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날 [이찬원, 지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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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트로트의 힘을 실감하게 하는 가수 이찬원. 기나긴 역사 속에서 늘 동시대 패션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디자이너 지춘희. 그들은 어째서 함께 <더블유>와 만났나. 

디자이너 지춘희가 디자인한 베이지 투피스의 울 싱글버튼 재킷과 와이드 팬츠를 입은 이찬원. 위트 있는 타이핀과 선글라스를 더해 뉴트로 룩을 완성했다.

미스지컬렉션의 디자이너 지춘희.

화보 촬영과 인터뷰를 위해 성수동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향하는 날 오전, 하늘의 극적인 변화를 봤다. 아침까지 비를 뿌리며 우중충하던 하늘이 선명한 하늘색과 뭉게구름 사이로 화사한 볕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준비된 약속처럼, 기분 좋은 이벤트를 알리는 신호처럼. <더블유>가 주선한 가수 이찬원과 디자이너 지춘희의 만남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모든 일의 시작은 물론 <미스터트롯>이다. 작년 봄, 가요계의 판도를 바꾼 <미스터트롯〉의 Top 7 중 임영웅, 영탁, 장민호, 김희재는 그들 최초의 화보를 <더블유>와 함께 촬영했다. 당시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가장 바빴을 일곱 명을 한날한시에 모두 모으는 건 불가능이었다. 각 팬클럽들에게서 <더블유>를 대량 구매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연락을 받으며 ‘미스터’들의 저력을 곱씹은 시간을 지나 어느 날, 디자이너 지춘희가 이찬원의 열혈 팬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매 시즌 서울패션위크를 비롯하여 올봄에 선보인 2021 F/W 프라이빗 쇼 등을 통해 늘 미스지컬렉션이라는 동시대 패션으로 존재하는 지춘희, 그리고 화제를 일으킨 <미스터트롯> 팀의 화보에 미처 함께하지 못한 이찬원. 잡지사는 세상에 흩어지고 말 단서 하나를 낚아채 기어이 일을 벌이는 곳이다. <더블유>와 지춘희는 과거 ‘디자이너와 그의 뮤즈가 된 여자 셀렙들’이라는 테마로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벌인 전력도 있다. 이찬원이 드디어 그의 이름으로 신곡을 내고 화보라는 새로운 작업을 추진하기 좋은 타이밍이 왔을 때, 우리는 지춘희를 찾았다. “제가 찬원 씨 옷도 만들게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 만남의 케미스트리와 결과를 종잡을 수 없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성수동에 자리한 갈색 벽돌 건물은 미스지컬렉션의 생산 공장 역할을 한다. 디자인실과 원단 보관실 및 여러 사무 공간이 층층이 들어선 건물 내부는 그저 공장이라고 부르기엔 모던하며 채광도 좋다. 지하에는 성수동의 인구 밀도와 젊음에 공을 세운, 그 유명한 블루보틀이 입점해 있다. 웬만한 촬영 스튜디오보다 여건이 좋은 이 장소 한켠에서 이찬원이 메이크업을 받으며 말했다. “저는 신곡을 발표하면 주변에서 이렇게 연락이 많이 오는 건지 몰랐어요.” 8월 25일 싱글 ‘편의점’을 발표한 이찬원은 아직도 얼얼하다는 말투였다. “드라마 OST에 참여하면서 ‘시절인연’이라는 곡을 내본 적은 있지만, 제 신곡을 발표한 건 처음이거든요. 발표 당일 스케줄을 소화하며 이동하는 중간중간 답장을 부지런히 해도 다시 폰을 보면 축하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어요. ‘내 노래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줄까’ 싶었는데 음악 방송에서 1위도 해보고, 놀랐죠.”

이찬원은 그동안 <사랑의 콜센타>와 <뽕숭아학당> 등의 방송 활동을 하며 다양한 노래를 불렀다. 이 방송 출연진은 토크뿐 아니라 노래 부를 일이 많기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대기실에서 입 자체를 열지 않는다고 한다. “목을 최대한 아끼는 거예요. 그러다 ‘큐’ 사인이 떨어지면 그제야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죠. 녹화 시간 동안 있는 힘껏 무대를 해내고, 녹화가 끝나면 장렬히 전사할 것처럼(웃음).” 1996년생인 이찬원은 <미스터트롯>의 Top 7 중 미성년자인 정동원을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는 그와 친한 동갑내기 친구 상연이 리더로 있는 더보이즈나 온앤오프 등의 그룹과도 가까운 사이지만, 아이돌이 다수인 음악 방송 현장과 대기실이란 그에게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다. 아이돌과 아이돌 팬덤의 전유물이었던 음악 방송에 트로트 가수가 출연하고, 거기서 ‘편의점’이 1위에 올랐다는 것은 젊은 트로트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경쾌한 리듬에, 현대인의 삶이 녹아 있으면서도 해학적인 신곡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하루 길었다 / 퇴근길이 고되구나 / 맥주 한 캔 생각난다.’

모던한 분위기의 리버서블 가죽 재킷과 셔츠, 와이드 팬츠는 모두 미스지컬렉션 커스터마이즈 제품.

지춘희는 <미스터트롯>이 방영 중일 때부터 ‘이찬원 전도사’가 되어 주변에 투표를 권했다. “트로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미스터트롯>이 바꿔놨죠. 저는 <미스터트롯>이 성공한 요인에 이찬원과 정동원의 몫이 크다고 생각해요. 기성 세대나 기존에 활동하던 가수가 아니라 새로운 인물이었죠. 세상에 이미 나와 있던 곡을 새로운 인물이 불렀을 때의 신선함이 있었고요. 덕분에 트로트를 즐기는 층이 다양하고 넓어졌다고 봐요.” 지춘희는 몇 년 전 청담동 미스지컬렉션 사옥 1층에 갤러리G라는 공간을 열고, 파리에서 오래 활동한 박승순이라는 작가의 작품들과 미스지컬렉션 의상, 또 그녀가 좋아하는 핀율 의자 등을 매치해 전시한 적이 있다. 디자이너에게 미술이 색감과 소재에 대한 영감을 자극하기 좋은 대상이라면, 음악은 영감의 길목이기도 하면서 그저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아이돌 음악이 참 멋지고 흥겨워도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은 거지 음악을 따라 부르긴 힘들잖아요. 후크송의 특정 문구 정도가 귀에 들리는 걸 제외하면 가슴으로 와닿는 가사도 많지 않고요. 트로트는 오랫동안 우리 정서와 감성을 건드려왔다는 점에서 김치 같아요. 김치를 잘 안 먹는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김치의 맛을 알게 되니까.”

지춘희는 이찬원의 거의 모든 것을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내가 그런 걸 했었나’ 하는 것까지 다 기억하고 계세요. 동생한테 지춘희 선생님이 내 팬이라고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나는 이찬원이 작년 가을 대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 특별 해설위원으로 참여해 ‘아주 기가 막힌 중계 실력’을 뽐냈다는 것도, 이찬원의 부모님이 올해 카페를 차렸다는 것도 지춘희를 통해 먼저 들었다. 그 카페가 자리한 대구의 송해공원 일대는 호수 풍경이 워낙 예뻐 요즘 대구의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처음엔 물론 음악을 통해 이찬원을 알고 좋아하기 시작해서 점점 사람 이찬원에게도 관심이 갔어요. 그러다 더욱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어요. 코로나19가 이제 막 퍼지던 초기였는데, 찬원 씨가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을 올렸어요. 단 두 문장 안에 이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나 있었죠.”

모두가 처음 맞는 재난 시국의 혼란스러움이 있을 뿐, 응원 메시지를 챌린지 식으로 전하는 움직임 같은 건 싹트기 전이었다. 그때 이찬원은 이런 포스팅을 올렸다. ‘코로나19확산 방지를 위해 의료 지원 및 방역 업무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계시는 모든 의료진분들 및 관계자분들 힘내시고, 모든 분들이 희망을 되찾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울러 오늘 저희의 무대가 많은 분들께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조심스레 전달합니다.’ 응원과 소망의 메시지, 이어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무대라는 다른 세상을 내보이고 사는 가수로서 덧붙이는 말. 이찬원이 쓴 글이 두 문장이었다는 점을 정확히 기억하는 지춘희는 말했다. “앞뒤가 맞고, 꽉 찬 사람이라는 걸 느꼈죠. 한마디로 이찬원은 자기 정리가 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블루와 브라운의 색상 매치가 인상적인 미스지컬렉션의 팬츠 슈트. 디자이너 지춘희는 꽃무늬 셔츠로 경쾌한 무드를 더했다.

지춘희는 이런저런 인터뷰를 통해 일에 있어 ‘오거나이즈’ 의 중요성을 말하곤 했다. ‘불안해서 설치는 사람을 보면 대개 자기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 지춘희의 말은 그 문구를 포스터로 뽑아 대문에 붙여두고 싶을 정도다. 단 두 문장으로 사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한 것은 지춘희가 이찬원에게 워낙 애정 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일까? 나는 마침 이찬원과 인터뷰하는 동안 어떤 질문을 던지든 자기 생각을 잘 정돈해서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에, 지춘희가 ‘자기 정리’라고 했을 때 속으로 좀 놀랐다. 글에 무언가를 진실되게 담아낼 줄 아는 것은 필력의 문제와는 다른, 생각과 마음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지춘희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짤막한 에피소드를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들의 공통분모에는 ‘사람’과 ‘마음 씀씀이’, 그리고 ‘여행’이 있었다. 지춘희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고, 지춘희는 ‘내 사람들’ 을 사려 깊게 챙긴다는 이야기. 또 어느 여행지에 가든 지춘희에게 물어보면 그 지역의 맛집과 갈 만한 스폿을 꿰고 있기에 신기하다는 이야기(지춘희는 작년 초 남미의 파타고니아를 2주 정도 여행했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그나마 아직 참을 만하다고 했다. 지구촌 곳곳을 누볐지만 조사까지 다 해두고 미처 못 가본 곳은 스리랑카다). 각종 장이며 김치부터 시작해 많은 것을 주변과 나누고 챙기는 그 마음에서 ‘엄마’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다양한 연령대와 두루 어울리며 인간관계 폭이 넓은 그는 모두의 ‘친구’ 같기도, 혹은 모두가 인정하는 ‘동네 대장’ 같기도 했다. 잘 먹이고 베푸는 일을 좋아하는지 묻자 지춘희는 말했다. “좋은 걸 같이하는 게 좋은 거죠. 내가 좀 더 아는 것, 좀 더 겪어본 것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거.”

좋은 걸 같이하는 게 좋은 디자이너라면,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기꺼이 옷을 만들고 입히는 일도 큰 즐거움일 것이다. 지춘희가 이찬원을 위해 제작한 옷은 풀 착장으로 치면 네 벌 정도다. 그러나 매치하는 경우의 수에 따라 착장 수는 그보다 훨씬 불어난다. 이를테면 위아래가 모두 검정인 팬츠와 재킷에, 레이어드하거나 빼면서 룩의 변화를 줄 수 있는 가죽 베스트는 또 다른 포인트가 된다(뒤집으면 흰색 베스트로도 입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 고유의 스타일이 연상되는 코트에서 어깨에 덧대어진 케이프를 떼어내면 심플한 코트가 남는다. 어떤 하의를 매치하느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질 클래식한 헤링본 재킷, 레트로풍이면서 재미난 콘셉트를 연출할 수 있을 듯한 통 넓은 바지, 두께가 얇고 몸선을 따라 깔끔하게 떨어지는 어두운 색상의 가죽 재킷과 밝은 색 팬츠, 그리고 유일하게 조금은 ‘일탈’의 이미지를 부여한 잔잔한 꽃무늬 셔츠 등등. 이찬원은 새 의상을 입고 피팅룸에서 나올 때마다 순한 모범생처럼 정자세로 서 있었고, 지춘희는 매무새를 단정하게 만져주었다. “어휴, 저는 뭐 다 마음에 들어서… 제가 코트류를 좋아하는데 코트까지 만들어주셨네요!” 사람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인 바, 옷에 맞춰 모자와 구두까지 제작한 지춘희다.

옷에 관한 소개는 <더블유> 유튜브 채널에 공개할 영상에 담겼다. 이 외에도 평생 여자 옷을 만든 지춘희에게 이번 ‘비공식 신작’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나 긴박한 과정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남자 슈트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잘 만들어주고 싶었지. 우리 옷이 원단은 좋아요.” 정도만 언급할 뿐이었다. 지춘희는 쇼 무대에서도 피날레를 장식한 후 환호 속에 길게 인사하기보다 잠깐 얼굴만 비추고 사라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지춘희가 예능 <집사부일체>에 출연했을 때도 자주 스치는 그의 쑥스러운 표정을 본 것 같다. “이찬원 씨 성정이 워낙 반듯한 것으로 알아요.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그런 점이 보이죠. 사람의 성향은 그 사람이 입는 옷에도 드러나게 돼 있어요. 평소 찬원 씨의 옷차림을 봐도 장식적인 요소가 많거나 드러내는 게 많은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죠. 나도 그런 성향이에요.”

지춘희는 이찬원의 모든 무대를 좋아하지만, 특히 그가 나훈아의 ‘울긴 왜 울어’를 불렀을 때 보인 젊은이다운 패기와 역동적인 제스처를 다시 볼 수 있으면 반가울 거라고 말했다. “찬원 씨는 발라드도 잘하고, 한 가지 스타일에 국한되기에는 아까운 가수죠. 찬원 씨라면 블루스 요소가 있는 노래도 잘 소화할 것 같아요.” 가수 이찬원에 대한 분석과 파악을 예전에 마친 ‘찐 팬’ 지춘희가 의견을 말하자, 이찬원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제가 블루스를 좋아해요! 만약 다시 <미스터트롯> 경연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블루스 곡을 하나쯤 해보고 싶다고 종종 생각해요. ‘안 돼요 안 돼’ 같은 곡. 장민호 형의 ‘연리지’도 그런 풍이고요. 경연 때는 제가 잘할 수 있는 신나는 음악 위주로 했거든요.”

이찬원은 자신이 노래할 때 일명 ‘꺾기’를 자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가수에 따라 간드러지거나 대차게 꺾는 그 기술 말이다. “제가 정통 트로트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기교를 많이 구사하는 편이죠. 우리 가수들끼리는 그런 걸 ‘뒤집는다’라고 표현해요. 그런데 그게 제 취향이고 저한테 어울린다고 판단해서 좋아하는 것뿐이거든요. 그런 속성 하나 없이 트로트로서의 요소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가수가 바로 임영웅이에요. 분명 트로트를 하는데 꺾지도 않고, 잔기교를 부리지도 않아요. 제가 영웅이 형 노래를 들으면서 자주 울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흔히 트로트만의 기법이 따로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가수의 음색이나 감정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결국 모든 장르의 가수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일 테고요.”

트로트를 향한 관심과 팬덤의 정도가 달라지면서 이 장르에 대한 이해나 오해의 문제도 짚을 만해졌다. 작년과 올해, 인터뷰로 만난 두 명의 가수가 트로트를 언급한 순간이 있다. 첫 번째는 아이유다. ‘<미스터트롯>을 보면서 자막으로 뜬 가사들을 유심히 보니, 트로트가 이 정도로 무게 있는 말을, 이런 소리와 표정에 툭툭 띄워 부르는 음악이었구나 싶어 새롭게 이해하고 있다. 내공이 대단해지면 무조건 트로트에 도전해보고 싶다.’ 두 번째는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구축한 가수 특집 때 만난 태진아다. ‘사람들이 자꾸 트로트와 한을 연결 짓는데, <미스트롯 2>에 출연하는 초등학생 둘이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른다. 아홉 살 인생에 무슨 한이 있나? 그들이 잘하는 건 가수로 타고난 재질이 있는 데다 무수한 노력을 했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이찬원은 공감하며 말했다. “트로트는 긴 역사를 지녔고, 전쟁의 아픔을 담은 곡이 널리 사랑받으며 출발한 장르잖아요.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옛 트로트에 이런 유의 가사가 많아요. 그런데 멜로디와 리듬만 떼어놓고 보면 제법 쿵짝쿵짝 신나는 곡도 많단 말이죠. 저는 트로트가 흥과 한이 공존하는 장르라고 말을 해요. 한을 흥으로 승화시킨 것. 그게 트로트의 속성이 아닐까…”

이찬원, 지춘희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궁금했다. 한국 패션 디자인의 역사이자 현재진행형 디자이너인 지춘희가 이찬원의 나이 즈음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제가 스물일곱에 미스지컬렉션을 론칭했으니까, 찬원 씨 나이인 스물여섯 때는 한창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겠네요. 명동 사보이 호텔 건너편에 80평짜리 의상실을 오픈해서 다들 ‘저건 뭐냐’며 놀랐죠. 그 시절 명동의 가게들은 규모가 작았거든요.” 지춘희와 당시 젊은 디자이너들이 1990년대 청담동 시대를 열어젖히기 전, 당대의 멋쟁이들이 몰려들던 명동 거리. 어느 원로 디자이너가 ‘지춘희의 옷이 하도 세련돼서 노련한 디자이너일 줄 알았는데 20대라기에 놀랐다’고 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엄마의 영향이 컸어요. 엄마 젊은 시절에, 이모가 길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엄마를 발견하고 창피해서 숨은 적이 있대요(웃음). 옷차림이며 매니큐어며, 그 옛날에도 아주 튀는 분이었다는 뜻이죠. 또 잘 입히고 잘 먹이셨어요. 음식 하는 것도 좋아하셨거든요.”

지춘희가 고현정, 심은하, 이영애, 장진영 등과 호흡을 맞춰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선보인 스타일(지춘희는 영화 〈그대 안의 블루>로 대종상영화제 ‘의상상’을 수상한 적도 있다), 이나영이 원빈과 밀밭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입은 웨딩드레스 등이 여배우의 매력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한 사례였다면, 몇 년 전 론칭 시 홈쇼핑을 강타한 지스튜디오와 미스지컬렉션의 고객이 많다는 사실은 디자이너 지춘희의 힘을 증명한다. 연예인에게서, 또 패션 화보 속에서 빛나는 감상용 옷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입기 위해 사는 옷. 그를 가까이서 오래 본 <더블유〉 편집장은 지춘희가 지금껏 선보인 디자인에 대해 ‘흔들림이 없는 옷’ 이라는 표현을 썼다. 예나 지금이나 세련되고, 과거 큰 영광을 누린 디자이너들이 시간이 흐르며 긴장을 놓기도 하는 데 반해 지춘희는 ‘평생 긴장하는 사람’이라고. “디자이너의 생각으로 옷을 만들어놓으면, 입는 사람은 또 입는 사람의 생각으로 옷을 골라요. 한마디로 자신이 옷을 통해 드러나죠. 뭘 입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택하는 거지, 자기 표현에는 정답이 없어요. 다만 제가 디자이너로서 지향하는 바는 있죠. 일단 ‘싸구려처럼 보이진 말자’예요. 같은 걸 표현해도 좀 더 귀티가 나면 좋잖아요.” 지춘희는 패션이란 홀로 창작적인 무엇이 아니라 사회와 함께 가는 ‘사회 현상’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돌아가는 사회를 신문과 유튜브로 부지런하게 감지하는 이 베테랑은 그 성실함을 자연히 ‘팬심’과도 접목한다. “내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유튜브에서 이찬원에 대해 찾아볼 거예요, 아마.”

위트 있는 타이핀을 더한 베이지 투피스 차림의 이찬원.

<미스터트롯>을 히트시킨 TV조선은 요즘 또 일을 벌이고 있다. 춤, 노래, 작곡과 작사,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불문하고 예비 스타를 오디션으로 선발한다는 프로그램, <국민가수>를 준비 중인 것. 공개된 출연진 리스트를 확인하고서 그 양적 공세와 스케일에 진심으로 놀랐다. 이찬원은 트로트 분야의 마스터로 이 방송에 참여한다. “무대 연출이든 상금이든 어마어마한 규모가 될 것 같아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정말 많구나, 나는 가수여도 함부로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느껴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은 이찬원은 자신이 방송을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기는 건 분명하다고 했다. “제가 10년 이상 간절히 갈망한 게 지금의 무대예요. 그 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저는 이미 성공했죠. 하지만 또 다른 목표가 생겨요. 언젠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 만한 히트곡을 내고 싶어요. ‘남행열차’, ‘네박자’, ‘옥경이’ 같은 히트곡 말이에요.” 이찬원이 메가 히트곡을 내고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하는 그날이 오기까지, 한국의 한 대표적인 디자이너이자 네트워크의 여왕이 그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든든함이 되어줄 것이다. “세상이 나아지면, 찬원 씨가 밖으로 자주 여행을 다닐 수 있길 바라요. 청춘일 때 돌아다니면서 많은 걸 봐두고 느끼면 좋거든요.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고요. 여행 정보나 맛집 정보 같은 거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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