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고 푸른, 남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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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화면 너머로 본 희고 푸른 소년은 자라 올해로 스무 살이 됐다. 일곱 살 겨울, 배우의 길로 성큼 걸어 들어선 남다름은 아직도 볼 것이 , 느낄 것이, 알아차릴 것이 많다고 말한다.

시스루 소재 브이넥 니트와 실크 소재 카디건은 H&M X 토가 제품.

오늘 당신의 어머니가 촬영장에 함께했다. 당신이 포즈를 취할 때마다 말씀하시더라. “집에선 저런 애가 아닌데….”

하하.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변하는 것 같다. 평소에 없던 용기와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까.

어머니도 당신이 촬영만 하면 ‘끼’가 생긴다고 하더라.

원래는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다. 남들 앞에서 나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카메라가 돌면 주변을 크게 의식하지 않게 된다. 나도 이건 예전부터 좀 신기했다.

‘집에선 저런 애가 아니’라면, 보통 집에서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요즘엔 넷플릭스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가 화가시다. 남상운 화백. 전시회도 여셨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신다.

끼가 남다른 이유가 있었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서양화를 전공하셨다.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지내시다 결혼하셨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도 미술을 공부하고 있고. 어려서부터 그림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것 같다. 그래서 취미도 그림 그리기다.

주로 어떤 그림을 그리나?

요즘엔 소묘에 빠져 있다. 연필 하나로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게 매력적이더라고. 아버지 그림은 나와는 정반대 스타일이다. 화려한 색감의 유화를 재료로 연잎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작업을 하시거든. 언젠가는 내가 드라마 세트장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하신 적도 있다. 세트장은 어떤 목적 아래 만들어진 가짜인데 거기에서 진짜를 연출하려는 감각이 좋다고, 그걸 그림에 담아보고 싶다고.
당신을 2014년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본 기

강동원의 어린 시절로 등장했지? 그때 기억엔 똘망똘망하게 생긴 어린아이였는데, 지금은 얼굴선이 굵어진 것 같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니까. 7년이 지나 지금은 스무 살이 됐다. 요즘 그런 얘기를 제법 듣는 것 같다. 얼굴선에서 남자다운 느낌이 풍기기 시작했다고.

데뷔작이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다. 이후 특별 출연까지 포함하면 40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했다. 성인이 되기 몇 해 전까지 당신은 업계에서 ‘섭외 1순위 아역 배우’였다 들었다.

주어진 것에 열심히 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그런 호칭을…. 아주 어렸을 때 유아용품 브랜드 ‘아가방’의 사진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면서 여차여차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 사실 데뷔작이었던 <꽃보다 남자>는 일곱 살에 찍은 터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웃음). 장면, 장면이 문득 기억나는 정도랄까. 처음엔 대사도 없이 몽타주성으로 몇 장면만 필요하다며 캐스팅됐는데 감사하게도 반응이 좋아 신이 추가됐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었다.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많은 곳에서 찾아주셨고.

어려서 배우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서 뭔가를 배웠다면, 당신은 현장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을 것 같다.

그 말도 맞는데, 나는 최대한 학교에 다니려고 했다. 밤새워 촬영한 다음 날에도 어떻게든 학교에 나갔으니까. 사실 검정고시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보다 학교에 들어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배우 남다름이 아니라 학생 남다름으로 남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때만 누릴 수 있는 경험이 있고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으니까. 왠지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학교를 그만둔다면.

지금 돌이키면 그때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나?

그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더 그때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것 같다.

<꽃보다 남자>가 기억조차 어렴풋한 먼 과거의 일이라면, 당신이 스스로 배우임을 인지하고 작품에 임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였나?

2015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출연했을 때 기억이 유독 짙게 남아 있다. 그때 이방원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면서 마치 한 소년의 인생을 체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부터 감독님과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방향성을 잡아 갔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그런 식의 접근은 작품 활동 중 거의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대본에 없는 전사를 만드는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 기사를 찾아보면 제목에 이런 말들이 쏟아진다. ‘완벽한 아역.’ ‘이름처럼 남다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웃음).

오렌지 색깔 터틀넥과 모헤어 소재 니트, 팬츠는 모두 디올 맨 제품.

개인적으로는 2019년 드라마 <아름다운 세상>도 아끼며 봤다. 당신 얼굴에서 스치는 특유의 순수함, 선함이 맡은 배역(박선호)에 잘 묻어난 작품이랄까.

웃긴 건,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극 중 선호와 실제 내가 닮았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정작 나는 선호의 말과 행동이 너무 멋있어서 본받을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웃음).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둘을 닮았다고 하던가?

내 입으로 말하려니 좀 쑥스러운데…. 평소 정의, 선악에 관심이 많다.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분노가 생긴다. 그런데 선호도 굉장히 정의로운 친구거든. 그런 걸 보고 사람들이 닮았다고 한 것 같다.

그런 사람이 평소 인터뷰에선 꼭 한번 악역을 맡아보고 싶다고 하던데?

하하. 맞다. 악역 연기를 통해 배우로서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잠깐이나마 정의롭지 못하고 악한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으니까. 그것도 연기라는 굉장히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분명 그런 캐릭터로 살아보면 배우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내면에 쌓아뒀던 분노와 같은 감정을 연기로 풀어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세상>은 첫 주연 작품이었기에 더 뜻깊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배역이 있는 셈이니까.

뜻깊고 소중했지. 그런데 나는 아역도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왔다. 아역이든 주연이든 배우로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비슷하다. 다만 내 이름을 걸고 주연으로 작품에 참여할 땐 그에 걸맞게 책임과 부담이 커질 뿐이지.

지금 웹 드라마 <우수무당 가두심>을 촬영 중이라 들었다. 현 재 2회까지 공개됐는데, 1회는 벌써 조회수가 300만을 넘었더라.

재미있게 촬영하고 있다. (김)새론 누나를 포함해 출연진 대부분이 내 나이 또래다. 웃고 떠들고, 촬영 직전까지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찍고 있다. 이런 현장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예전엔 현장에 가면 나 빼고 전부 형, 누나거나 선생님이셨으니까. 또 밝고 통통 튀는 신을 찍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과거 작품에서 사연 있어 보이는 캐릭터를 많이 맡아서(웃음).

8월 개봉한 영화 <싱크홀>을 통해선 처음으로 재난 영화에 도전했다. 막대한 CG 작업이 동원된 영화라 이전 촬영들과는 다르게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다.

세트장이 재난 상황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실제처럼 구현돼서 연기에 잘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웃긴 건, 재난 영화였지만 촬영장에는 항상 웃음이 넘쳤다.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한 경험이었다.

회색 니트와 팬츠는 H&M X 토가 제품.

내년 방영하는 티빙 오리지널 <괴이>에도 출연 소식을 알렸다. 연상호 연출, 구교환 출연 등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나? 

지금까지의 반듯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도 기대된다. 대본 속 상황이 어떻게 표현될지도 궁금한데, 내가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진지하게 임해야지.

<우수무당 가두심>에선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열여덟만 지나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다.’ 당신의 열여덟은 어땠나?

열여덟이면 <아름다운 세상>을 찍고 있을 때다. 1학기에 작품이 끝나고 곧바로 2학기가 시작할 즈음 영화 <8일의 밤>을 찍었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으로 카자흐스탄에 다녀온 뒤 또 곧장 영화 <싱크홀>을 찍었고. 정말 바쁜 해였다. 참 숨 가쁘게 살았고, 감사한 인연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스무 살이 됐다. 스무 살을 맞는 1월 1일을 어떻게 보냈나?

맥주를 마셨다! 새벽 1~2시쯤에 혼자 방에서 잔잔하고 몽환적인 팝송을 틀어놓고, 조명을 탁 켜놓고, 한 캔 마셨다. 그래도 스물이 됐는데 그냥 넘어가기엔 아쉬울 것 같아서. 술맛은 어떻게, 달던가? 그냥, 술맛(웃음).

그때 기분도 기억하나?

사실 확 체감이 되진 않았지만 이런 건 있었다. 아, 이제 내가 정말 성인이구나. 더는 청소년이 아니라 내 행동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어른이 됐구나. 일종의 자기 암시였지.

“이제 내가 정말 성인이구나”라는 체감이 앞으로 당신의 연기에도 영향을 끼칠까?

글쎄. ‘이제 아역이 아닌 성인 연기자로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줘야지’라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는 대로 이 시기를 잘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또 그런 마음으로 작품을 고르고 있고. 물론 어느 시기까지는 기존의 아역 이미지가 내가 펼치는 연기를 가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건 아역 출신 배우라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저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잘 넘어가고 싶을 뿐이다.

터틀넥과 점프슈트, 분홍색 코트는 모두 프라다 제품.

배우로서 당신만이 가진 색깔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배우로서든 평소 나로서든 비슷한 느낌인데, 항상 무얼 할 때 진지하게 임한다. 그게 나의 성격인 것 같다. 이게 좋은 점일 수도 있지만,때론 독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배우라면 톡톡 튀고 밝은 면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쑥스러움 많이 타고 한없이 진지한 사람이 어떻게 배우가 된 건가?(웃음)

하하. 나도 그런 얘기 많이 듣는다. 그런데 실제 배우 중에서 조용하신 분들이 많잖아?(웃음) 내가 현장에서 만난 선배들도 대부분 그랬다. 어떤 분은 너무 쑥스러워서 자기가 나온 작품을 죽어도 못 본다고 말하기도 하고.

연기는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나?

결국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직업 특성상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고,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경험을 쌓는 거니까.

당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날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노래 듣는 시간들. 한없이 편안해진다.특히 체력 소모가 많은 감정 신을 찍은 날일수록 더 그렇다. 원래는 일할 때 밥도 잘 못 먹거든. 안 넘어간다. 그런데 “수고하셨습니다” 말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지금’이라는 인생의 챕터에 이름을 붙여준다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배워가고 성장하는 단계.’ 젊었을 때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 이를테면 멀리 여행을 간다든지 새로운 작품에 도전한다든지. 아니면 좋은 사람과 만나면서 좋은 추억을 쌓는다든지.

좋은 사람이라면, 혹시 사랑?

음… 사랑도… 기회가 된다면….

하하. 사랑은 기회가 되면 하는 것인가?

정말 언젠가 때가 되면. 배우로서 봤을 때 연기를 위한 경험, 발판이 될 수 있으니까. 또 사람으로서는 내면적으로 많이 성숙해질 기회가 될 테고.

스무 살이 고작 넉 달 남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게 있나?

없다. 1월 1일에 이미 맥주를 마셔봤기 때문에(웃음).

피처 에디터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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