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뉴욕은 아트페어 및 다채로운 이벤트가 연이어 펼쳐지는 아트 위크 기간이다. ‘프리즈(Frieze) 뉴욕’을 중심으로 분주하고 활기차게 돌아간 그 현장의 면면을 돌아본다.
프리즈 뉴욕, 섬에서 육지로
요즘 뉴욕의 분위기는 팬데믹이라는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유롭고 활기차다. 5월 첫째 주부터 이곳은 다양한 아트페어와 VIP 오프닝으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동시에 컬렉터들의 작품 선택을 돕고, 다양한 작가를 리서치하는 일을 하는 나는 아트페어 시기가 오면 들뜬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는다. 아트페어의 프리뷰 때는 굽이 높은 힐을 신어야 한다는 오랜 강박이 있는 탓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힐을 신고 여러 개의 아트페어를 돌며 일정을 꽉 채웠다. ‘프리즈 뉴욕(Frieze New York)’이 시작하기 2주 전부터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테파프(TEFAF, The European Fine Art Fair)’를 시작으로 ‘인디펜던트(Independent Art Fair)’를 거쳐 맨해튼 끝에 문을 연 ‘나다(NADA, New Art Dealers Alliance)’까지, 세 개의 아트페어가 있었다. 테파프가 유럽 고미술이 중심을 이루는 시장이라면, 인디펜던트와 나다는 젊은 갤러리 부스에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장이다. 각 아트페어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보니 어느 곳을 가느냐에 따라 만나게 되는 사람도 상당히 다르다는 재미가 있다. 물론, 뉴요커들이 가장 기다린 건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프리즈 뉴욕이다. 2003년 런던의 리젠트 파크에서 출발한 프리즈 아트페어가 뉴욕에 상륙한 건 2012년의 일이다. 2019년에는 프리즈 LA가 론칭했다. 팬데믹 전까지 프리즈 뉴욕은 맨해튼 동쪽에 자리한 작은 섬, 랜달스 아일랜드 파크에서 열렸다. 페어 기간이면 그곳에 프리즈를 상징하는 거대한 흰색 텐트가 설치됐고, 내부에 마련된 임시 전시장이 이 페어의 유일무이한 공간이었다. 전시장을 오가려면 페어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거나 선착장에서 20여 분 정도 페리를 타야 했으니, 그 과정은 수고를 동반하는 여행 같기도 했다.
2020년 ‘온라인 뷰잉룸’ 방식으로 페어를 진행한 프리즈 뉴욕은 2021년 재개막을 준비하며 그 흰색 텐트와 작별했다. 페어가 열리는 새로운 장소는 현재 맨해튼에서 가장 핫한 지역인 허드슨 야드에 개관한 복합문화센터, ‘셰드(The Shed)’다. 세계적인 건축가 그룹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와 록웰 그룹이 협업해 설계한 셰드는 건축물 전체의 외관이 수평으로 확장되는 독특한 기능을 갖췄다. 이벤트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건축물 형상을 유동적으로 변경할 수 있는 파격적인 공간이다. 셰드 내부에는 총 8개 층이 있다. 이번 프리즈 뉴욕은 로비에서부터 이어지는 지그재그 형태의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Level 2, 4, 6, 8에서 페어를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을 꾸렸다. 다만 전체적인 건물이 주는 거대한 인상과 달리, 페어에 참여하는 갤러리 규모는 기존 200여 개에서 총 65개로 대폭 줄었다. 일전의 페어가 단층의 텐트를 가로지르는 부스들을 따라 끝과 끝을 오가는 여정이었다면, 셰드에서는 관람 사이사이 창밖의 빌딩 숲을 조망하며 짧게 휴식도 취할 수 있다. 로비에 마련된 CEDRIC’S나 Level 8에는 프리즈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샴페인 하우스 루이나(Ruinart)가 차린 아트 바를 비롯해 도벨 바(Dobel Bar)와 일리(Illy)가 입점해 관람객이 ‘한 잔’ 할 수 있었다. 브레게, 라프레리, LG OLED 라운지 등 브랜드 부스도 마련되었다. 몇 년 전 프리즈에서 에어컨 고장으로 전시실 자체가 온실이 되었던 해프닝을 떠올리면 셰드는 그야말로 쾌적한 성지다. 그럼에도 그 흰색 텐트가 그리운 건 왜일까? 힘들게 페리를 타고 섬으로 이동하던 경험이 낭만적으로 남아 있는 탓일까? 물론 셰드는 과거 버려진 상업용 철도길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하이라인 파크의 입구와 연결되어 다른 지역과 접근성이 굉장히 좋다. 이름 모를 아름다운 식물로 가득 찬 하이라인을 따라 걷다 보면 뉴욕의 유명한 갤러리들이 밀집된 첼시 지역도 둘러볼 수 있다. 그렇게 15분 남짓 발걸음을 옮기면 휘트니 미술관과 유명 레스토랑이 즐비한 미트패킹 디스트릭트까지 다다른다. 다시 말해 프리즈 뉴욕은 개최지를 셰드로 옮기면서 아트페어는 물론 뉴욕에서 누릴 수 있는 예술과 문화의 다양성을 더 쉽게, 한 번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메인 섹션은 메인답게
프리즈 뉴욕에는 크게 ‘메인(Main)’과 ‘프레임(Frame)’ 섹션이 있다. 메인 섹션에 자리 잡은 갤러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위너, 화이트 큐브, 빅토리아 미로, 더 페이스 등 최정상급이다. A, B, C, D로 세분화한 메인 부스는 총 3개 층(Level 2, 4, 6)에 분포했는데, 이들은 현재 미술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거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 작가의 작품을 그룹전 형태로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올해는 개인 작가들의 솔로 부스를 비롯해 여성 작가의 작품이 강세를 보였다. 특히 Level 2에 가장 큰 부스로 자리 잡은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가 선보인 스위스 출신의 미국 작가, 캐럴 보브(Carol Bove) 전시는 압도적이었다. 전시 부스의 벽면을 작가의 신작 조각 색상과 동일한 오렌지 빛깔 천으로 둘러 이 부스 전체가 캐럴의 설치 작업처럼 보였다. 자유자재로 구겨지고 찌그러진 캐럴 보브 특유의 철제 조각들이 부스 벽에서 흘러넘치거나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더 멀리서 감상하면 강렬한 붓 터치가 인상적인 대형 페인팅처럼 보이는 뜻밖의 경험을 선사했다. 바로 건너편 가고시안 갤러리 부스에서는 독일 추상작가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과 음료 기업인 아쿠아 모나코가 협업해 내놓은 카페인 음료 (‘Kafftee’, ‘Cofftea’라는 메뉴명이 붙은)를 제공했다. 벤딩머신과 음료박스가 설치되어 시종일관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브뤼셀에 거점을 둔 갤러리 자비에 위프켄스(Xavier Hufkens)는 트레이시 에민, 루이즈 부르주아, 셰리 레빈, 앨리스 닐 등 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선보였다. 빅토리아 미로 또한 야요이 쿠사마, 앨리스 닐을 필두로 미술 시장의 ‘신데렐라’라고 불리는 플로라 유크노비치(Flora Yukhnovich), 마리아 베리오(Maria Berrio) 등 젊은 여성 작가의 신작을 선보여 환심을 샀다.
그룹전 중에서는 레이철 우프너(Rachel Uffner) 갤러리가 선보인 화가 앤 벅월터(Anne Buckwalter)와 조각가 비앙카 벡(Bianca Beck)의 2인전이 이목을 끌었다. 특히 3면의 벽을 따라 질서 있게 설치된 앤 벅월터의 페인팅은 보면 볼수록 그 고요한 풍경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작가는 다이닝룸, 침실, 세탁실 등 일상 공간을 풍성한 패턴과 디테일로 빼곡히 채우는데, 자세히 보면 그 속에서 뭔지 모를 기이함을 전달하는 요소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세탁실에 무심하게 걸려 있는 속옷, 콘센트에 꽂힌 상태인 다리미, 테이블에 가득 펼쳐진 섹스나 종말론 관련 책 등이 그렇다. 이러한 설정은 평온해 보이는 캔버스 뒤에 숨은 불길함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최근 미술 시장에 부는 구상화와 정물화에 대한 열기를 생각하면, 앤 벅월터처럼 일상을 바라보되 작가의 독특한 시선과 전개를 펼치는 작품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작가의 작품은 아직 어마어마한 가격대는 아니기 때문에 컬렉팅에 도전해볼 만하다. 앤 벅월터의 페인팅과 캐럴 보브의 조각은 VIP 오프닝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솔드아웃’ 되었다.
신선한 작품을 선보이는 프레임 섹션과 프레임 부스상
‘프레임’은 운영 10년 미만의 갤러리가 새롭게 떠오르는 작가의 솔로 부스를 선보이는 분야로, 그중 한 작가가 ‘프레임 부스상(Frame Stand Prize)’을 수상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올해 프레임 섹션에 초대된 갤러리는 총 11곳. Level 4의 공간 반 정도를 차지한 프레임 섹션에 들어섰을 때, 메인 섹션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 공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독특한 미디엄과 아이디어로 구축한 실험적인 전시 중에서도 유독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은 컴퍼니(Company) 갤러리에서 선보인 카이사 본 세이펠(Cajsa von Zeipel)의 대형 실리콘 설치작 ‘Post Me, Post You’(2022). 성과 인종을 알 수 없는 벌거벗은 신체들이 카메라를 두른 채 뒤엉킨 모습이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관음증적 태도는 물론 오늘날의 젠더 문화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프레임 부스상’은 갤러리 인스티튜토 드 비전(Instituto de Vision)의 멕시코 여성 작가, 타니아 칸디아니(Tania Candiani)에게 갔다. 형형색색의 반투명 유리 확성기로 구성된 설치 작품을 관람하던 이들은 저마다 확성기 가까이 몸을 움직여 소리에 집중했다. 확성기에서는 유리 조각이 제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소리, 예를 들면 거세게 부딪치는 광물, 불과 공기가 팡팡 터지는 소리 등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완성된 작품 앞에서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경험하게 하고, 또 그 소리와의 만남을 통해 어떤 변화를 이끌 수 있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프리즈 뉴욕 바깥의 이야기
셰드 주변이 프리즈로 북적이는 동안 뉴욕 곳곳에선 각종 전시와 이벤트가 열렸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아침부터 많은 관람객으로 붐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루이즈 부르주아 회고전 또한 놓칠 수 없는 전시였다. 패션과 예술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매치스패션은 프리즈 협연의 일환으로, 영국에 있는 오프라인 매장 ‘5 Carlos Place’의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크리스티, 필립스, 소더비와 같은 옥션 하우스를 확인하는 것도 아트페어 관람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뉴욕의 5월은 전 세계 미술 컬렉터들의 눈길이 모이는 시기이기도 하니, 옥션가가 현재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가의 작품을 내놓기에 바쁘다. 최근 가고시안 전속 작가로 꼽힌 캐나다 출신의 1995년생 애나 웨이언트(Anna Weyant)의 작품은 각 옥션마다 등장했고, 크리스티에서 선보인 신작 ‘Summertime’(2020)이 아시안 컬렉터에게 150만 달러 (한화 약 19억원)에 낙찰되는 등 작가가 슈퍼스타임을 입증했다. 애나 웨이언트가 76세의 래리 가고시안과 연인 사이라는 게 밝혀지며, 가고시안이 세계 무대에 미치는 영향력에 모두들 또 한 번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 밖에 장-미셸 바스키아의 대규모 전시 <King Pleasure>에 이어 미술관 소장급 바스키아의 작품이 옥션에 등장했다. 그 어떤 작품보다 치열한 낙찰 전쟁이 벌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오는 9월 한국에서 키아프(KIAF)와 공동 개최되는 첫 프리즈 서울을 앞두고 한국 미술 시장의 열기가 뜨거운 만큼, 미국 갤러리스트들이 서울에 갖는 관심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페어 기간 동안, 한국 시장의 특징과 컬렉터의 성향 등에 대해 비즈니스적 안목으로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갤러리스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첫 서울 방문을 앞두고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이들도 여럿 있다. 프리즈를 통해 세계적인 컬렉터는 물론 다양한 해외 미술 전문가가 서울을 찾을 것이다. 한국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이 새로운 관심을 얻기를, 그렇게 서울의 9월이 뉴욕의 5월처럼 예술을 통해 뜨거워지길 기대해본다.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글
- 유두현(아트 어드바이저)
- 사진
- COURTESY OF FRIEZE NEW YORK, VICTORIA MI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