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린이 들려주는 자연의 표정

전여울

예술가이자 건축가, 환경운동가인 마야 린은 오랜 시간 ‘물’을 탐구했다. 자유자재로 어디로든 흘러드는 물은 마치 우리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과연 무엇이 경계인가?’

“오늘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1947년 미국 스미스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됐어요. 중국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그해 어느 어둑한 밤, 코트 자락에 단돈 20달러만 지닌 채 상하이 항구에서 마지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한 밀항 끝에 마침내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죠.” 올해 2월 초 예술가이자 건축자, 환경운동가인 중국계 미국인 마야 린(Maya Lin)은 홍익대학교 강의실 연단에 서 있었다. 지난 3월 11일까지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개최한 국내 첫 개인전 <Nature Knows No Boundaries>로 한국을 찾은 그는 촉박한 일정에 잠시 짬을 내 한국의 대학생들 앞에서 그의 작업들에 대해 말했다. 마침 강의용 슬라이드엔 그가 2021년 진행한, 그녀 어머니의 모교이기도 한 스미스대학 닐슨 도서관의 재설계 작업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강의실을 메운 20대의 파릇한 청춘들, 마야 린은 그들과 같은 대학생 시절 자신의 존재를 미국 전역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1981년, 예일대 4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21세의 마야 린은 워싱턴 D.C.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를 위한 디자인 공모에서 1,400여 명을 제치고 우승한다. 2007년 미국 건축가 협회(AIA)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 10위에 꼽힌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하지만 공개 당시만 해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각 75.21m 길이의 두 화강암 벽이 V자를 그리며 만나고, 칠흑 같은 벽 위로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5만7,939명의 이름을 아로새긴 기념비. 드넓은 대지를 따라 마치 바짝 땅에 엎드린 양, 그런 한편 한껏 벼린 V자 형태로 완성된 기념비는 마치 칼로 땅을 베어 사상자가 겪은 고통, 상처를 직시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전쟁의 승리보다 개개인의 생을 추모하는 명상적 기념비는 위풍당당하거나 웅장한 디자인의 기존 기념비들과는 완연히 다른 꼴이었고, 이를 두고 당시 다양한 말이 쏟아졌다. 기념비를 눈높이 아래 땅속 움푹한 위치에 비치한 것은 ‘희생자들의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이라는 비평은 예사였고 여성, 학생, 중국계 인물이 어떻게 남성, 군인, 미국인을 위한 기념비를 디자인할 수 있느냐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물론 마야 린은 그즈음 <워싱턴 포스트>와 나눈 인터뷰에서 당시의 숱한 손가락질에 맞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지만. “저는 단지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3월 11일까지 페이스 서울에서 개최한 ‘Nature Knows No Boundaries’의 전시 풍경.

마야 린의 작업은 앞서 언급한 기념비부터 건축 프로젝트, 대규모 환경 예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 작업까지 포괄한다.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진행한 개인전 <Nature Knows No Boundaries>는 마야 린의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엿보는 자리로, 3월 11일까지 그가 오랜 시간 몰두해온 ‘물’에 대한 탐구를 담은 설치 및 조각 작품 10여 점이 전시됐다. 홍익대 강연을 마치고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더블유>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녀는 “지난 서울 여행에서 맛있는 차와 꽤 괜찮은 마스크팩 몇 장을 챙겼어요(웃음)”라고 입을 뗀 후 건축가와 예술가 사이의 줄다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건축이 소설이라면, 예술은 시와 같아요. 둘 다 창조적 행위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건축은 타인을 위해, 예술은 나 스스로를 위해 하는 작업이죠. 그런 점에서 예술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비로소 무한한 선택의 자유 앞에 서야 하니까요.” 이번 개인전을 제목으로 풀이하자면 ‘자연은 경계를 모른다’일 것이다. 마야 린에게 자연, 그중에서도 특히 ‘물’은 국가 또는 영토를 나누는 경계 등 인간이 만든 구성물을 거스르거나 초월하는 존재다. 나아가 액체, 기체, 고체 상태 모두로 존재할 수 있는 물의 유연한 성질은 그녀를 빠르게 매료시켰다. “물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은 데에는 물이 가진 아름다운 속성에 주목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물에 얽힌 유년기의 기억이 크게 작용했어요. 유년 시절 오하이오주의 한 마을에서 자랐는데 당시 집 뒤로 큰 숲이 있었고, 그곳에는 아름다운 개울이 3개나 흐르고 있었어요. 개울은 제 놀이터나 다름없었죠. 그런데 나날이 개울은 오염되어 갔고, 그 심각성이 어린 제 눈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어요. 인간에 의해 물이 얼마나 오염되고 낭비되는지를 똑똑히 목격한 거죠.”

물이 만나 이루는 거대한 줄기, 강은 어쩌면 자연이 만드는 그림이자 오늘날 기후 변화의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 마야 린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개인전 <Nature Knows No Boundaries>에서도 드로잉과 조각의 경계에서 강을 표현한 다수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전시의 백미로 꼽힌 신작 ‘Silver Tigris & Euphrates Watershed’(2022)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반짝이는 재활용 은을 소재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상징하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을 표현했다. “초기 미국 정착민은 강에서 수많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풍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져요. 그들은 물고기 비늘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을 보고 ‘달리는 은(Running Silver)’이라 표현했어요. 너무 아름다운 비유죠. 강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깨닫게 된 이후 양쯔강, 콜로라도강, 허드슨강, 템스강 등 전 세계 주요 수로를 조사해 이를 반짝이는 재활용 은으로 표현하는 일련의 작업에 몰두했어요.” 전시장에서는 임진강과 한강을 표현한 두 작업도 소개됐다. 수천 개의 스테인리스스틸 핀을 벽에 부착해 완성한 ‘Pin Gang – Imjin and Han’(2022)은 물길의 분산을 나타낸 두 강의 3차원 초상화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작품 ‘Marble Han River Dam’(2022)은 동그란 유리구슬들로 구성돼 마치 강이 범람하는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어쩌면 한반도의 남북을 가르며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이야말로 ‘경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자연의 상징이지 않을까. 작가는 분단 이전 지도까지 참조하며 두 작품을 발전시켰다. “강은 정치적 경계를 뛰어넘어 존재합니다. 이번에 작품을 준비하며 남한에 있는 강들이 북한에 있는 강보다 지도상 더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북한에 대한 정보 부족과 남한의 투명성 사이의 대비, 어쩌면 이 점이 작품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기도 했어요.”

반짝이는 재활용 은을 소재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을 표현한 신작 ‘Silver Tigris & Euphrates Watershed’(2022)

수천 개의 스테인리스스틸 핀을 벽에 부착해 완성한 ‘Pin Gang – Imjin and Han’(2022). SILVER TIGRIS & EUPHRATES WATERSHED, 2022, RECYCLED SILVER, 195.6 × 177.8 × 1 CM. © MAYA LIN STUDIO

‘Marble Han River Dam’(2022)의 디테일. 동그란 유리구슬들로 마치 강이 범람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마야 린은 스스로를 일종의 ‘지도제작자’라 여긴다고 말한다. 그가 우리 발 밑에서 변화하고 있는 자연의 무수한 표정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지도제작 자는 그에게 꼭 들어맞는 수사다. 전 세계 주요 강의 수로를 표현한 드로잉적 조각품부터 기후 변화에 경종을 울리는 다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2021년 기후 변화로 숲이 소멸해가는 현상에 주목하여 뉴욕 메디슨 스퀘어 공원 한복판에 대서양 백향목 29그루를 옮겨 심은 프로젝트 ‘Ghost Forest’부터 6차 대 멸종 위기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지구상 멸종했거나 머지않아 멸종할 것으로 예상되는 동식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메모리얼 프로젝트 ‘What Is Missing?’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21세기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 발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 현상을 작업으로 소환해 낸다. “인간은 지극히 시각적인 존재예요. 무언가를 눈으로 보지 못하면 그것이 존재하는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다반사죠. 이를테면 바다는 지구 면적의 70%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해수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죠. 제가 비가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길 바라기 때문이죠.”

피처 에디터
전여울
사진
정요셉, COURTESY OF PACE GALLERY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