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무대, 지금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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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 시대에 돛을 올린 예술의 항해술. 전 세계 옥외 스크린에 디지털 아트 작품을 상영하며 굳게 잠긴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써카(Circa)’의 여정이 여기 있다. 

5월 한 달, 서울 밤을 수놓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디지털 영상 신작.

5월 한 달, 밤의 해돋이를 구경했다. 초록빛 초원 너머 어둠이 물러난 자리에서 천천히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매일 밤 8시 21분으로 시곗바늘이 멈춰진 순간 펼쳐졌다. 밤이 내린 서울의 한복판에서, 코엑스 케이팝 광장에 자리한 가로 81m, 세로 20m 크기의 초대형 디지털 사이니지에서 재생된 가상의 ‘디지털 해돋이’. 작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출범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써카의 2021년 첫 프로젝트이자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영상 미디어 신작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다.

작년, 팬데믹은 큐브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세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학교도, 식당가도, 운동장도, 그리고 고고한 성역처럼 보이던 예술 현장도 예외 없이 그 화살을 온몸으로 맞았다. 미술관이 문을 굳게 닫은 상황에서 예술을 보여주는 방식, 예술이 다루어야 할 주제,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질병 쇼크 시대에 써카는 이러한 질문을 정면으로 끌어안고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은 예로부터 집단적 기억이 쌓인 장소,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 공동체 감각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장소인 광장, 그곳에서 환히 불을 밝히는 전광판에 주목했다. 전 세계의 대형 옥외 스크린에 밤낮으로 송출되는 상업 광고를 ‘일시 멈춤’하고 그곳에 예술 작품을 상영해 다시 세계를 연결하자는 아이디어는 빠르게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년 10월 31일, 유럽 최대 규모의 옥외 스크린인 런던의 ‘피카딜리 라이트’에 중국의 반체제 설치미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디지털 아트가 상영됐다. 아이웨이웨이에 이어 패티 스미스, 비비안 웨스트우드, 에디 피크 등이 써카의 프로젝트에 동참했고, 지난 5월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던 전광판이 팬데믹 시대에 가장 안전하고 광대한 전시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런던에서 시작한 써카는 이제 뉴욕, LA, 서울, 도쿄에 스크린을 확보하며 전 세계 5개 도시에 매달 새로운 작가, 새로운 디지털 아트를 소개한다. 스크린이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이 프로젝트는 1990년생, 올해로 32세를 맞는 젊은 예술가 조셉 오코너(Josef O’Connor)가 이끈다. 어김없이 호크니의 디지털 해돋이가 떠오른 5월의 어느 날, 줌 화상 인터뷰를 통해 그를 만났다.

줌 인터뷰를 통해 만난 써카의 예술감독 조셉 오코너. 밤의 서울, 아침의 런던에서 <더블유>와 그가 만났다.

지금 당신이 있는 런던은 이른 아침이죠? 여기 서울은 해 질 녘을 맞고 있어요.

Josef O’Connor 오전 9시를 막 지나고 있어요. 이 시간에 인터뷰해서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빅토리아 시대 스타일의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근사하게 밀려들고 있거든요.

인터뷰 화면 너머로 당신의 집이 보이네요. 잎사귀 큰 관엽식물이며 커다란 창이 멋진데요?

잠시만요. 서재를 보여줄게요. 제 서재는 온갖 수집품을 모아둔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거든요. 이탈리아에서 구입한 핸드메이드 유리 화병도 있고, 먼 옛날 건설 현장에서 촬영한 제 할아버지의 흑백 사진도 한쪽에 세워뒀어요. 창가 가까이엔 5월 써카가 데이비드 호크니와 협업하며 제작한 포스터를 액자 처리해 장식했고요.

액자가 특별해 보여요. 프레임에 호크니의 작품 속 일출 풍경을 연상시키는 주황빛 물감을 칠했네요? 굉장히 탐납니다(웃음).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액자예요. 이번 협업을 위해 힘써준 호크니에게 감사의 의미로 전달하려고 특별히 맞춤 제작했거든요. <더블유> 코리아의 사무실 주소를 알려주시면 하나 추가로 제작해 보내드릴게요. 단, 사무실에 걸어두겠다는 조건으로(웃음). 나중에 꼭 인증 사진을 보내주세요.

5월 써카와 데이비드 호크니가 협업하며 제작한 포스터.

바닥에 높다랗게 쌓인 상자들은 무엇인가요?

포장용 골판지예요. 패티 스미스가 서명한 포스터가 어젯밤 뉴욕에서 막 도착해 정신없이 포장 중이었거든요. 지금 집이 난장판이에요. 작년 10월 써카를 론칭하며 ‘#Circaeconomy’ 프로젝트도 함께 전개하고 있어요. 단순히 전 세계 전광판에 예술 작품을 상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작품을 바탕으로 포스터를 제작해 100파운드에 판매하는 프로젝트죠. 이를 통해 거둔 수익으로 차기 작품을 제작하고, 미술 단체를 후원하고,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지원도 제공해요. 일종의 순환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 다음 세대의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함이죠.

써카의 시작을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많아요. 우선 그중 하나이자 인터넷상에 떠도는 소문을 당신에게 직접 물어볼게요. 런던의 ‘피카딜리 라이트’는 써카의 작품을 처음 선보인 장소이죠. 이를 소유한 투자 회사 ‘랜드섹’에 트위터를 통해 협업 제안을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맞아요. 처음 랜드섹에 연락한 게 2018년, 제가 스물아홉 살 무렵이에요. 상업 광고를 잠시 멈추고 당신의 땅(전광판)과 시간을 좀 빌려달라고 트윗을 보냈죠. 물론 첫 연락은 트위터로 한 게 맞지만 이후 아주 긴 프레젠테이션과 미팅을 수차례 거쳐야만 했어요(웃음). 랜드섹과 논의하던 도중 코로나19가 발생했고 이는 프로젝트에 ‘그린 라이트’를 켜게 만든 기회가 됐어요. 작년 여름 랜드섹과 사용 계약을 맺고 같은 해 10월 써카를 정식 론칭하게 됐죠. 지금은 당신도 알다시피 전 세계 5개 도시의 스크린으로 상영 장소가 확대됐고요.

전 세계 수많은 전광판 중 왜 하필 피카딜리 라이트를 통해 작품을 상영해야만 했나요?

피카딜리 라이트가 있는 광장 ‘피카딜리 서커스’의 역동적인 공간성에서 큰 영감을 얻었어요. 1819년 건축된 이후 현재까지 광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죠. 제 오랜 취미 중 하나가 엽서 수집이에요. 예부터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해온 기념엽서도 이베이를 통해 여럿 구입했는데, 제가 가진 1928년과 1953년 엽서를 비교하면 엽서 속 광장의 풍경이 하늘과 땅 차이란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어요. 장소가 그대로 유지되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집단적 기억이 장소에 쌓였다는 점에서 제게 피카딜리 서커스는 마치 ‘시계’처럼 다가왔어요. 또 교차로를 뜻하는 서커스(Circus)라는 단어에서 써카(Circa)를 쉽게 연상시킬 수도 있었어요. ‘대략’이라 정의할 수 있는 써카도 시간에 있어서 일종의 회전 교차로와 같아요. 예를 들어 한 건물이 ‘Circa 2021’에 지어졌다 한다면 대략 2021년을 둘러싼 시점에 건물이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해요. 따라서 ‘Circa 2021’은 바로 ‘지금’을 뜻하죠.

예술가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조셉의 집엔 그의 회화 작품이 걸려 있다.

당신은 일찍이 2007년 젊은 창작자가 자신의 작업을 온라인으로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디지털 아트 플랫폼 ‘폴록스(Pollocks)’를 고안한 바 있죠. 써카 또한 디지털 사이니지란 매개체를 통해 예술을 공유하는 디지털 아트 플랫폼이라 할 수 있고요. 디지털 아트 플랫폼에 대한 당신의 오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우리 시대 젊은 세대 예술가들은 디지털에 굉장히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예요.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만 하더라도 학교 교실에 컴퓨터가 단 1대밖에 없었는데 졸업 무렵엔 10대로 훌쩍 늘고, 어느 순간 학급마다 전자 칠판이 도입되더니 개개인이 노트북을 들고 다니게 됐죠. 그렇다면 요즘 시대엔 어떨까요? 얼마 전 어린 학생과 얘기하다 그의 가방 안을 봤는데 텅 비어 있더라고요. 교과서는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모든 걸 교실에 있는 노트북으로 해결한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바로 이런 변화의 흐름이 예술 제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물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사라지는 현상이 지금의 NFT 열풍도 불러일으켰겠죠. 제가 ‘포스트 오브젝트(Post Object)’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것 같아요. 점차 디지털을 연구하고, 물리적인 것보다 개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죠. 저는 개념이 이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써카의 작품을 선보이는 매체로 전광판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 단지 전광판을 통해서만 작품을 선보이지 않아요. 모든 작품은 써카의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어요. 대도시 공공장소에 있는 거대한 화면을 통해 작품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화면을 통해서도 작품을 보여주는 셈이죠.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분산’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써카를 통해 선보여온 작품은 모두 디지털로 구현됐어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디지털 파일이지만 대형 전광판, 컴퓨터 화면 등 전 세계의 수많은 스크린을 통해 송출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거시적 경험이 형성되죠. 최대한 많은 사람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써카가 사람들에게 예술을 건네는 것은 곧 ‘쉼표’를 권하는 일과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하루에 몇 분이라도 잠시 멈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안겨주는 거죠. 그 시간 동안 모여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해보자는 손짓이라 할 수 있어요.

예술이 예술 밖의 세상에 어떤 것을 제안할 수 있다고 믿나요?

저는 예술이야말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세대에게 예술을 제대로 교육하면 그들의 창조성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고, 이것들이 모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어떨지 모르지만 영국에서는 해마다 예술 관련 교육 예산이 줄어들고 있어요. 이런 상황은 예술이 1%의 엘리트만을 위해 쓰이게 될 위험을 초래하죠. 사회의 일부 계층만이 예술에 접근하고 관여하는 것은 결코 우리 사회에 좋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써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쇼핑을 하거나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오는 시내 한가운데서 무료로 예술을 발견하고, 예술과 관계 맺게 하니까요. 예술은 시대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달랐어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권력을 드러내거나 신과 닿아 있는 걸 보여주는 수단이었다면, 지금의 예술은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사회적 사안과 연결되어 있다고 봐요. 오늘날 예술가들은 마치 횃불을 든 존재가 되었어요. 정치가들이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폭넓게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죠. 이런 식으로 어려운 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조셉 오코너의 서재. 진열장에 그가 수집한 다양한 물건이 장식되어 있다.

당신의 대답을 들으니 작년 10월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을 공개하는 것으로 써카의 첫 단추를 끼웠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그는 작품을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항하는 메시지를 던져온 예술가잖아요.

써카는 매달 한 명의 예술가에게 작업을 맡기고 1년 동안 12명의 예술가와 협업해요. 저는 그들에게 써카를 설명할 때 항상 ‘책장’을 비유로 들곤 해요. 12권의 책이 담긴 책장이 1년을 나타내고, 한 예술가의 작업이 그중 한 달을 나타낸다고 보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아이웨이웨이는 지속적으로 인권과 같은 중요한 사회 문제를 사유해왔어요. 그야말로 써카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 가장 맞닿아 있는 예술가였죠. 저조차 써카를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증명하지 못했던 초창기에 그가 선뜻 참여하기로 결정해줘서 정말 영광이었어요. 그처럼 작업에 진심으로 전념하는 예술가는 처음 만나본 것 같아요. 하나의 작업을 의뢰했는데 서른 개의 영상을 만들어 보내준 그의 열정을 잊을 수 없어요. 그와 편집자, 애니메이터 12명이 팀을 이뤄 3개월 동안 작업에 전념했죠.

8월에는 한국 작가와 협업을 진행한다 들었습니다. 어떤 작가와 어떤 이야기를 펼칠 예정인지 힌트를 줄 수 있나요?

아직까지 논의 단계이기 때문에… 여성 아티스트이며 신진과 중견 사이의 작가라는 것 정도만 말할 수 있겠네요. 지금 상당히 ‘핫’한 작가임에는 틀림없고요. 한국 작가와 함께하게 돼서 개인적으로 무척 기대돼요. 제가 보기에 지금 한국은 문화적 부흥기를 맞고 있어요. 오스카상 수상을 시작으로 국제적 갤러리가 앞다퉈 서울에 분점을 내고 내년엔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가 한국에 상륙하죠. 폭발적 시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한국은 전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써카의 20년 뒤를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요즘은 일주일이 마치 10년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20년 후면 제가 52세일 테고 인생의 2/3에 맞먹는 시간이 흐른 즈음이겠네요. 그때까지 써카가 지속되고 계속해서 예술가들을 초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함께 손잡고 싶은 예술가가 정말 많거든요. ‘#Circaeconomy’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이어져 젊은 예술가들에게 장학금을 두둑이 챙겨주고 싶기도 해요. 훗날 더 많은 스크린을 통해 써카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써카가 문화 안에 자리 잡고 싶고요.

오늘 인터뷰 즐거웠습니다. 그곳은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겠네요.

한쪽에서는 해가 뜨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해가 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그리고 데이비드 호크니와 함께하는 한 달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인 것도 같습니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박종원,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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