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이 생전 화첩, 메모첩, 서신 등에 남긴 소박한 기록을 엮은 단행본 <윤형근의 기록>이 출간됐다.
1999년 8월 29일, 백발이 성성했을 일흔둘의 윤형근이 일기장을 펼쳐 이 같은 문장을 써 내려갔을 것을 상상한다. ‘예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의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 학술적인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행동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림(예술)은 인생을 살아가며 쌓은 경험이 곧 그림 속에 있어야 한다.’ 예술가가 하루하루 자신이 느낀 감정을 내밀하게 적었을 기록물은 그 작가의 세계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이자, 동시에 그 자체로서 훌륭한 문학일 것이다. 그래서 윤형근이 생전에 남긴 드로잉, 편지, 수첩, 사진 등 소박한 기록을 엮은 단행본 <윤형근의 기록>은 그를 읽는 새로운 지표로 다가온다. 지난2년간 유족이 관리하는 서교동 작업실에서 수집한 글 300여 점, 미공개 드로잉 이미지 70점을수록한 책을 펼치면 그가 동료 예술가와 떠난 외국 여행담, 아버지라 불렀던 장인 김환기 화백과의 추억, 아내와 아들에게 쓴 정다운 편지, 작품의 토대가 됐을 에스키스 등이 소개된다. 책을 찬찬히 넘기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대목도 마주하게 된다. ‘오늘 처음 맑음. 우환 형과 화랑가 구경. 현대미술에 회의를 갖다. 미술은 이제 끝났는가?’ 아무래도 1975년 3월의 윤형근은 화백 이우환과 현대미술의 미래를 잿빛으로 점쳤나 보다. 책의 편집자이자 PKM갤러리대표 박경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번에 책을 편집하며 더 확실하게 이해되고 다가온부분이 있어요. 윤형근은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구분해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생전 늘인간됨 자체가 작품이고 진실, 선함, 아름다움 중 최상의 경지가 진실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은 작가가 남긴 기록 전면에 깔린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도와 품격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한 선비 미학의 최고의 현대적 계승자가 윤형근임을 책을 엮으며 다시금 확인했죠.” 더불어 책에서 특히 주목하면 좋을 두 기록에 대해서도 말했다. “66페이지에 실린 작품을 보면 현대적 구도 안에 엄버(Umber) 컬러의 농담 조절, 여백의 조화에서 큰 공간적 울림과시적 서정성을 느낄 수 있어요. 윤형근의 커다란 작품 세계를 압축해놓은 소품 드로잉으로 동서양 미학이 결합하여 한 지점에 모인 듯한 작품이에요. 90페이지의 이미지는 윤형근의 컬러가 블루와 엄버 두 가지 색의 혼합으로 이뤄지기 전, 블루 계열로만 시도했던 드로잉입니다. ‘천지문’ 시리즈 이전 윤 화백의 작품 세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죠.” <윤형근의 기록>의 출간을 기념해 메모첩 중 3점을 재현한 실물 복각판과 회화 작업 이미지로 제작한 아트 프린트 1종을 함께 묶은 특별한 아트 패키지도 출시했다. 이제 이 시집과도 같은 기록물을 머리맡에두고, 틈틈이 꺼내 읽으며 그의 세계를 맛볼 일만 남았다.
- 패션 에디터
- 김신
- 사진
- 김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