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더 넓게 연결되어 있는 디지털 시대. 그런데 지금 곳곳에서 디지털 시대 이전의 풍경이 출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왜 노스탤지어에 빠졌을까?
온갖 스마트 기기와 소셜 미디어가 21세기를 지배할수록, 빅테크가 완전히 재정비하려는 세계 문화의 마지막 숨통을 틔워준 1990년대에 대한 집단적인 그리움은 커진다. 음악, 패션, 영화, 텔레비전에 걸쳐 어느 분야를 보든 디지털 이전 시대를 갈망하는 ‘포스트모던’이 있는 것 같다. 패션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항상 과거를 돌아보았다. 이번 시즌에는 카고 바지와 카펜터 청바지가 미쏘니에 등장했고, 프라다는 속옷이 겉옷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다시 꺼내 보였다. 그리고 미우미우는 엄청나게 짧은 케이블 니트 스웨터와 2000년대 초 10대 팬들의 장난스러움을 떠올리게 하는 갈색 벨트가 달린 카키색 로라이즈 미니스커트를 런웨이에 올렸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 역시 올드 스쿨 런웨이로 그녀의 쇼를 펼쳤는데, 샤넬의 30년 전 시그너처를 재현하면서, 액세서리로 가득 찬 리어타드와 단발머리를 소환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분위기는 크리스틴 앤 더 퀸즈가 부른 90년대 조지 마이클의 히트곡인 ‘프리덤’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이 노스탤지어적인 트렌드는 런웨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뉴욕 FIT 박물관에서는 4월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의 타비 부츠, 프라다의 나일론 백팩 등 지난 시절의 하이패션을 선보이는 전시 <재창조와 쉼- 90년대 패션(Reinvention and Restlessness: Fashion in the Nineties)>이 진행되었다. 한편 5월에는 디자이너의 히피 그런지 상품들과 그 시대의 영감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전시 <안나 수이의 세계(The World of Anna Sui)>가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있는 민트 박물관 랜돌프(Mint Museum Randolph)에서 열린다. “많은 이들이 내 옷이 전혀 시대에 뒤처져 보이지 않아 당장이라도 입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내게는 큰 칭찬이다. 사람들은 옛날의 진실성과 산업화 이전 시대의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안나 수이의 말처럼, 최근 독보적인 세기말 패션에 힘입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블루마린의 90년대 컬렉션을 보면 2022년의 블루마린 컬렉션과 섞여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나비 모양 튜브톱, 플레어 데님, 화려한 프린트의 블라우스와 커다란 벨트, 찢어진 데님 쇼츠는 정확히 90년대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90년대 마크 제이콥스는 위험을 감수한 채 미국 브랜드 페리 엘리스에 그런지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의 비전은 프레피 브랜드인 페리 엘리스에게는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다. 마크 제이콥스의 1993 S/S 컬렉션은 페리 엘리스에서 그의 마지막 쇼가 되었으며, 업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고 사태로 기억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비니를 쓴 채 찢어진 셔츠를 입고, 전투화를 신은 모델들의 행진은 패션 업계에서 전무후무한 거대한 트렌드가 되었다. 그런지 스타일은 페리 엘리스에는 어울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곧 90년대 음악, 패션, 10대 문화를 점령한 것이다. 최근 마크는 1999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작품인 <처녀 자살 소동>에서 영감을 얻은 세컨드 라인 헤븐 라인을 론칭했다. 정확히 20년 만에 90년대 그런지 룩의 제왕은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꾼다. 마크 제이콥스 헤븐 라인의 아트 디렉터 아바 니루이(Ava Nirui) 역시 이에 동의한다. “젊은 세대들은 확실히 인터넷 이전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생각하죠. 90년대는 문화적 측면에서 인터넷 이전 시대 중 가장 ‘발전한’시기였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갑니다. 과거의 멋진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옛 생각에 잠길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요.” 그녀의 말처럼 마크 제이콥스의 헤븐 라인에는 밀리터리, 힙합 팬츠, 그런지 룩, 펑크, 스쿨걸 룩 등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다양한 문화적 코드가 영리하게 뒤섞여 있다.
Z세대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문화적 경험에 대한 재생산에 더 적극적이다. BTS의 뷔가 그래미 시상식에서 귓속말을 해서 더 유명해진 미국의 팝 가수, 18세의 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는 그녀의 데뷔 앨범인 <Sour>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Baby One More Time(1999)’의 관능적 이미지와 코트니 러브의 앨범 <Live Through This(1994)>의 펑키한 감성을 오간다.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개인적으로 영화 <클루리스>에 등장하는 세어 호로비츠의 럭셔리함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사진에 나오는 인형 드레스나 지난 7월 백악관 방문 당시 입은 빈티지 샤넬 트위드 슈트가 단적인 예다. 90년대는 그녀가 겪어보지 않은 시대다. 그렇지만 자료 조사로 자신을 그 시절의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겐 콘텐츠의 질과 양이 풍부하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보고 문화적 카피가 아니냐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개개인은 각자가 동경하는 시대의 패션과 문화 코드가 있지 않은가?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SNS라는 새로운 플랫폼 덕에 정보의 양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스타그램엔 시대별로 사진을 모아두는 아카이브 계정이 있을 정도니까. 그 계정만 판다면 90년대 걸로 자신의 셋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오늘날 대중적인 노스탤지어의 지속성과 확산성은 틱톡, 넷플릭스 및 기타 빅테크 플랫폼을 구동하는 알고리즘 엔진 덕분에 더없이 수월하다. 지나간 자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테크적인 발달이 패션에 끼치는 영향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패션 신의 트렌드가 빅테크의 영향을 받으리라고 말이다.
- 패션 에디터
- 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