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가 없는 유행병을 거치며 디지털 혹은 무관중 쇼로 컬렉션을 치러야 했던 디자이너들이 리얼 런웨이로 복귀했다. 2022 F/W 시즌은 다이내믹하고 실험적인 런웨이가 하나둘 부활하며 그간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로브 라이프
엔데믹 시대가 다가오면서 우리는 다시 옷차림을, 새로운 애티튜드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일까? 일터에서도 파티에서도 갖춰 입는 옷이 다시 필요해졌으니까. 그런데 비대면 시대 우리가 누린 복장의 편안함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무래도 아쉽다. 그런 면에서 이번 시즌의 커다랗고 아늑한 로브는 멋진 대안이 되어줄 듯하다. 보테가 베네타, 코페르니, 랑방 컬렉션처럼 앞섶을 묶어도, 발망과 막스마라 컬렉션처럼 바닥에 끌리도록 걸쳐도 좋다.
형광 발광
가을/겨울 시즌에 이례적으로 번쩍거리는 형광 컬러가 공격적으로 쏟아졌다. 패션쇼 무대부터 벽, 룩에 이르기까지, 런웨이를 온통 형광색 핑크로 물들인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부터 디스코풍 빅 숄더 디자인에 형광을 입힌 돌체앤가바나, 좀처럼 네온 컬러는 보기 힘들었던 알렉산더 맥퀸 등 그 면면도 다채롭다. 특히 멀리서도 단숨에 알아볼 수 있는 눈부신 네온 컬러를 입고 흑연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맥퀸의 모델들에게서 맹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런웨이 위 발광하는 형광 컬러는 우리 마음속 화려한 패션에 대한 니즈가 분출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버질의 유작
버질 아블로가 작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준비한 오프화이트 컬렉션,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 상상 속 경험’. 그를 사랑한 슈퍼모델들이 총출동했다. ‘Question Everything’이라는 하얀 깃발의 문구만큼이나 기발하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이었던 버질 아블로의 컬렉션을 이제 볼 수 없다니. 아쉽고 또 아쉽다.
트렌치 트위스트
이번 시즌, 트렌치코트의 고유한 멋에 전위적인 터치와 해석을 더한 브랜드가 눈에 띈다. 트렌치 명가 버버리는 클래식한 형태 외에 트렌치코트의 디테일을 결합한 드레스를 선보였고, 디올은 허리에 코르셋 장식을 더한 트렌치코트를 선보였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리처드 퀸의 트렌치코트는 또 어떤가. 클래식한 트렌치코트 하나로 평생 입는다는 건 옛말이다. 이제 필요한 태도는 낯섦에 대한 열린 마음, 새로움을 받아들이려는 유연성뿐.
스파클링 블랙
검정은 불멸의 클래식 컬러이기에 트렌드가 될 수 없나 싶지만 이번 시즌엔 다르다. 반짝임 가득한 블랙 컬러 의상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 이는 팬데믹을 겪으면서 실용성에 집중했던 패션 트렌드가 조금씩 화려해지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샤넬의 클래식한 재킷부터 지방시의 메탈릭한 팬츠까지, 디자인과 실루엣은 심플하지만 소재는 화려한 블랙 룩을 눈여겨보자.
화이트 탱크톱의 시대
보테가 베네타의 데뷔 쇼를 치른 마티유 블라지가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한 것은 다름 아닌 겸손한 화이트 탱크톱이었다. 누구나 있을 법한 화이트 탱크톱과 데님을 프린트한 가죽 팬츠, 여기에 인트레치아토 백을 들고 걸어 나온 오프닝 룩은 화이트 탱크톱을 주연으로 거듭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트라이앵글 로고가 가슴팍 중앙에 자리한 프라다의 탱크톱은 또 어떤가. 오프닝을 맡은 카이아 거버부터 피날레 모델로 등장한 모델 헝거 셰이퍼까지 탱크톱 차림이었다. 미디스커트와 네이키드 드레스, 혹은 코트와 레더 재킷 등과 근사한 짝을 이루며 실용적인 이브닝웨어를 연출했다. 바스트 포인트가 비치는 탱크톱을 가죽 팬츠와 매치해 쿨한 스타일링을 선보인 끌로에 쇼도 주목할 만하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말을 다시금 되새길 때다.
- 패션 에디터
-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