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올림픽 히어로즈_근대 5종 [전웅태, 정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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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Never Ends 도쿄 올림픽의 막은 2021년 여름 내렸지만, 그 열기는 아직 채 식지 않았다. 모두를 넘어서 마침내 꼭대기에 오른 선수부터 당당한 ‘영 파워’를 보여준 선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자신이란 원석이 존재함을 증명해 보인 선수까지. <더블유>가 그라운드 밖에서 이들과 함께 특별한 레이스를 펼쳤다.

#W올림픽 히어로즈_근대 5종
 JUN WOONG TAE ∙ JUNG JIN HWA 

한국에서는 비인기 종목 중 하나였던 근대5종의 올림픽 첫 메달리스트 전웅태, 그와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한 정진화의 종목에 대한 열정과 긍지는 식지 않는다. 

왼쪽 전웅태와 오른쪽 정진화가 입은 승마복, 신발, 글러브는 모두 올림픽 유니폼.

산 넘고 물 넘어 말 타고 총 쏘고 칼을 휘둘러 도달하는 곳. 그곳에 영광과 메달이 있다. 영웅 서사 첫 구절이나 게임 프롤로그가 아니다. 나폴레옹 전령의 영웅담에서 유래한 근대5종은 펜싱, 수영, 승마, 사격, 크로스컨트리 5종으로 구성된다. 전쟁터에서 적을 찌르고, 강을 헤엄쳐 건너, 적의 말을 빼앗아 타며 총으로 멀리 있는 적을 제거하고, 적진을 돌파한다는 전쟁 서사가 녹아 있는 종목.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은 “근대5종 선수는 승리를 하든 못하든 우수한 만능 스포츠맨”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의 전웅태, 정진화 두 선수는 그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종목에서 한국 최초로 나란히 동메달과 4위를 거머쥐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한국 근대5종 선수가 첫 출전한 이래 첫 메달이자, 100여 년이 넘는 올림픽 근대5종 역사에서 아시아 국가가 메달을 획득한 3번째 쾌거다.

마지막 스퍼트를 내며 동메달을 건 전웅태와 그의 등을 보고 달리던 선배 정진화의 뜨거운 포옹은 많은 이의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은 여전히 열기의 여운이 식지 않은 채였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다는 게 아직 얼떨떨하다’는 전웅태와 달리 정진화는 보다 여유 있게 ‘인기를 실감하기는 한다,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다’라며 시원스레 웃는다. “인스타그램 DM으로 온 축하 메시지들을 읽으면서 눈물도 흘리고 그래요. ‘아씨, 왜 울어’ 하면서 눈물 닦고 잠들고. 가장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코로나19 시국이라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데 마지막까지 후배의 등을 밀어주듯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힘이 생겼다, 덕분에 나도 힘을 내보겠다, 이런 얘기였어요. 내 오랜 선수 생활에 이런 빛이 들어오는구나 싶어 뿌듯했죠.” 사실 그들이 잘한 건 이번 올림픽에서뿐만이 아니다. 전웅태는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세계 랭킹 1위로 MVP까지 차지한 선수고, 정진화는 2017년 한국 최초로 카이로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딴 후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에서 금은동을 고루 수집해온 선수다. 뒤늦은 갈채에 선수들은 가뭄 끝 단비를 맞는 듯하다.

“목이 너무 말랐어요. 매년 세계선수권에서 메달을 땄고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그 소식이 뉴스 자막으로 2초 만에 쓱 지나가는 게 전부였어요. 근대5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유튜브도 하고, 사람들을 붙잡고 하나하나 설명하곤 했어요. 올림픽 메달만 있으면 더 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달려왔죠. 그래서 지금 꿈 같아요. 왜 ‘꿈 같다’는 말이 있는지 느끼고 있어요.” 정진화의 벅찬 마음에 전웅태 역시 공감한다. “저희가 리우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는 방송 중계조차 되지 않았거든요. 우리 선수들의 높아진 경기력으로 드디어 중계가 된 것, 그리고 코로나19로 올림픽이 미디어에 더 노출되고 많은 관심을 받은 것도 한몫한 것 같아요.”

정진화가 입은 남보라색 슈트와 터틀넥 니트, 슈즈는 모두 Berluti 제품. 벨트와 승마 안장은 선수 개인 소장품.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전웅태는 인상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얼마나 두꺼운 벽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두드렸고, 저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근대5종의 동메달이라 더 값지다”라고. 개인의 승리를 넘어선 종목의 승리. 선수 개인을 뛰어넘는 그 강력한 유대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근대5종은 개인 종목이지만 팀플레이에 가까울 정도로 함께 훈련해요. 다른 종목보다 덜 알려졌고 선수도 적기 때문에 더 똘똘 뭉치고요. 이 재밌고 익사이팅한 걸 사람들이 왜 몰라줄까? 하면서.” 전웅태의 종목 자랑에 정진화가 덧붙였다. “종합체육인이자 균형 잡힌 인간을 지향하는 스포츠예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수죠. 한 조각 빠져도 균형만 잡으면 버티는 젠가 게임처럼, 근대5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거든요.” 스포츠계 폭력을 반대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기도 한 정진화는 ‘근대5종에는 선후배 간 군기가 없다’고도 했다. “선후배 할 거 없이 서로 돕고 조언을 구해요. 동생들이 형들 엉덩이 한번 툭툭 두들기기도 하고. 경기 때 다른 선수들을 만나면 후배가 선배에게 ‘형님’ 하면서 깍듯이 인사하는 그런 거 없어요. 개인 종목에 이런 문화가 있으니 다들 신기하다고들 그래요.”

건강한 스포츠 문화에서 메달이란 결실이 맺혔다. 전웅태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제 메달은 진화 형과 감독님, 코치님들, 한국의 모든 근대5종 팀이 함께 딴 메달이에요. 새벽 6시부터 밤 9시까지 5개 종목을 감독님과 같이 뛰어요. 코치 선생님만 9명이고, 올림픽 훈련을 위해 다른 시, 도에 있는 근대5종 선수들까지 함께 뛰어줬어요. 그 모든 이들의 노력이 모여 거둔 결과죠.” 훈련량에 대해서라면 정진화도 할 말이 많다. “거의 매일 5개 종목을 훈련하는 걸 보면 외국 선수들은 살인적이라며 놀라요. 서구인 체형과 신체 능력에 유리한 종목이지만, 우리는 그들 이상의 훈련량, 종목에 대한 깊은 이해로 승부했어요. 체격이 작아도 이젠 견제의 대상이죠.” 5개 종목을 다 잘해야 하는 이 어마어마한 수륙양용 종합체육인들은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살아남을 것 같다. 무인도도, 〈헝거게임〉, <메이즈 러너> 같은 영화 속 서바이벌 세계에서도. 전웅태가 “요리는 못하지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저 생존게임 좋아해요. 근대5종 선수들은 다 잘할걸요?” 라고 하자, 정진화는 자기라면 그런 건 마음이 여려서 못한다고 손사래를 친다. “혼자보단 같이 살아남아야죠. 근데 웅태는 잘할 거예요. 쟨 여우거든요, 하하.”

전웅태가 입은 카키색 저지 톱, 데님 팬츠, 러너 스니커즈, 벨트는 모두 Balenciaga 제품. 펜싱 칼은 선수 개인 소장품.

이 두 선수를 말할 때는 비인기 종목이 거둬낸 승리뿐 아니라 뜨거운 동료애와 스포츠맨십에 대해서도 마땅한 언급이 필요하다. 3, 4위로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한 직후, “이 메달은 혼자 딴 게 아니라 진화 형과 함께 딴 것”이라던 전웅태의 인터뷰와 화답하듯 “내 앞에 있는 선수가 전웅태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라고 한 정진화의 인터뷰는 그들의 포옹만큼이나 뜨거웠다. “원래 시합이 끝나면 서로를 찾아가 안아주는 게 우리끼리의 암묵적인 약속이니, 저는 ‘웅태 어딨어’, 웅태는 ‘진화 형 어딨어’ 하고 찾았죠. 그렇게 포옹했는데 웅태가 메달을 땄다고 생각하니 울컥 하더라고요. 엄청 독한 술을 마시고 쑥 내려가서 울컥 하는 것처럼. ‘고맙고 수고했다’, 그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었어요.” 전웅태는 지금도 감정이 살짝 격앙되는 듯했다. “5년을 준비한 경기가 막을 내리고 감정이 많이 올라왔는데, 형이 ‘축하해’라고 해주니까 북받치더라고요. 진화 형은 제 롤모델이자 정신적 지주예요. 전부터 한국 근대5종 ‘최초’를 쓰는 사람이었거든요. 한국 첫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였고, 그 이후 국가대표팀의 사기가 올라서 승승장구했죠. 제겐 역사적인 사람이에요. 앞에서 이끌어주고, 쓴소리가 필요할 땐 상처 받지 않게 말해주기도 하고요.” 한편 정진화는 메달이 결정되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선의의 경쟁을 한 결과지만, 둘 다 포디엄에 오르자는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했어요. 하지만 웅태 혼자라도 올라가니 ‘한국 근대5종,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가 됐어요.”

왼쪽 전웅태와 오른쪽 정진화 입은 민소매 티셔츠, 팬츠는 Givenchy 제품. 글러브는 선수 개인 소장품.

근대5종에 노력과 실력 외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행운이다. ‘운’까지 쳐서 근대6종이라 불러야 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적의 말을 빼앗는 것에서 유래했기에 말을 무작위로 주고, 교감할 시간을 단 20분만 준다는 규칙은 가장 운이 필요한 대목.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자 개인전 1위였던 독일 선수 아니카 슐로이가 탄 말이 꿈쩍 하지 않은 탓에, 선수가 채찍질을 하며 서럽게 울던 모습이 큰 화제가 됐다. 경기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말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고, 선수는 승마에서 0점을 받고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정진화는 가슴이 아파 울면서 그 경기 장면을 봤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근대5종이에요. 피할 수 없는 거죠. 삶처럼 계속해서 굴곡이 있고 위기가 닥쳐요. 저 역시 선두에 있다 떨어질 때도, 순위권 밖에서 싸우다 메달을 딸 때도 많았어요. 그래서 근대5종이 재미있는 거예요.”

운마저 종목임을 이해하고 있기에, 정진화는 5종의 종목 중 혼자가 아닌 말과 함께해야 하는 승마를 가장 사랑한다. “말에게 부탁하는 거죠. 말과의 호흡이 맞아 장애물을 완벽히 넘었을 때, 나만 잘한 게 아니라 말도 같이 잘했을 때 기분이 두 배로 좋아요.” 한편, 전웅태는 앞서 다른 선수를 낙마시킨 말을 배당받는 불운이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말을 데리러 가자 마주가 울면서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고요. ‘돈 워리’라고 멋진 모습 보여주겠다 했죠. 주춤대긴 했지만 말에게 템포를 맞춰주니 뛰더라고요. 편안하게 하려 했어요.” 두 반려견을 키우는 전웅태는 그 마음을 안다. “칭찬을 많이 해줘요. 고삐도 아프지 않게 당기고요. 동물은 아프다고 말을 못하잖아요. 저희 강아지도 그렇거든요.” 불운에 넘어지지 않은 전웅태는 사격과 육상을 동시에 하는 마지막 레이저런에서 역전승을 거둔다. 근대5종의 피날레이자 하이라이트, 역전승과 반전을 좋아하는 전웅태가 근대5종에서 가장 사랑하는 종목이기도 하다.

정진화가 입은 패턴 니트 톱, 안에 입은 하늘색 터틀넥 톱, 글러브는 모두 Prada, 나일론 쇼츠는 1 Moncler × JW Anderson 제품.

어쨌거나, 전웅태는 자신이 잘될 걸 알았다. 네이버 선수 소개 영상에서 “제가 생각했을 때 저는 될 놈입니다”라 호기롭게 말하던 그는 메달을 따고 “될 놈은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것도 운명이니 자기 확신을 가져야겠다, 자신감을 표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난 될 놈’이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죠.” 그의 인스타그램 프로필 소개 문구는 ‘근대5종 미친놈’이다. “내 인생을 쏟아부은 종목이니까 미쳐야죠. 보여주기 식이기도 해요. 제가 제 SNS를 많이 보거든요. 볼 때마다 ‘아, 나는 근대 5종 미친놈이다!’라 생각하는 거죠. 흐흐흐. 올림픽 끝나고는 잠시라도 쉬어보자고 진화 형과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단 며칠 만에 이렇게 연습 안 해도 되나, 새벽에 나가 육상할까, 서울에선 승마 어디서 할 수 있나 고민하고 있다니까요.”

전웅태가 입은 검정 슈트, 안에 입은 보디슈트, 슈즈는 모두 Prada 제품.

근대5종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종목으로 떠오른 지금, 정진화는 열려 있고 전웅태는 야심만만하다. 먼저 정진화가 말했다. “내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시상대에 오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요. 파리 올림픽에는 나이 때문에 대표팀을 은퇴할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저는 지금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전웅태는 자신이 시기를 잘 타고났노라 말한다. “1964년 한국 근대5종 선수가 올림픽 첫 출전을 했던 도쿄에서 2021년 메달을 땄고, 3년 뒤에는 근대5종이 탄생한 곳인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려요. 저도 진화 형도 이게 끝이 아니에요. 서양인을 넘지 못하는 벽, 비인기 종목이라는 벽을 계속 두드렸고, 넘어섰고, 이제 시작이에요.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번엔 운이 제 손을 들어줬지만, 다 주진 않아서 동메달을 주셨죠. 은메달,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거라고 생각해요. 다음엔 ‘역시나 한국 근대5종’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보여드릴게요.” 스포츠 선수로서 그들의 가장 큰 자긍심은 ‘종목 그 자체’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두 선수는 가뭄에 단비처럼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혹은 그 갈채 밖에서도, 계속해서 뛰고, 사격하고, 헤엄치고, 말을 타고, 펜싱 칼을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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