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직접 선택한 모던 패밀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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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몰랐던 아름다운 연대의 세계가 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선택해 살아가는 이들, 모던 패밀리 넷이 여기 살아간다. 

‘Modern Family’는 어느 날 우연히 본 사진 연작에서 시작되었다. 작가 정연두의 ‘상록타워’(2001). 2001년 정연두는 ‘무료로 가족사진을 찍어드립니다’라고 적은 전단지를 들고 이웃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서울 광장동에 위치한 아파트 주민 32가구의 화목한 모습을 담은 사진 연작 ‘상록타워’가 탄생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사진들을 보며 어째서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걸까. 사진 너머로 지금은 유물이 되어버린 옛 가정집의 빛바랜 살구색 벽지를 보아서일까, 서른두 집 천장에 하나같이 달려 있던 못생긴 조명 때문일까. ‘상록타워’를 들여다볼수록 이는 2001년이라는 시대에 고여 있던 ‘기성 가족 모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박물적 기록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기묘할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의 가족이 거기 담겨 있어서다. 다름 아닌 부, 모, 아들, 딸로 이뤄진 ‘4인 구성의 정상가족’이라는 전형 혹은 유령이 말이다.

재작년 젊은 회화 작가 이은새와 그의 작품 ‘짐 싣는 사람들’(2019)을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림은 가족인지 단순한 친구 사이인지 모를 다섯 명의 무리가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차에 짐을 싣는 풍경을 묘사한다. “최근 들어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작업에 들여오기 시작했어요. 혈연관계가 아닌 자의적 선택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인물을 표현하고 싶어서요.” 작가는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환영을 지운 자리에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적 가족 모델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정연두의 2001년 작 ‘상록타워’와 이은새의 2019년 작 ‘짐 싣는 사람들’의 간극은, 이를테면 시간이 흐르며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진 혈연 공동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점차 흐릿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 속에서 정상가족의 신화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또 비혼 동거, 비혼 육아, 성소수자 커플 등 그간 ‘비정상가족’이라는 시선에 갇혀 있던 이들이 얼마나 우리의 이웃으로 들어오고 있는지는 여성가족부가 2020년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가족 다양성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알 수 있다. 조사는 국민 10명 중 7명(69.7%)이 ‘혼인·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주거·생계를 공유한다면 가족이라 여길 수 있다’라고 답했으며, 사람들 사이 가족을 둘러싼 오래되고 낡은 관습적 정의가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2014년엔 이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진선미가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가족으로 인정하자는 ‘생활동반자법’ 발의를 추진했다. 이 법만 통과되면 수많은 ‘법외 가족’이 의료, 주거 등에 있어서 법적 권리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지금 모두가 알고 있듯, 가족을 해체하고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극심한 비난 여론에 발의에는 실패했지만.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법 밖의 가족들은 동반자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응급실에 가더라도 “가족이에요?”라고 묻는 가족 타령에 발이 묶이고, 아파트 특별 공급이 나 소득공제와 같은 정책으로부터 차별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가 여전히 혼인, 혈연에 얽매여 있는 동안 해외는 일찍이 대안적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1999년 프랑스는 동거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팍스’를 도입했고 영국은 ‘시빌 파트너십’을, 스웨덴은 ‘동거법’을 통해 동성 커플에게도 결혼과 비슷한 법적 권리를 허용하고 있다. 한편 대만은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승인했고, 일본의 경우 지난해 삿포로지방법원이 ‘이성 간의 결혼만 인정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에 위배된다’고 판결한 것에서 나아가 내년 중 도쿄는 성 소수자 커플을 인정하는 ‘동성 파트너십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알렸다. 그럼 우리나라는? 변화하는 가족상과 사람들의 인식에 역행하는, 구태의연한 가족 정책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리하여 이번 기사에서는 새롭게 탄생한 가족, 모던 패밀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우선 우리가 잘 모르던 아름다운 연대의 세계를 알려주기 위해 두 LGBTQ 가족이 그들의 집을 활짝 열어주었다. 비혼 입양을 통해 가족이 된 세 모녀, ‘에고 아닌 에코’로 살아가는 비혼주의, 비건 지향 가족도 함께했다. 이들이 저마다 그리고 있는 삶의 지도는, 우리에게 가족을 둘러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 가까이에, 모던 패밀리가 살고 있다.

예브게니 쉬테판 ♥ 모지민‘
2017년 5월 24일 한강. 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다.’

예브게니 쉬테판이 입은 팬츠는 송지오 제품,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모지민이 입은 재킷과 팬츠는 펜디 제품.

경기도 양주시, 창 너머로 어린이 유원지의 바이킹이 시종 흔들거리는 풍경이 내다보이는 아파트가 모지민과 그의 남편 예브게니 쉬테판의 집이다. 그들의 집을 찾은 건 어느 봄날의 토요일, 이른 오후였다. 원래대로라면 하루 늦은 일요일에 만날 참이었지만, 모지민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었다. “매주 일요일엔 남편이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시위에 참여해서요.” 한국의 LGBTQ 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지민을 모를 리 없다. 그의 별칭은 ‘털 난 물고기’라는 뜻의 모어, 1990년대 중반 이태원에서 문을 연 드래그 퀸 쇼 클럽 ‘트랜스’에서 시작해 2019년 뉴욕 전위예술의 메카인 ‘라 마마’ 극장 무대에까지 오른 드래그 퀸 아티스트다. 그리고 2017년 그와 백년해로를 약속한 예브게니 쉬테판은 러시아인으로, 한국을 찾을 당시만 해도 화학자로서 대전의 한 연구단지에서 일하던 그는 1998년 한국에서 창간한 러시아어 신문 <서울헤럴드>의 기자직을 거쳐 현재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한국의 정치 경제 뉴스를 러시아어로 전하고 있다.

1998년 12월 28일, 트랜스젠더 사장이 운영하는 서울 장한평의 바 ‘예우’에서 그들은 만났다. 쉬테판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바에 있던 수많은 손님 중 모지민은 “엄청 부끄럼을 타지만, 누구라도 그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스타”였다. 그리고 만난 지 꼬박 19년이 흐른 2017년, 그들의 삶에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는지는 올해 4월 발간한 모지민의 첫 에세이 <털 난 물고기 모어>에 소개되어 있다. “2017년 5월 24일 한강. 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다.” 진한 장미꽃 향기가 코를 간질이던 그해 봄, 한강에서 아름다운 결혼식이 열렸다. 뮤지션이자 그들의 오랜 친구 이랑이 축가를 불렀고, 흰옷을 입은 모지민과 쉬테판은 햇살 아래서 연신 왈츠를 췄다. 이들의 결혼식 영상은 모지민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되어 있는데, 첫 댓글로 누군가 이런 말을 남겼다. “죽고 싶을 때마다 들어와서 보는 영상이에요. 이 영상 보고 있으면 죽고 싶다가도 다시 살아도 될 거 같다는 희망이 들어요.” 훗날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를 줬던 그날을 모지민은 이렇게 기억한다. “왠지 그때 해야만 했어요. 결혼식을요. 사실 저희에겐 ‘기록’의 의미였거든요. 지금 돌이키니, 단순한 기록으로 다가왔던 그날이 동성 결혼 합법화에 힘을 실어주는 어떤 초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모지민이 기억하는 어느 날. 별안간 모지민은 쉬테판에게 말했다. “나는 없어.” 그러자 쉬테판은 연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말했다. “너는 있어.” 어쩌면 연인이란 자꾸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이 여기 세상에 존재함을 확인시켜주는 존재이지 않을까. “함께한 지 20년이 흘렀지만 전혀 질리지가 않아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건 지민이에요.” 쉬테판이 말한다. “그는 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에요.” 모지민이 말한다. 올해로 그들이 함께한 지 햇수로 24년. 2017년 올린 결혼식은 비록 그들에게 어떠한 법적 구속력도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그들이 그 어느 부부보다 하나로 결속되어 있음은 둘이 나누는 눈짓과 표정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그들 뒤로 수많은 시절이 지나간 만큼, 또 앞으로 긴긴 시간이 흐를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갈까. 에세이 <털 난 물고기 모어>에서 모지민은 말한다. “저와 함께 안방극장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찍으셔야죠. 백년해로 바로 가보시지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을 수천 번 어슷 써는 것! 사랑합니다.”

백지선 ♥ 쭈 ♥ 설기
비혼이고 아이 둘을 키웁니다

백지선이 착용한 드레스는 르917,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첫째 쭈가 입은 슬리브리스 톱은 르 917, 스커트는 레페토 제품. 둘째 설기가 입은 원피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토요일 정오, 첫째 쭈가 말했다. “촬영 3시 전에는 꼭 끝내주셔야 해요! 리듬체조 가야 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언니 옆에서 둘째 설기가 말한다. “언니, 리본이랑 공 보여드려봐. 저는요, 요즘 방송 댄스를 배워요. 얼마 전에는 전소미 ‘Dumb Dumb’을 배웠어요.” 두 딸의 엄마 백지선이 문고리에 걸린 헤어피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전부 다이소에서 산 것들이에요. 얘네한테 다이소는 거의 백화점이에요. 돈만 생기면 다이소에 가는데, 며칠 전에는 염색약을 사 와서 둘이서 셀프 염색을 했어요.” 두 자매의 머리카락은 사이도 좋게 병아리색 물이 들어 있었다.

백지선은 20년간 출판 편집자로 여러 조직에서 밥벌이를 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취업의 좁은 문을 뚫고 취직했고 직장에서 능력도 인정받아 부장 직급에까지 올랐다. 열심히 밥벌이를 하는 사이사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간 연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백지선의 저서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에서 말하길 “내가 사귄 남자들은 모두 선량한 편이었지만, 같은 길을 동행할 말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한다. 어느 해인가 그녀는 싱가포르 센토사섬을 여행했다. 수륙양행 버스도 타고, 타이거 맥주 공장도 돌아보고, 나이트 사파리 투어에도 참여하며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내 옆에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무렵 그녀는 한 잡지에서 최후의 모계사회로 알려진 중국 원난성 모쒀족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모쒀족은 철저한 모계사회로, 거기엔 결혼이란 게 없어요. 엄마, 외할머니, 이모들이라는 대가족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죠. 모계가족에서 아이들은 무조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라요. 그곳 사회에서 여성은 자유연애가 가능한데 엄마가 아무리 많은 남자를 사귀더라도 가족은 그대로 유지되고, 여성들이 공동 육아를 하니 엄마들이 경제활동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죠.” 막연히 현대판 모계사회의 가능성을 꿈꾸던 백지선은 2006년 한 줄기 빛을 봤다. 그해 12월 30일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혼일 중일 것’이라는 양친 될 자의 자격 조건이 삭제되면서 ‘비혼 입양’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2010년과 2013년, 그녀는 두 딸 쭈와 설기를 가족으로 맞이하게 됐다.

백지선은 태어난 지 석 달이 된 갓난아기 쭈를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한다. “쭈야, 기억해? 엄마가 너를 탁 안고서 누가 뺏어갈까봐 바로 주민센터에 가서 출생신고를 했어.”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가족을 이루지만, 백지선은 세상에 열심히 구하며 가족을 안았다. “저는 믿고 의지할 사람, 일상을 함께할 사람을 원했고 그것이 곧 가족인데, 꼭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항상 남녀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인간관계라고 생각했죠. 비혼으로 아이를 입양함으로써 저는, 연애 감정이 식으면 언제든 위태로워지는 결혼에 기초한 불안정한 가족이 아니라 영구불변한 확실한 가족을 만들 수 있었어요.” 나아가 그녀는 결혼이냐 비혼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모든 여성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운명에 떠밀려가는 존재로 살지 말고,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주도하라고 전한다. 그녀는 종종 이런 미래를 상상한다. “어머니, 형제자매, 조카들, 우리 아이들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더 자주 모이고 더 강력한 공동체가 되길 바라요. 제가 사회에 진출할 때는 세상에서 낙오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두려움만 가득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기대로 마음 설레며 마음껏 도전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했으면 좋겠어요.”

편지지 ♥ 전범선
‘비건’으로 만나 ‘비혼’을 약속하며 가족 되기

편지지가 입은 브라톱과 스커트는 프라다 제품. 전범선이 입은 이너와 니트 톱, 팬츠는 모두 돌체앤가바나 제품.

“이게 제가 난생처음 산 예술 작품이에요.”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방 안, 전범선이 책들 사이로 숨겨져 있던 그림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는 회화 작가 노예주의 작품으로, 현재 전범선과 2년째 한식구로 살고 있는 연인 편지지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다. 그림은 2020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이 수반하는 소들의 강제 임신과 모성 착취를 비판하는 시위에 참여한 편지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벌인 시위였어요. 당시 지지가 상의 탈의를 하고 가슴에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페인트를 칠하는 퍼포먼스를 했거든요. 그걸 보고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조선에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구나!’(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지지는 예술하는 자아와 운동하는 자아를 동시에 지닌 유일무이한 존재예요.”

시곗바늘을 돌려, 이들의 첫만남을 이야기해본다. 2018년 10월 14일, 서울 보신각에서 동물 해방을 위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전범선이 자문위원으로 있는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이 주최한 ‘동물권 행진’으로 수백 명의 인파가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동물의 권리를 촉구하며 나선 행사였다. 당시 편지지는 전 세계를 떠돌며 ‘나그네적 삶’을 살다 막 한국으로 돌아온 ‘초보 비건’이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 한복을 입고 북을 치는, 유난히 목소리가 컸던 한 남자를 기억한다. 이후 그녀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북 치는 남자’로 남아 있던 전범선과 편지지를 연결해준 것은 SNS였다. 2020년 “한번 만나뵙고 싶어요.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라고 전범선이 보낸 DM에 편지지가 응답했고, 둘은 며칠 뒤 한 비건 식당에서 만나 당일 새벽 6시가 넘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연인, 가족이 탄생했다.

밴드 ‘양반들’의 보컬이자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인 전범선과 모델, 사진가, 현대미술가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동하는 편지지. 볕 잘 드는 해방촌의 아담한 빌라에서 이들이 2년째 살아가고 있다. 최초 ‘비건’으로 만난 이들은 현재 ‘비혼’을 약속하며 가족을 이루고 있다. “처음엔 서로의 ‘언어’를 조율해가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우선 서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비혼주의에 대한 합의가 필요했고, 나아가 다자간 연애인 ‘폴리아모리’를 할 것인가, 일대일만의 관계를 추구하는 독점적 사랑인 ‘모노가미’를 할 것인가에 대한 대화도 나눠야 했어요. 저는 ‘펜섹슈얼’(상대의 성별을 구분 짓지 않는 사랑)이기도 하고 범선을 만나기 이전, 한 사람과 독점적으로 오래 연애를 한 경험이 없거든요.” 편지지가 말했다. 이후 이들의 언어로는 ‘테라피’인, 숱한 논쟁이 오갔고 그들은 이렇게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엔 ‘에고 아닌 에코’로서 살아가자고 약속했어요. 현대사회에서 남녀 간의 갈등이나 대립 구조, 싸움, 전쟁을 보면 그것들은 순전히 ‘에고’에서 파생되는 것 같다고 느끼거든요. 한편 에코는 그리스어로 ‘집’이란 뜻을 가져요. ‘에콜로지’도 결국엔 ‘지구는 한 집’ 이란 뜻이에요. ‘에고로 산다’는 것은 개인의 자아로 산다는 것이고, ‘에코로 산다’는 건 한집안 식구로 살고 나아가 생태주의로 가자는 거죠.” 전범선이 말했다.

비건 지향, 비혼주의 가족인 둘에게 ‘밥 먹는 행위’는 어쩌면 집에서 치르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 된다. 비건이지만 대체육만 먹는 ‘정크 비건’이었던 전범선은 ‘요리는 일종의 명상’이라 여기는 편지지를 만나며 ‘사상’으로만 가졌던 동물과 생태를 둘러싼 생각을 ‘삶’으로서 실천하게 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평생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하며 ‘땅으로 돌아가자’는 생태주의 운동을 벌인 스콧, 헬렌 니어링 부부에 빗대 그려가고 있다. “동물 생추어리가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살면서 농사 짓고 글 쓰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점점 땅과 가까워지는 삶을 사는 거죠. 아이 대신 수많은 동물과 함께 지내며, 둘이 협력하고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에코’적 삶이 저희가 꿈꾸는 미래예요.” 전범선이 말했다.

나라 ♥ 유림
서울에서 여자로서 여자 애인과 살기

나라가 입은 드레스는 블루마린 제품. 유림이 입은 재킷은 보테가 베네타,
팬츠는 써저리 제품.

모처럼 따사로운 날씨의 토요일 오후였다. 낮술 생각이 절실해지는 날씨로군, 생각하며 나라와 유림의 집에 발을 디뎠더니 그곳은 그야말로 술꾼의 천국이었다. 빈티지 식기장엔 담금주며 술잔이 가득했고 거실 한쪽 구석엔 와인, 코냑, 위스키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주종의 술이 꽂힌 트롤리가 자리했으며 주방 아일랜드엔 와인 셀러가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었다. 올해로 2년째 가족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나라, 유림의 첫 만남은 공교롭게도 한남동의 한 칵테일 바. 당시 그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나라와 손님으로 찾아간 유림은 서로 첫눈에 반해 ‘함께 삽시다’란 말을 나누며 2020년 서울 해방촌에 그들만의 둥지를 틀었다.

유림은 짧은 머리의 나라를 우스갯소리로 ‘김천에서 상경한 빡빡이’라 부르지만, 막상 나라의 SNS에 들어가보면 그녀보다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스친다. 나라의 직업은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모델, 스타일리스트, 패션 인플루언서. 그녀의 SNS에 최근 올라온 한 영상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 겨울 파리 패션위크에 갔을 때 짧은 매니페스토 영상을 제작했어요. 제목은 ‘쿼런틴 에세이’로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영상은 제가 사고사로 죽는다면 자살로 증언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에요. 이 사회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바뀌는 사회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죠.” 나라가 말했다. 나라와 유림은 여전히 퀴어를 둘러싼 부정적 시선이 깃든 사회 속에서 자신이 바이섹슈얼임을, 레즈비언임을 당당히 선언하며 사는 ‘오픈리 퀴어’다. 이들의 이야기는 퀴어 시각예술 모임 ‘오버라인’의 SNS에 연재된 ‘김손도손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엔 여성으로 여자 애인과 사는 삶, 가족과의 유대, 커밍아웃 스토리 등이 담겨 있다. “SNS에 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곧 LGBTQ 인권 향상에 일조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한때 ‘남자를 만나야 할까?’란 생각을 했던 적도 있어요. 타인의 눈에는 남녀 관계가 당연하고, 그게 사회 제도에 편입하기에 유리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퀴어로 당당히 살아가는 저를 보며 큰 용기를 얻는다고.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당당히 살아가는 저를 보고 용기를 얻는 사람이 더 생긴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나라가 말했다.

두 사람이 둥지를 튼 해방촌의 월세집으로 이사를 온 날, 나라의 어머니인 순분 여사는 말했다. “몸집을 키워가면서 점점 큰 집으로 이사하는 집게처럼, 우리 딸내미가 독립해서 알아서 잘 성장하는 것이 고마워.” 누군가에겐 단출한 살림에, 소박한 집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에게 집은 순분 여사의 말처럼 ‘큰 집’이다. “사실 집을 보러 다닐 때 선택지가 좁았어요. 둘 사이 전세 대출을 한 번에 묶을 수 없으니 월세로만 알아봐야 했거든요.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불편한 것을 넘어서서 너무 슬프고 화나는 일이에요. 누구에게는 당연한 일을 저희는 싸워 쟁취해야 하니까요.” 유림이 말했다. 유림이 말하길 둘은 타고나길 커다란 욕심과 목표가 없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사랑이 사회 속에서 인정되길 바라는 욕심만큼은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다. “집에 처음 입주한 날 나라가 제게 물었어요. ‘너 나랑 결혼해줄 거야?’ 저는 대답했죠. ‘우리가 만난 지 2년 정도 되면 생각해볼게!’ 그리고 이렇게 2년이 흘렀네요. 이제는 더 먼 미래를 꿈꿔요. 훗날 나라와 시골로 내려가 유유자적하니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요. 우리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요.” 유림이 말했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민현우, 김재민
스타일리스트
박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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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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