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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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갑작스레 곁을 떠난 알버 엘바즈(Alber Elbaz)를 기리며. 지혜롭고 관대하며, 더없이 순수하고 창의적이었던 한 디자이너의 행복한 순간을 추억했다. 

 2016년 10월, 랑방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돌연 물러난 지 1년 후. 알버 엘바즈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드뇌르’를 수상했다. “‘오 마이 갓! 실직 상태인데 누가 올까? 누가 날 기억할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념식에 친구 20여 명만 초대했죠.” 즉석에서 자화상을 스케치하는 모습과 자기 비하적인 유머 코드도 유명한 엘바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결국 그 기념식 에는 450명 넘는 친구들이 초대에 응했고, 이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패션 산업에서 충성도를 얻기는 어렵지만 제 경력과 삶에서 만난 사람 중 99%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쁜 사람들은 제 곁에 붙지 않고 비껴갔죠.” 엘바즈가 새롭게 론칭한 브랜드인 AZ 팩토리는 오래된 패션 시스템인 런웨이 쇼, 시즌제, 그리고 우월 의식 등에서 흔쾌하게 벗어났다. 그 결과물 로 배제가 아닌 포용을 표방하면서 다양한 사이즈로 출시 된 리브드 니트 드레스는 여성의 몸매와 형태를 돋보이게 하면서도 실용성을 더했다. “때론 이방인이 되어 무언가 를 보고 경험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엘바즈는 긴 공백기 동안 여행을 하면서 여성들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옷을 입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우리는 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 안정적인지를 확인하려 해요. 하지만 때론 가장 큰 위험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죠. 종종 놀라운 일이 우리를 멋진 곳으로 데려가니까요.” – 글 | 에릭 윌슨(Eric Wilson) 

 “여섯 살 때일 거예요. 학교에 간 첫날, 제가 괴짜였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엘바즈는 모로코에서 태어나 갓난아기 시절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친구들이나 반 아이들은 제가 여자 옷을 그린다고 부끄러워한 적이 결코 없어요. 반대로 그들은 늘 ‘언젠가 너는 파리에서 큰 디자이너 될 거야!’라고 말했죠. 친구들이 의미한 것이 큰 디자이너인지 아님 큰 사이즈의 디자이너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파리에 있어요.” 

 “여행하는 동안 요가에 빠졌어요.” 2015년 랑방을 떠난 직후 엘바즈는 태국에 잠시 머물렀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어쩌면 요가 수행자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너무 서툴러서 나무 자세조차 할 수가 없었어요.” 

 AZ 팩토리의 아이디어는 수많은 점심과 저녁 식사로부터 시작됐어요. 저는 음식과 몸매 이미지에 관한 모든 이슈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를 봐왔죠. 더 이상 킬러(Killer) 디자이너가 아닌, 힐러(Healer)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건 제 카드예요. 우린 마커가 없어서 팀 누군가에게 립스틱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카드가 굉장히 에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더 이상 바르지 않는 립스틱이 있다면, 우린 이 립스틱을 마커처럼 사용해 메시지를 적곤 했죠.” 

“랑방을 나와 제가 패션 세계 밖에 있을 때, 여러 강의와 마스터 클래스를 하기 시작했어요. 여긴 이탈리아 폴리모다예요. 남성복 수업을 받던 한 여학생이 모든 남자들을 다 관 속에 넣어 스케치했어요. ‘이 관은 뭐죠?’라고 물었더니 ‘전 시칠리아인이에요… 8년 사귄 남친에게 임신했다고 말하자 저를 떠났어요. 그래서 제 차로 그를 쳤죠.’ 그래서 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있잖아요… 관을 치웁시다. 관이 없어도 충분히 근사하게 만들어서, 당신을 엄청 질투나게 합시다. 그를 죽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스타그램 공동창립자 케빈 시스트롬(그의 아내 니콜과 엘바즈)은 파리 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에게 인스타 계정이 있는지를 물었다. “저는 없다고 말했어요. 음식 사진도 찍을 줄 모르고 사진을 잘 받는 편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 계정이 생겼고, 너무 많은 ‘좋아요’ 메시지를 받기 시작해서 제 첫 게시물을 케빈에게 헌정했어요. 그건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걸 이해했죠.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좋은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전 항상 말해요. 나쁜 말이 있으면 입을 다물라고. 모든 것이 부메랑이고 그건 당신에게 돌아오니까요.” 

엘바즈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 “아마 7살이나 8살이었을 거예요. 전 이미 건강 염려증이 심했어요. 그림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간호사부터 여경까지 저를 보호해준 여성들이 제 삶의 스토리예요. 어릴 적 천식이 있어서 항상 어머니랑 병원에 가곤 했는데, 그게 바로 이 그림이죠.” 

1980년대 후반 뉴욕으로 이주한 후, 전설적인 리테일러 던 멜로(Dawn Mello)는 엘바즈를 제프리 빈(Geoffrey Beene)에게 소개했고, 제프리는 즉석에서 자신의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그를 고용했다. 7년 반 동안 그 옆에 있었고, 오늘날 제가 하는 모든 것은 제프리 덕분입니다. 전 그의 학교에 속해 있죠. 제프리는 ‘행어의 옷들이 근사해 보이는 이유는 앞뒤 순서대로 나란히 걸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대해 항상 이렇게 대응했어요. ‘하지만 패션에 있어서는 앞뒤가 없다! 그 사이에는 이걸 입는 여성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이에요.” 

“다들 신축성 있는 패브릭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요. 여러분을 말라 보이게 하니까요. 그래서 말랐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어요.” AZ 팩토리 컬렉션을 통해 XXS에서 4X에 이르는 다양한 사이즈를 선보인 알버 엘바즈. “제 드레스를 통해 오늘날의 여성을 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르셋은 던져버렸죠. 여성들의 몸을 압박하고 밀어붙이는 대신에 그녀들의 몸을 위한 응원이 시작된거에요. 우리는 나이 드는 것, 나아가 사이즈에 대해 긍정적인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계속 해나갈 거예요. 컬렉션만이 아닌,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거든요.”

사진
ELBAZ AT RESTAURANT: COURTESY OF ALEX KOO; ELBAZ AT POLIMODA: COURTESY OF POLIMODA; CARD WITH LIPSTICK: COURTESY OF ALEX KOO; MODELS WEARING AZ FACTORY (3): COURTESY OF NICOLAS KUTTLER; ALL OTHER IMAGES COURTESY OF ALBER ELB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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