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의 패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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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미술, 두 세상에 동시에 존재했던 브랜드들에 대한 지적인 연구서.

‘보들레르 이래 위대한 예술가들은 패션과 공모 관계를 맺어왔다.’ 4월 말 론칭 이벤트를 시작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책 <패션워크: 1993-2018 25년의 패션 예술>은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첫 문장으로 인용하며 시작한다. 덴마크 출신의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예뻬 우겔비그(Jeppe Ugelvig)가 쓴 이 책의 영어 제목은 <FASHION WORK: 25 Years of Art in Fashion>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패션과 예술의 만남’이라면 이건 뻔한 주제인데, 어떤 책이 독자를 설레게 할 수 있을까?

미술과 패션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것은 패션 브랜드와 미술 혹은 미술가가 최대한 화려한 비주얼로 만나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긴 세월에 걸쳐 그 ‘보여지는 것들’이 세상을 채우는 동안 부족한 것은 그것들을 서로 잇거나 제대로 분석해 체계적인 비평을 하는 ‘글과 말’이었다. 이 책의 저자가 큐레이터이며 비평가라는 점에 주목하자. 예뻬 우겔비그는 미술과 패션의 상호 중첩되는 영역에 대한 형식적, 사회적, 경제적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닫고, 대학원 과정을 거치며 직접 연구하기에 나섰다. 그리고 그저 ‘패션에 대한 미술’이나 ‘미술에 대한 패션’을 주제로 삼는 작업들과 달리, 패션과 미술 두 세상에 동시에 존재하려고 하면서 실제로 패션 워크가 미술 세계의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브랜드 네 개를 꼽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분석하고 소개하는 베르나데트 코퍼레이션, 수잔 치안치올로, 블레스, 디스(DIS)는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1990년대 베르나데트 코퍼레이션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문화적, 경제적 변화와 유스 컬처 등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한다. 예술가, 예술학교 졸업생, 사진가, 스타일리스트, 광고 분야 종사자로 구성된 뉴욕 기반의 컬렉티브인 디스를 말하기 위해선 전시와 매거진과 디지털 플랫폼 등 여러 활동 영역을 아울러야 한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쳤다가는 시대정신과 아티스트와 마케팅 전략 등등 사이에서 난독증처럼 길을 잃고 헤맬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브랜드의 역사와 시대를 좇다 보면, 모르던 것이 보이고 알던 것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 출간에 대해 저자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한국의 초현대적인 소비자 문화는 세계에서 유일하고, 주류 문화의 성공이 있기 때문에 니치하고 대안적인 인디 문화 작업들에 대한 관심도 많다고 본다. 이 책이 한국에서 패션 시스템을 새롭게 장악할 방법을 찾는 젊은 패션 워커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패션워크: 1993-2018 25년의 패션 예술> 한국판은 프로덕트와 디지털 콘텐츠를 통한 협업 중심의 프로젝트를 하는 아시아 베이스 브랜드, 다다DADA多多에서 출간했다. 지난 4월 29일엔 포스트 포에틱스에서 론칭 이벤트가 열렸다. 이 책은 더북소사이어티, 국립현대미술관, 하이츠 스토어, 바스카 스토어, 더 레퍼런스 등에서 구입 가능하다.

다음은 책에서 발췌한 몇 문장이다.

그들은 런칭 직후 그들이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디자이너로 관여했던 The Face, i-D, Paper, Index Magazine, Purple과 같은 패션 매거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술과 패션을 넘어서는 그들의 스타일링에서 더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목표를 가진 다수의 콜라보레이터들”에 의해 진행되는 “새로운 문화적 집단”이라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치 하나의 에이전시처럼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전시회나 패션쇼를 열기도 하고, 영상 제작, 그 밖의 다양한 미디어 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 ‘베르나데트 코퍼레이션 통합적 스타일링’ 중

치안치올로의 쇼들은 기존의 런웨이 쇼와는 매우 달랐기에 서서히 아티스트, 사진작가, 영화감독,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지속적이고 몰입하게 되는 공연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러한 즉흥적인 전략을 통해 미술계의 주목 역시 받게 된다. – ‘수잔 치안치올로 런 컬렉션 아트 투 웨어’ 중

데이비드 리스케가 그의 글에서 논했듯이, 블레스가 보여준 패션 생산의 전위와 전복은 마침 전통적인 서구의 럭셔리 패션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개인화된 방식으로 “여러 문화를 혼용하는 새롭고 쿨한” 라이프스타일이 각광받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이런 구매 패턴을 이끄는 이들은 수십 년간 유럽의 헤리티지 패션 브랜드를 지탱해 오며 충성스러운 토탈 룩 고객이 되어왔던 상류층 여성 부르주와들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경제적 배경의 젊은 X세대 고객들이었다. – ‘블레스 스타일 없는 서비스’ 중

디스의 이력은 많은 이들이 호기심이나 필요성, 혹은 둘 다에 의해 작가이자 스타일리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자, 큐레이터의 역할을 동시에 도맡는. 디지털화된 2010년대 창의 노동의 동시대적 지형의 압축판으로 볼 수 있다. (중략) 예술가 패션의 경제 양 방면에서 디스의 활동은 예술의 비숙련화가 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전통적인 고용 구조 없이 여러 문화 분야와 직업을 막론하고 불안정하게 멀티태스킹 하기를 요구 받는 문화업계 종사자들을 다중 숙련으로 이끌었음을 시사한다. – ‘디스 프리랜서로서의 작가’ 중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박종원
자료 협조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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