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지구의 어딘가에서 대한민국 서울로 찾아와준 예술이 있다. 지금 막 문을 연 전시장에서 감상한 탁월한 작품 과작가에 대해, <더블유>식 도록을 마련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자유로운 화음
PHOTO | COURTESY OF THE ARTIST AND FONDATION LOUIS VUITTON ⒸGERHARD RICHTER
현대미술의 살아 있는 거장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작품이 서울에 왔다. 도착지는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이다. 거두절미하고 작품 ‘4900가지 색채’는 지면이나 인터넷상에서 사진으로 봤을 때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진으로 본 작품은 해상도가 낮아 ‘깨진 이미지’의 한 부분을 확대했을 때 볼 수 있는 네모난 점들처럼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모습이다. 실물을 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마주한 작품에서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선명하고 독립적인 하나하나의 큐브들이다. 캔버스가 아닌 알루미늄판에 에나멜 도료와 플라스틱 재질을 썼기 때문에 유광 타일의 집합체 같기도 하다. 1960년대에 리히터는 철물점의 색채 견본집을 보고서 그 자체로 회화답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다채로운 색이 도열한 그 모습을 확대해 재현하기 시작했고, 처음 이 작업을 하던 시기에는 팝아트적인 접근을 말한 적이 있다. 가로세로 9.7cm의 정사각형 큐브 25개가 모여 하나의 패널을 이룬다. 이 패널을 기본 단위로 해서 어떻게 조합하고 배치하는지에 따라, ‘4900가지 색채’는 11가지 버전으로 구성된다. 196개로 구성된 패널 각각을 독립적으로 보여주는 버전 1에서부터 196개 패널이 가로세로 6m에 이르는 하나의 플레이트로 병합된 버전 11까지 있으니, 꽤 복잡하다. 한국을 찾은 버전 9는 네 개의 플레이트로 나뉘어 배치됐다.
그냥 봐서는 의미가 모호한 작업이다. 작업자인 리히터를 먼저 추적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이해한 그림은 좋아하지 않는다.” 리히터는 이런 식의 발언을 1970년대부터 인터뷰에서 했다. 그는 어떤 목표도, 체계도, 경향도 추구하지 않았다. ‘스타일이 없는 스타일’을 좋아했다.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에서 살다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몇 달 전 서독으로 이주한 그에게 미국에서 건너온 팝아트나 플럭서스의 반미학 운동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에 관한 번역서 중 현재 시중에서 유일하게 구입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한 가족의 드라마>(한울)는 리히터의 궤적을 역사와 엮어 추적한다. 이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작년 초에야 국내 개봉한 <작가 미상(Never Look Away)>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겪은 리히터는 예술에서의 이데올로기에도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 시기에 인물이나 풍경 같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업했다. 가장 알려진 리히터의 그림은 사진 회화와 밀대를 이용한 추상화다. 그는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서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해 환영처럼 만들거나,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보고 다시 그림을 그리는 등 자기만의 포토 리얼리즘 작업에 매진했다. 사진이 출연 한 이후 회화의 역사에 응답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추상 작업을 시작한 건 붓을 든 자신이 미리 예상하거나 의도하는 일말의 여지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층을 쌓은 후 대형 밀대로 밀어버렸다. 물감층을 밀어버리는 제스처의 결과, 화면은 캔버스가 아니라 거친 표면의 지층 같은 느낌을 준다. 20세기 회화에서 중요한 기준점으로 꼽히는 그의 추상 작업은 무엇보다 일단 거친 멋이 있다. 지난해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 리히터의 추상화는 한화 약 313억원에 낙찰됐다.
다시, ‘4900가지 색채’를 본다. 오랜 기간 이 작업을 하지 않았던 그는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디자인 작업을 의뢰받으면서, 색채 견본집 작업 때의 방식을 새롭게 적용했다고 한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소장품 중에서 서울로 안착한 ‘4900가지 색채’는 리히터가 30여 년 만에 작업한 연작물이다. 이 연작을 할 때 그는 삼원색 혹은 네 가지 색만 기본으로 삼아 그것들을 섞어 색을 만들고, 그 색들을 다시 서로 섞어 세 자릿수에 이르는 색으로 불려갔다.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색을 도출한 것이다. 그 색들을 랜덤하게 추출해 채색했고, 작업은 ‘1024가지 색채’, ‘4096가지 색채’ 등으로 완성됐다. 리히터는 주관적으로 만드는 색상 대신 수학적으로 증식하는 색상, 스스로 만들어지는 회화를 꿈꾼 것 같다. 작품의 조물주는 작가 자신인데, 그는 작품에 권력을 지닌 조물주의 통제가 깃드는 걸 거부한 걸까? 회화의 종말이 거론되던 시절에도 그는 회화의 힘을 의심하지 않았고, 다만 구상과 추상을 오가며 새로운 회화를 모색했다. 평론가들을 헷갈리게 하면서도 ‘회화’라는 장르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은 리히터야말로 예술가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예다. 놀랍게도 ‘4900가지 색채’ 를 설치할 때는 버전 별로 패널을 배치하는 기준만 있을 뿐, 패널을 조합하는 방식은 설치 주체의 자유라고 한다. 어떤 식의 조합이든 전시장 벽면에서 음악처럼 다채로운 색의 화음이 울린다. – 글 | 권은경(<더블유> 피처 에디터)
세실리아 비쿠냐, 기록의 매듭
LET THE TRUTH AWAKE, 2021, OIL PASTEL ON LINEN, BAMBOO, 140 X 120CM, PHOTO BY ONART STUDIO,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NIÑA MAPUCHE, 1975-2021, PHOTO LITHOGRAPH ON MULBERRY PAPER WITH BAMBOO AND RED THREAD, 30 X 20INCHES, PHOTO BY DAN BRADICA,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한국어, 안데스어, 영어로 각각 ‘진실을 일깨워라’라는 문구를 배너에 오일 파스텔로 적은 작품,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소녀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회화를 판화로 다시 제작한 작품이다. 전시 <키푸 기록>은 리만 머핀 서울에서 4월 24일까지 열린다.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과도한 자극과 충격을 받으면 인간은 마비된다. 거기서 오는 고통을 차단하려 몸의 신경 체계가 작동을 중단하기 때 문이다. 그때부터 인간은 무의식과 무감각에 익숙해지고 비판 없이 순응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 상태 를 깨닫는다. 다시 활동을 펼치려 노력하고 전과 다른 수준의 자유를 경험한다. 예술가는 이에 항상 먼저 성공하는 집단 중 하나다. 세실리아 비쿠냐(Cecilia Vicuña) 역시 이런 예술가다. 칠레에서 태어난 작가는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이듬해 조국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 의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곳에서 일어난 거짓되고 잔인한 사건들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타격을 안겼다. 하지만 그는 실신 상태에 빠지는 대신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소녀의 모습 등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자기만큼 어린 소녀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비쿠냐의 대표작에는 ‘프레카리오스(Precarios)’와 ‘키푸(Quipu)’가 있다. ‘프레카리오스’는 라틴어에서 비롯한 스페인어로 ‘불안정한’이라는 의미다. 전시장 벽에 일정 간격으로 펼쳐지는 이 작은 조각들의 기원은 야외다. 작가는 1966년부터 깃털, 돌, 플라스틱, 나무, 철사 그리고 쓰레기 등을 모았다. 이것들을 야외에 설치해 날씨나 계절 같은 상황에 따라 변하게 두었다. 해변에 설치한 조각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일시적이며 불안한, 사라지기 쉬운 존재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키푸’는 ‘매듭’으로 ‘끈을 묶어서 만든 글자’라는 의미다. 역사적 사건 등을 매듭의 수효나 간격에 따라서 나타낸 일종의 문자다. 작업은 채색한 천이 그저 또는 매듭지어져 천장부터 매달린 모습이다. 드리워진 천 사이를 거닐면 공감각적 체험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키푸는 고대 잉카에서 사용했으나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그 맥이 끊겼다. 작가에게 키푸는 고유 문화 상실의 표상이며 식민지화에 관한 진술이다. 그래서 프레카리오스가 되어버린 문자를 지속하기 위해 매듭을 잡아맨다.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세실리아 비쿠냐 개인전 <키푸 기록(Quipu Girok)>이 열리고 있다. 제목에 ‘키푸’를 우리말 ‘기록’으로 이해하고 번역해 함께 두었다. 이 글을 쓰며 그것을 ‘기록의 매듭’, 기록을 이어가는 매듭으로 읽고 싶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기록에 비춰야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 예술가이며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는 비쿠냐의 작업은 그 기록을 이어가게 하는 매듭이다. 작가는 오는 4월 개막하는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작품을 선보인다. 칠레 원주민 소녀와 총을 멘 베트남 소녀가 손을 맞잡은 작업이다. 이 두 소녀가 미얀마 소녀의 손도 함께 잡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토니 모리슨은 인간 사이 증오와 착취를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타자를 상상해’ 우리 모두에게 자유가 오는 날을 만나길 바란다. 그 과정 속에는 비쿠냐의 매듭이 분명 있을 것이다. – 글 | 김한들(독립 큐레이터)
헤르난 바스, 소년의 모험들
PHOTO | COURTESY OF THE ARTIST AND SPACE K
AFTER WEEKS OF SEARCHING…(THE SMALLEST BIRD IN THE WORLD)_ACRYLIC ON LINEN_182.9X304.8 X5.1CM_2015, WHERE?_ACRYLIC, BLOCK PRINT AND AIRBRUSH ON LINEN_183X152.4CM_2011, THE YOUNG MAN AND THE SEA_ACRYLIC ON LINEN_213.4X182.9CM_2020.
탐험가로 묘사된 요제프 보이스, 길을 잃기도 하는 모험의 순간, 소년이 헤쳐 나아가기엔 험난한 바다. 작가의 모험 자체이자 도피처인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 <모험, 나의 선택>은 스페이스K 서울에서 5월 27일까지 열린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쿠바 이민자 2세로 마이애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성 소수자이기도 하다. 소년을 둘러싼 환경은 언제든 그를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고, 소년이 헤쳐 나아가기에 세상은 거칠고 험난하기만 하다. 소년의 고향인 플로리다와 부모님의 고향인 쿠바 사이엔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며, 버뮤다 삼각지대가 있으며 주변에서는 UFO 목격담이 자주 들리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가 모여 있는 듯한 아메리카의 남단에서 바다를 두려워한 소년은 자연스레 신비주의나 오컬트물에 빠졌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좌절과 불안, 두려움은 그를 그로테스크나 데카당스의 세계로 이끌었다. 따라서 그림은 작가에게 자신을 찾아 떠나는 모험인 동시에 도피처이기도 했다. 헤르난 바스(Hernan Bas)의 작품 속에는 미성년 남자가 많이 등장한다. 그림 전반에 나타나는 소년들의 우울과 불안, 그리고 세기말적 은유는 그의 회화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26세에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하고 곧이어 세계적인 컬렉터인 루벨부부 컬렉션에 소개된 소년은 40대가 된 지금 미국 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산속에서 길을 잃는 이유는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누구나 가는 길, 혹은 아무도 가지 않거나 모두가 반대하는 길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 무수한 결정이 모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완성된다. 어떤 날은 낭떠러지 같은 현실에 놓이기도 하고 어느 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푸른 나무를 만나거나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는 살면서 맞이하는 작은 행운일 수도 있고 본인도 몰랐던 달란트일 수도 있다. 작품 ‘몇 주간의 탐색 결과’에서 탐험가로 묘사된 모델은 세계적인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다. 의사가 꿈이었던 한 청년은 독일 공군 폭격기의 부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고 크림반도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다. 만신창이가 된 요제프 보이스를 구한 건 원주민인 타타르족이었다. 그들은 보이스의 상처를 동물 비계로 덮고 펠트 천으로 감싸서 얼어붙은 그의 몸을 녹였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청년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그를 살린 동물성 지방과 펠트 천은 생명줄처럼 평생 그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한때 의사가 꿈이었던 청년은 제대 후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 지원했고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전위 예술 운동인 플럭서스를 이끌었다. 우리는 살면서 이처럼 작은 새가 날아오는 순간을 경험한다. 작은 새가 날아왔을 때 외면하지 않는 것, 프레베르의 새처럼 때로는 긴 기다림을 통해 새를 나의 인생 안으로 품을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어른이라는 추상적인 존재에 끝까지 수렴하고자 하는 미성년일지도 모른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을 이야기한 것처럼 헤르난 바스는 본인만의 언어로 플로리다의 우울을 그림에 담아냈다. 40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미성년인 작가는 우리 앞에 수많은 모험을 펼쳐놓았다. 여기 작은 새가 날아왔다. 그래서 당신은 혹은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글 | 이장욱(<스페이스K> 수석 큐레이터)
천제런, 절망 앞에서 비로소 보이는 희망
PEOPLE PUSHING, 2007- 2008, 35MM TRANSCODED TO 1080P, SINGLE-CHANNEL, COLOR, SOUND, 5 MINUTES 19 SECONDS.
NOTES ON THE TWELVE KARMAS, 1999–2000, RE-EDITED 2018, DV TRANSFERRED TO DIGITAL, SINGLE-CHANNEL, BLACK & WHITE, 8 MINUTES 16 SECONDS. STAR CHART, 2017, BLACK & WHITE PHOTOGRAPH, 11 PIECES, EACH 52.5 X 36.5CM.
A FIELD OF NON-FIELD, 2017, 4K TRANSCODED TO 1080P, SINGLE-CHANNEL, BLACK & WHITE, COLOR, SOUND, 61 MINUTES 7 SECONDS.
상처받은 몸, 변화하는 몸을 다루는 이 전시는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전시 <상신유신>은 아트선재센터에서 5월 2일까지 열린다.
컴컴한 전시장은 여러 영상 작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뒤섞여 다소 혼란스럽다. 두 층에 걸쳐 전시된 작품 일곱 편 가운데 영상이 아닌 것은 단 하나뿐이다. 한자가 익숙지 않다면, <상신유신>이라는 한글 전시 제목과 함께 쓰인 ‘傷身與流身’(상신여유신) 다섯 글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풀이하자면, ‘상처받은 몸과 변화하는 몸’을 뜻한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안내글이 이 전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짤막한 작품 설명글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투쟁, 고독감, 노동자, 공장, 감시, 금융 위기, 장례식 등의 단어가 눈에 밟히는 가운데… 전시 전체를 소개하는 글 첫 문장에서는 ‘반체제’와 ‘도전’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진다. 아트선재센터의 <상신유신> 전시장에서는 아름다운 평면 회화 작품이나 포토제닉한 설치를 찾아볼 수 없다. 조도가 낮은 공간에 띄엄띄엄 배치된 큰 화면들은 꽤나 휑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행히도, 1시간 길이의 영상 <필드 오브 논-필드> 하나를 제외한 다른 영상 작업은 그리 길지 않다. 물론 대사가 많지 않은 이 작업들은 실제 러닝타임 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필요는 없다. 영상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끝없이 일하듯, 비슷한 행위를 되풀이한다.
코로나19로 미뤄지거나 취소되었던 많은 전시가 차례로 개막하는 지금, 시간을 내어 어두운 공간에 놓인 흑백의 영상을 대면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2주간의 자가 격리를 감수하고서 전시 오프닝에 맞춰 서울에 들른 작가는 일견 무겁게 보이는 작업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 이런 말로 답했다. “(절망을 마주할 때야말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직업 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1960년대생 작가에게, 대만에 있는 미국 애니메이션 외주 스튜디오 직원으로 보낸 80년대의 절반과 가방 노점상인 형에 의지해 생활하며 작품 활동 없이 보낸 90년대의 절반은 삶에서 가장 큰 절망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현실’을 다루거나 묘사하는 예술 활동이 철저히 금지되었던 시기, 천제런 작가는 붓과 캔버스로 작업하는 대신 순간적으로만 존재하기에 붙잡을 수 없는 퍼포먼스를 거리나 시위 현장에서 펼치곤 했다. 종종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 작가가 테이트모던, LA 카운티 미술관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오래전부터 개인전이나 상영회를 통해 소개된 것을 감안하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한국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간 국내에 소개된 천제런의 작업은 주로 비엔날레와 같은 대형 전시의 한구석에서 ‘심각함’을 담당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반체제 작가’라는 수식어와 함께 작가를 소개하는 <상신유신>이 절망적 순간만을 모아둔 비디오 아트 전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자기 표현으로서의 예술 행위 자체가 금지된 시대를 직접 겪어낸 작가에게, ‘반체제’란 그저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내가 잘 알지 못하지만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타인과 함께 연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가 말한 ‘희망’과도 이어진다. 희망이란 어쩌면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있을 때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전시의 마침표와도 같은 1시간 길이의 영상, <필드 오브 논-필드>의 마지막 장면 역시 충분히 기다려볼 만하다. 자살을 시도했던,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작가의 친형을 싣고 가는 장례 행렬을 보여주는 이 영상의 마지막에는 빗속을 함께 행진하는 여성들과 그들의 목소리로만 이뤄진 시퀀스가 등장한다.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함께 되뇌는 말 역시 절망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를 가리키는 것은 절망 속에서 보이는 희망이다. – 글 | 박재용(통번역가, 큐레이터)
- 피처 에디터
- 권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