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신의 새로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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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음악계에 역동적인 바람이 불고 있다. 눈에 띄게 빛나는 재능을 장착한 여성 아티스트들 덕분이다. 여기, 피부색도 장르도 배경도 다양한, 음악 신의 새로운 기준을 소개한다. 

The Linda Lindas 

펑크 밴드인 린다 린다스에 대해 설명하자면 ‘멋있다’, ‘쿨하다’라는 표현은 절대적이다. 엘로이즈(Eloise Wong), 벨라(Bela Salazar), 자매인 루시아(Lucia de La Garza)와 밀라(Mila de La Garza)가 펑크 뮤직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뭉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지만 놀랍게도 이 밴드 멤버의 평균 연령은 아직 14세다. 에피타프 레코즈 소속의 이 밴드는 라이엇 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비키니킬(Bikini Kill)’의 21세기 버전을 개척해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학교에 다니며 해냈다는 점. 엘로이즈는 팬데믹 동안 줌으로 학교 수업을 받던 중, ‘Racist, Sexist Boy’ 공연 영상이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며 여러 전설적 아티스트에게 ‘좋아요’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엘로이즈(Eloise Wong).

벨라(Bela Salazar).

밀라(Mila de La Garza).

루시아(Lucia de La Garza).

왼쪽부터 | 엘로이즈의 티셔츠는 코르미오, 팬츠와 벨트는 콜리나 스트라다, 슈즈는 로저 비비에 제품. 루시아의 셔츠, 스커트, 양말, 부츠는 모두 겐조 제품. 밀라의 셔츠는 바체바, 스커트는 코치, 슈즈는 로에베 제품, 양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벨라의 원피스는 마르니, 슈즈는 시 로시 제품, 스카프와 양말은 본인 소장품.
스타일리스트 | Allia Alliata di Montereale
헤어 | Dylan Chavles(@MA+ Group)
메이크업 | Grace Ahn(@Julian Watson Agency)

린다 린다스는 밴드 결성 4년 만에 온라인에서 급속도로 인기를 끌며 비키니킬(Bikini Kill)과 같은 라이엇 걸의 행보를 걷고 있다. 학교 생활과 갑작스러운 변화 사이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나?

루시아 학교는 평범한 삶,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다. 학교에서만큼은 밴드 활동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벨라 살면서 학창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렇지.

엘로이즈 내 학교 생활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웃음)

멤버들 모두 크리에이티브한 부모님 아래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매인 루시아와 밀라의 아버지는 그래미상을 수상한 프로듀서다. 엘로이즈의 부모님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한 매거진인 <자이언트 로봇(Giant Robot)>의 공동 설립자이고, 벨라의 부모님은 디자인과 비주얼 이펙트 분야 전문가로 알고 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이 당신들을 또래보다 조숙하게 만들었을까?

벨라 팬데믹 때문에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 같기는 하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꽤 많았으니까. 한편으로 그 기간은 내 인생에서 잃어버린 2년처럼 느껴진다.

루시아 나는 어른이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길까봐 두렵기도 하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어쩌지? 해낼 수 없으면 어쩌지?’ 같은 ‘어쩌지’ 의 순간이 늘고 있다. 좀 벅차고 부담스럽다.

엘로이즈 ‘성숙해졌다,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 같은 건 잘 모르겠고, 물리적으로 바빠진 건 확실하다.

소위 말해 자고 일어나니 인생이 하루아침에 달라져 있던가?

루시아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막 늘어났다. 그걸 멀뚱히 지켜보고 있는 게 전부였고. 우리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화면 너머로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믿을 수가 없었다.

엘로이즈 나는 줌으로 학교 수업을 하고 있던 중 밀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우리 지금 소셜에서 완전 터졌어’라고. LA에 있는, 펑크록 공연장으로 유명한 ‘더 스멜’에서 팬데믹 이후 오프라인 공연을 했는데 그때 정말 많은 분이 와주셨다. 소셜미디어에서 보던 추상적인 숫자는 실재하는 사람들의 수였다. 그들을 눈앞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소름 돋는 순간이었지.

루시아 공연에 아기를 데려온 분도 있었다. ‘아기들까지 우리 공연을 보러 왔다고! 어머머 말도 안 돼!’ 하고 외쳤다.

음악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주로 얻나?

엘로이즈 나는 가사를 먼저 쓰는 편이다. 정말 화나는 일이 있으면 글로 기록한다. 전설적인 펑크 뮤지션이자 우리 밴드의 서포터인 프랭(Phranc)이 ‘곡을 쓴다는 건 우리 몸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해줬는데, 점점 그 말이 와닿는다. 하면 할수록 더 강해진다는 것.

벨라 줄리에타 베네가스(Julieta Venegas), 비엘라 (Biela), 로스 블렌더스(Los Blenders)는 내 음악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뮤지션들이다. 스페인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너무 멋있다. 근데 그들의 노래에 록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서 또 차별화되고.

1990년대 라이엇 걸 무브먼트 이면의 숨은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이제 린다 린다스는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엘로이즈 자라면서 ‘비키니킬’과 ‘슬리터 키니(Sleater-Kinney)’ 같은 밴드의 라이엇 걸 음악을 들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서 우리 학교의 뮤직 프로그램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을 기획해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LA 펑크 신에 있는 많은 밴드가 참여해줬다. 딜스(Dills), 앨리캐츠(Alley Cats) 등등. 지금 돌아보면 나도 그런 의미 있는 현장의 일원이었고, 순수하게 음악이 좋아 모인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는 건… 이건 뭐 보통 멋진 경험이 아니다.

여름에는 미국 투어를 했고, 가을에는 해외 공연도 한다. 메이저 TV 쇼에도 출연했다. 아직 어린 린다 린다스지만,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놀랍도록 차분해 보인다.

밀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려 한다. 물 흐르는 대로 받아들이려고. 지금은 우리가 즐길 수 있다면 그거로 충분하다.

루시아 우리 내면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기로 했다. 부모님들께 “엄마 아빠, 지금 이런 일이 우리에게 들어왔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괜찮아?” 하고 묻는 거 말고, “이런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구나” 알아차리면서 현재 우리의 본능을 믿는 것. 멤버끼리 이야기한다. “우린 잘하고 있다. 그래! 그럼 해보는 거야!”

Shenseea

스물다섯 살, 자메이카 출신 셴시아가 올 3월 발표한 첫 정규앨범 <알파(Alpha)>에서는 자메이카의 전설적인 아티스트를 비롯해 미고스 오프셋, 21새비지 등 유명 아티스트의 피처링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댄스홀(자메이카의 대중음악 장르)과 레게의 뿌리에 랩과 팝음악뿐 아니라 컨트리 느낌까지 적절히 섞인 그 앨범은 성공적인 장르 블렌딩의 표준으로 삼을 만하다. ‘ShenYeng Anthem’과 ‘Trick’a Treat’ 등으로 모국의 댄스홀 차트를 장악한 셴시아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으며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진 팝스타가 될 거라고. 

민소매 톱은 에르메스, 귀고리는 까르띠에 제품, 반지와 팔찌는 본인 소장품.

드레스는 미쏘니, 플랫폼 슈즈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귀고리는 제니퍼 피셔 제품, 팔찌는 본인 소장품.
스타일리스트 | Allia Alliata di Montereale
헤어 | Fitch Lunar for Leonor Greyl(@Opus Beauty)
메이크업 | Armando Garcia

데뷔 앨범 <알파>가 올 3월 빌보드 레게 앨범 차트에서 단숨에 2위에 올랐다. 첫 히트곡 ‘Loodi’를 발표한 2017년부터 당신은 댄스홀 장르의 대표 아티스트인데, 커리어가 순항 중인 시점에서 팝 장르에도 도전한 이유는 뭔가?

셴시아 댄스홀을 하는 내 모습은 충분히 보여줬다. 이제는 내 개인적 목표를 향한 두 번째 무대를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누군가 ‘5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라고 주문하면 나는 언제나 내가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어 있을 거라 답했다. 지금이 딱 그 시기다. 앞으로 5년 후에는 티켓이 매진된 아레나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서른다섯 살 무렵에는 음악을 조금 정리하고, 연기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내겐 계획이 다 있다. 거기에 맞춰 쉼 없이 달려가는 중이다. 마흔 살쯤 은퇴할 거다. 그때는 쉬어야지.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음악을 접하며 자랐나?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컸다. 댄스홀 장르는 음란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취급해서 접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댄스홀 음악을 처음 들어봤다. 버스, 택시, 그리고 친구들의 휴대폰에서 댄스홀이 흘러나오더라고. 세상에 랩이라는 것도 있고, 나도 랩을 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래도 내 꿈은 여전히 팝스타였는데, 당시 내가 처한 환경에서는 팝스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팝뮤직을 할 게 아니었다. ‘자메이카에서 팝뮤직을 하는 여자아이’라니. 내 음악을 들으면 분명 다들 ‘이건 정통 팝이 아니야’라고 할 게 뻔하잖아.

아직도 독실한 신자인가?

여전히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 종교적 금식도 하고. 어릴 때는 매일 학교에 가기 전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와 예배를 드려야 했다. 엄마는 조금 떨어진 동네에서 입주 일을 하셔서 2주에 한 번씩 만날 수 있었고, 나는 친척과 같이 살았다. 지금은 나도 안정된 가정을 꾸려 여섯 살 아들을 키우고 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들과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아들이 상당한 ‘음악적 귀’를 가졌다고. 감

각적인 사운드를 캐치하는 능력이 보인다. ‘행오버’라는 곡의 두 번째 구절을 썼을 때가 기억난다. 아들이 “엄마, 그 멜로디가 좋다, 그거로 해요!” 라고 하더라.

당신이 음악을 통해 댄스홀과 레게 선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숀 폴과 비니 맨이 피처링해주기도 했다.

세상 어디에 있든 나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또 OG와 함께 음악 할 수 있다는 건 내게는 큰 의미다. 그들은 나보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음악을 하며 대중에게 알린 존재다. 숀 폴은 내가 신인일 때 곡에 함께 참여하며 힘을 실어준 든든한 아티스트다. 잊으면 안 되지. 비니 맨은 단연 댄스홀의 제왕이다. 그에게서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알파>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21새비지와 메건 더 스탤리언과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나?

우리는 대부분 DM으로 소통한다. 그들이 내게 DM을 보냈다. 회사를 통해서가 아닌, 아티스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 그 느낌을 즉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다. 그들은 피처링 비용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내가 복이 많지. 메건과는 한 시상식 후 파티에서 만났는데, 다음 날인가 바로 번호를 교환했다. 메건에게 ‘Lick’ 음원을 보내줬더니 그녀가 ‘이거 진짜 죽인다’ 하면서 바로 OK했다.

‘Lick’ 뮤직비디오는 외설적인 표현으로 많이 회자됐다.

내가 의도했던 바가 바로 그 포인트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이 있는 거다. 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이슈와 논쟁의 중심에 서고 싶었다. 데뷔할 때부터 섹슈얼한 음악을 만들어왔고, 나는 섹슈얼리티를 관대하게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엉덩이를 보여주면서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고 싶을 때도 있고. 여성으로서 최고의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기도 한데 그게 바로 여성의 몸, 내 몸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나는 아티스트다. 평생 똑같은 모습만 보여주는 고루한 엔터테이너로 정체되어 있지는 않을 거다. 잊히는 사람이 되긴 싫다.

Tinashe

지난 10년 동안 티나셰는 팝, 댄스, R&B와 힙합 차트를 모두 석권했다. 티나셰의 사운드를 ‘얼터너티브 R&B’라고 단정 짓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그녀는 재닛 잭슨과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여성 아티스트에게 영감 받아 다양한 스타일이 혼합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스무 살에 RCA 레이블과 계약을 한 티나셰는 회사가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보지 못한다는 판단을 한 후, 레이블을 떠나 독립적으로 앨범 <Songs For You>와 <333>을 발표했다. 두 앨범 모두 기성의 레이블 구조에서 탈피한 사운드라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지금까지 믹스테이프 네 개와 스튜디오 앨범 다섯 개를 발매하고 어느덧 스물아홉이 된 티나셰는 마침내 자신의 커리어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특정 범주에 자신을 가두지 않을 만큼 자유로운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원피스는 루이 비통, 귀고리는 까르띠에 제품.

보디슈트와 팬츠는 버버리, 귀고리는 까르띠에, 팔찌는 티파니앤코 제품,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스타일리스트 | Allia Alliata di Montereale
헤어 | Nina Potts
메이크업 | Marc Quirmit

당신이 첫 믹스테이프를 발표한 건 18세 때다. 언제부터 곡을 쓰기 시작했나?

티나셰 다섯 살 때 처음으로 곡을 썼다. 제목은 ‘Deep in the Night’. 브리지와 피아노 반주가 적절히 어우러진 곡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카세트테이프 녹음기를 들고 뒷마당을 돌아다니며 프리 스타일로 노래하는 아이였다. 곡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노래를 들어주지 않아도, 그 곡으로 다른 뭔가를 하기 전에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출구였던 것 같다.

예전부터 당신의 작업물을 둘러싸고 ‘과연 티나셰의 사운드는 어떤 장르라 칭해야 하는가’ 식의 말이 많았다.

레이블에 속해 있을 때, 회사에서도 나를 어떻게 홍보해야 하는지,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 음악을 틀어야 효과적인 프로모션이 될지 의견이 분분했다. 레이블 회사에서는 각 장르의 부서가 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에 직원들이 내 음악을 팝 팀으로 넘겨야 하나, 어번 뮤직 팀으로 넘겨야 하나 논의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봤다. 나는 곡을 쓸 때 내가 떠오르는 것을 작곡한다고 생각했지, 장르를 선택한 후 음악을 그것에 꿰맞춰 써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 티나셰의 음악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설명하겠나?

얇은 베일이 덮여 있는 팝스타 뮤직인데, 팝 외의 다른 요소가 녹아 있기도 한 사운드. 이게 가장 정확한 정의 같다. 근데 또 내 곡을 듣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느끼진 않겠지. 그래서 ‘티나셰는 방향성이 없다, 혼란스럽다’라고들 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다양한 장르를 잘 블렌딩해 새롭고 다양한 시도의 음악을 하는 가수로 봐주는 이들이 늘었다.

맥스 마틴, 데브 하인스, 라이언 헴스워스 등 뛰어난 프로듀서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다양한 프로듀서들과 새로운 작업을 하면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앨범을 준비하는 시작 단계를 좋아한다. 솔직히 앨범의 무드나 방향이 딱히 잡히지 않았을 때는 망망대해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일단 스튜디오에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과 이런저런 실험을 한다. 프로듀서가 들어와 비트를 틀어주면 나는 “더 난해하고 희한한 비트 한번 줄래요?” 혹은 “제가 진짜 싫어할 거 같은 비트를 틀어주세요”라고 던져본다. 그럴 때면 정말 흥분되고 신난다. 도전하는 기분이라서. 그런 실험이 엄청난 걸 탄생시킬 때가 있다. 내가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 전, 그냥 음악이 좋아 무작정 곡을 만들 때의 즐거움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랄까.

혹시 데뷔하면서 본명을 유지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꼭 본명으로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다. 티나셰라는 유니크한 이름은 내 성장 과정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했다. 에스닉한 이름(역주 : 티나셰는 미국 태생이지만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주한 짐바브웨 쇼나족이다)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늘 물어보고, 나는 그걸 설명해주면서 내 뿌리를 지키게 된다. ‘그냥 애칭으로 부르면 안 될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마다 ‘안 돼. 이게 나의 본명이거든. 어떻게 발음하는지 가르쳐줄게, 그리 어렵지 않아!’라고 하면서 혈통을 알리고 정체성에 자부심을 갖게 되더라. 이 점은 내 성장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티나셰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나는 10년 동안 음악 산업의 시스템 안에 길들여져 ‘예스’라고 말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고,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를 위해, 또 즐겁기 위해 음악을 한다는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크리에이티브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 아닐까. 30대에는 창작 활동에 매진하면서 내가 일하는 업계에서 정말 실력자로 우뚝 서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 물론 내 커리어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한발 한발 나아가 더 좋은 음악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나를 믿는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NICK SETHI
DAN HYMAN, MAXINE W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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