 음원 플랫폼에서 가사가 없는 음원은 메인 페이지에 노출이 불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장르 카테고리 구분에서도, 플랫폼에 따라 일렉트로닉 장르만 있지 그 안에 일렉트로닉 팝이라는 하위 장르는 없는 경우도 있고요. 청자들이 다양한 음악을 들으려면 그 다양한 음악이 눈 앞에 쉽게 놓여야 좋을 텐데, 아쉬워요.

원의 중심부보다 둘레 쪽에 위치하는 음악가. 그 사람의 방향에 따라 원이 점점 커질 수 있겠군요. 어느 바운더리의 외연을 확장시키면서, 다양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네, 제가 그거 하고 싶어요. 다양성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길 원합니다.

프릴 장식 보디슈트와 시어한 드레스, 장갑은 톰 브라운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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