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미술가 이승택의 예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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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위미술 1세대, 이승택은 말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 거꾸로 정신에서 출발한 ‘비조각’, ‘비미술’ 어법으로 기성 조각의 문법에 도전하는 실험미술을 펼쳐온 그는 오랜 시간 ‘화단의 이단아’로 통해왔다. 올해 나이 91세, 영원한 전위미술가 이승택의 예술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개인전 <(Un)Bound>가 오는 7월까지 펼쳐진다. 

서울 연남동에 자리한 미술가 이승택의 집은 멀리서도 손님을 맞았다. 적벽돌로 쌓아 올린 2층짜리 단독주택의 현관 앞 기둥에는 ‘이곳이 이승택의 집이요’라고 말하는 듯, 노끈으로 칭칭 휘감은 돌이 매달려 있었다. 분명 딱딱한 돌이지만 노끈으로 깊게 묶은 자국으로 인해 일순 물렁물렁한 연체로 보이는 착시. 고체를 연체로 만들어버리는 시각적 트릭. 이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승택이 펼쳐온 ‘묶음 작업’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후 3시, 이승택은 낮잠에서 막 깬 채로 객을 맞았다. 1932년생, 올해로 91세를 맞은 작가의 하루는 이른 아침 일어나 신문을 보고, 전날 마무리 짓지 못한 작업을 살피다 아내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낮잠을 청하는 식으로 흐른다. 그래야만 늦은 오후 맑은 정신으로 방문자를 맞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어서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공간을 둘러본 첫인상은 집이 곧 하나의 총체적 설치작품 같다는 것. 작품이거나 작품이 되어가는 단계의 사물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바닥이며 벽을 채우고 있었는데, 문득 아무 곳에나 시선을 던지면 실제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수놓은 캔버스가 반기고, 노끈으로 칭칭 감은 날카로운 톱이 발밑에 있거나 남근 모양 굽이 달린 여성용 가죽 부츠가 아무렇지도 않게 문짝에 매달려 있는 식이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정신이 혼쭐나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얼빠진 에디터를 말없이 지켜보던 이승택은 벽난로 위 걸린 한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내 자화상이에요. 매서운 진눈깨비를 맞고 있잖아요? 일평생 왕따를 당한 나를 그렸어요. 사회의 부조리에 매도당하는 나를 그린 거예요.”

이승택의 집이자 작업실의 화장실. 각종 재료가 변기며 욕조에 잔뜩 널려 있다.

지하 작업실의 풍경.

거실에는 끈으로 칭칭 감은 토르소, 나뭇가지 등이 널려 있다.

각종 미술 서적, 문학 책으로 가득한 계단.

거실 풍경. 오래전 작업한 그림과 ‘묶음 작업’이 가득하다.

2020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선 이승택의 대규모 회고전 <이승택 – 거꾸로, 비미술>이 열렸다. 당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언명에 이 같은 말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인용하는 것으로 나의 예술 인생을 갈음하고자 한다. ‘내가 아는 예술가 가운데 개인적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예술가들은 다 별 볼 일 없는 작자들이야. 훌륭한 예술가들은 그저 자신이 만든 작품 속에 존재하는 자들이지. 따라서 그들 자신에게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 전혀 없어.’” 그리고 이걸 보고 있자니 문득 책 서문에서 오스카 와일드가 쓴 다음의 문장도 떠오른다. “비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한 문장이야말로 예술가 이승택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 미술계에서 이승택을 호명하는 말은 다양했다. ‘재야의 미술가’, ‘미술계의 국외자’, ‘이단아’, ‘반골 체질’. 한국전쟁 중 고향인 함경남도 고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이승택은 1955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에 입학하며 예술 세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열린 <국전>에서 그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청동 조각 ‘설화’(1956)를 출품하려다 낙선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1좌대 1작품’의 관례에서 벗어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을 모티프로 제작한 조각품 두 점을 하나의 좌대 위에 진열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대인 1950년대 한국에서 작가가 전시할 기회는 <국전>이 거의 유일무이했으나 작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전>에 환멸을 느끼고 기성 미술계를 불신하며 재야의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의 철저한 독자적 성향을 보여주는 사건이 2년 뒤인 1958년 홍익대학교 졸업전에서도 벌어진다. 당시 작가는 포물선 형태의 석고에 가시 철망을 둘둘 감싼 작품 ‘역사와 시간’(1958)을 출품했는데, 이는 자신의 26년 개인사를 통해 경험한 한반도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업이었다. 주의할 점은, 당시 조각계에서 강요한 ‘조각’하거나 ‘소조’하는 조각 문법에서 벗어나 작가의 주된 미적 방법론인 돌, 도자기, 책, 여성 토르소 등을 노끈으로 묶어 시각의 전환을 발생시키는 ‘묶기’를 적용한 첫 대작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때부터 그만의 고집으로 그룹 차원의 무브먼트를 형성해가기보다는 서구 근대 조각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아방가르드한 전위 작업을 이어갔다. “그걸 출품하면서 그 당시 교수들로부터 ‘재주를 썩힌다’는 질타를 받았어요. 왜 탁월한 사실적 묘사력을 썩히냐는 것이었죠. 단지 졸업 작품으로 남을 작업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도요. 일찍이 중학교 시절, 고향 함경남도 고원에서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미술 교사 홍만우 선생님을 통해 러시아의 구성주의나 사실주의에 관한 화집을 접했고, 홍익대에 입학해서는 윤효중 교수가 유럽 여행 후에 가져온 다양한 유럽 조각가의 화집을 보면서 미술의 흐름이 ‘추상’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어요. 그래서 ‘역사와 시간’에 개념적인 것을 담고자 했죠. 가시 철망에 묶인 오브제로 미술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승택이 경험한, 말 그대로의 ‘역사와 시간’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 자신을 형상화한 자화상. 그 앞에 선 이승택.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 캔버스며 팔레트, 물감, 신문 스크랩이 널린 지하 작업실에는 이렇게 쓰인 캔버스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존의 질서와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거꾸로’ 정신에서 비롯된 ‘비미술’과 ‘비조각’은 이승택의 작업을 지시하는 주요한 단서다. 대학생 시절 작가는 ‘전위란 긍정하기보다는 거부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기존과 기성을 거부한 니체의 철학에 심취했고, 이는 그가 평생 펼친 ‘비조각, ‘비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미술 아닌 미술’, ‘조각 아닌 조각’ 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 작가의 여정은 기존 미술계에선 다뤄지지 않은 ‘재료’의 실험으로 구현됐는데, 그는 주로 옹기, 고드랫돌과 같은 한국의 민속품에 주목했다. 특히 전통적인 생활 기물로 익숙한 옹기의 변용인 ‘오지 작업’은 그의 재료 실험의 시작 격으로, 1960년대 조각가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전시 기회에 이승택이 대거 출품했던 작업이기도 하다. “당시 미술계에선 어떻게 왜색을 걷어내고 한국 미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갈 것인가가 미술가들의 숙제였어요. 그리고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화두가 뜨거웠는데, 가장 한국적인 재료로 세계에 없는 작업을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 닿았죠. 그 당시만 해도 옹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거라 생각해서 옹기로 미술 작업을 해봐야겠다 해서 큰 옹기 가마가 있는 퇴계원까지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며 흙 작업부터 초벌구이, 유약 작업, 재벌구이까지 직접 배워가며 했어요. 언뜻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물건이나 재료를 볼 때 상상력이 발동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러면 곧바로 작업으로 이어졌죠.” 한편 1964년 작가는 <원형회>에서 메줏덩이같이 동글동글하게 빚은 옹기들을 바닥에 놓거나 줄에 매달아 천장에 거는 방식으로 설치해 전시했다. 이는 좌대 위 작품을 올리는 전통적인 조각 전시 방법에서 완전히 벗어난 형식이었는데, 미술사학자 조앤 키는 2013년 ‘아카이브 오브 아시안 아트’에 발표한 글에서 국내에 ‘설치’라는 개념이 없던 1960년대에 작품을 벽과 천장에 매다는 형식을 택했다는 점을 들며 이를 한국 설치미술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고 평한다.

정원에는 각종 동상과 조각품, 고드랫돌이 널려 있다.

종이로 만든 ‘바람’ 작품과 ‘묶음 작업’에 쓰인 각종 돌들.

남근 모양의 굽을 단 여성용 부츠를 연상시키는 작품 ‘천사의 구두’.

민속품 옹기를 쌓아 올려 만든 ‘오지 작업’의 축소판.

이승택의 작품 세계를 말할 때 발이나 돗자리를 엮을 때 사용하는 자그마한 돌인 ‘고드랫돌’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고드랫돌을 이용한 작업은 생활 현장의 재료를 미학의 영역으로 진입시켰다는 사실을 넘어 고드랫돌을 비롯한 다양한 딱딱한 물체를 노끈으로 묶어 물렁물렁한 연체의 형상으로 바꾸는 ‘묶음 작업’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승택은 고드랫돌을 처음 조우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홍익대에 들어가서 사생차 미대생들이 단체로 방문한 덕수궁 미술관에서 처음 고드랫돌을 봤어요. 가운데가 움푹 파인 형태였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고향에서는 그런 모양의 고드랫돌을 본 적이 없거든요. 집에 돌아와 강가에서 주운 자갈의 가운데를 쪼아내고 노끈을 감아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봤어요. 벽에 걸어놓으니 딱딱한 돌멩이가 실감 나게 물렁물렁해 보이는 게, 이게 내 작업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죠. 이후 도자기, 책, 지폐 따위도 그런 식으로 묶어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느꼈죠. 어떤 것이든 묶기만 하면 묘하게도 본래의 형상이 새롭고 신선하게 보이는구나.” 사실 ‘묶음 작업’이야말로 이승택의 ‘비조각’ 세계를 오롯이 보여주는 시그너처 작업이다. 노끈으로 묶어 만들어진 가상의 흔적은 물체의 속성을 일순 전복시키고 여기서 관람자는 착시, 시각의 전환을 경험한다. 나아가 도자기, 책, 캔버스, 지폐 등이 노끈으로 묶이는 순간 그것이 담고 있는 문화사적 정체성, 지식, 예술, 자본주의와 같은 상징은 순식간에 비틀어진다. 이와 관련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배명지는 말한다. “묶기는 사물을 둘러싼 기존의 굴레를 거부하는 행위이자 사물을 옥죄고 있는 상징체계를 느슨하게 만들어 그것이 봉인하고 있는 다양한 잠재적 가능태들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 해방의 어법이기도 하다.” 한편 작가는 ‘묶음 작업’의 제작 과정을 말하며 작업 자체는 지극히 개념적이지만, 그 과정은 매우 조각적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처음 고드랫돌을 만들 때만 해도 정과 끌로 일일이 쪼아서 묶인 흔적을 만들었어요. 시간이 지나 그라인더가 나온 후에는 이를 사용해 훨씬 쉽게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지요. 또 책을 묶은 ‘매어진 책’ 같은 경우 책 그 자체로 물렁한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통째로 물에 담갔다가 노끈을 맨 모양으로 칼로 그 부분을 깎아내고 매어진 흔적으로 주름이 지도록 섬세하게 조각적 터치를 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그러다 보니 ‘묶인 돌’이나 ‘매어진 책’, ‘매어진 백자’ 등은 제작 방식은 비슷하지만, 모두가 유니크한 작업이죠. 같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갤러리현대에서 진행되는 전시 '(Un)Bound'의 전시 풍경. ‘묶음 작업’으로 완성한 ‘매어진 백자’와 ‘무제’. 전경, (위) 무제(1975), (아래) 매어진 백자(1975).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옹기를 줄줄이 매달아 완성한 ‘성장(오지탑)’. 이승택, 성장(오지탑), 1964ㅣ2020, 옹기, 유약, 360(H) X 50(DIA.)CM. 이승택.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There are so many Lee Seung-taeks.” 미술사학자 조앤 키는 이처럼 말했다. 이는 너무나 많은 이승택이 있다는 것, 즉 한 사람이 이룬 작업 세계가 그토록 방대하다는 뜻이다. 실제 작가는 1950년대부터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기성 조각의 문법에 도전하는 실로 다양한 작업을 펼쳐왔다. 앞서 말한 옹기 등을 이용해 한국에 자생한 한국적 모더니티의 가능성을 엿본 재료 실험, 사물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바라본 ‘묶음 작업’은 물론 1970년 전후에는 바람, 불, 연기 등 비물질적 요소들로 작품을 시도하며 고정된 형태가 없는 ‘비물질’적 조각 작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인체의 모든 근육을 부정해버린 듯한 자코메티의 조각을 보며 ‘그렇다면 뼈마저 부정하면 그것도 조각일 수 있을까?’라는 발상에서 유동적이며 만질 수도 없는 자연 현상을 시각화한 ‘연기 나는 조각’, ‘바람’ 등을 이어간 것이다. 나아가 1980년대 중반 이후엔 퍼포먼스, 대형 설치, 사진 등으로 작업 영역을 확장했고, 환경 미술이 대두한 1990년대에 들어선 ‘지구놀이’, ‘녹색운동’ 시리즈를 펼치며 시대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예술가적 면모를 보였다. 이렇듯 기성 미술계와 거리를 두며 독자적 실험미술의 길을 걸어온 이승택의 작업 세계는 2009년 그가 78세의 나이로 백남준아트센터 미술상을 받으며 ‘재야’니 ‘이단’이니 하는 수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이후 2017년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 2018년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올해 5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 <(Un)Bound>를 갖는 것에 이어 내년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협업해 펼치는 전시 <아방가르드: 한국의 실험미술, 1960~1970년대>에도 참여한다. “구겐하임은 과거 구타이나 모노하 등 일본의 현대미술을 깊이 있게 접근한 전시를 기획했는데, 일본 미술을 잘 아는 큐레이터들이 한국의 실험미술에 관심을 갖고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기쁘죠. 나의 1960년대 실험 작업이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에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요 작으로 소개된다는 사실에, 늦게나마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위안이 되고 미술가로 살아온 삶에 후회가 없죠.” 끝으로 이승택은 자신이 펼쳐온 예술 세계의 원동력은 ‘반드시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겨야겠다는 일념’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촌스럽게도 애국심이 강해요.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하는 사조 따위의 것을 넘어서 세계 속에서 이승택의 미술을 하려고 70년을 달려온 거예요. 일평생을 ‘누구 같은’ 것, ‘무엇 같은’ 것을 하지 않았어요. 요즘 신문을 보니 상품도 어디 비슷한 것을 흉내 낸 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전혀 새로운 걸 만들어야 팔리지, 비슷한 걸 만들면 안 팔린다는 거예요. 예술은 무엇보다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감동의 제1조항이 무엇이냐면 바로 세계에 ‘없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그게 작품이고, 예술이에요.”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최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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