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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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 안토니 바카렐로가 긍정의 바람을 담은 생로랑의 2021 S/S 컬렉션을 선보였다. 꿈에서나 볼 법한 고운 사막에서, 그리고 매혹적인 판타지가 담긴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

사막에서 펼쳐진 생로랑의 2021 S/S 컬렉션.

사막에 새겨진 생로랑의 거대한 로고.

통제와 봉쇄, 그리고 격리의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과연 패션 하우스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화려하게 치장한 모델들이 근사한 공간을 유유히 걷는 단순한 구조는 아닐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쇼를 보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차려입고 파티장에 입고 갈 드레스를 찾았다면, 지금 우리는 갈 곳을 잃었고, 그로 인해 과장된 치장보다는 편안함과 아늑함 사이의 ‘멋’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이가 바로 생로랑의 수장 안토니 바카렐로가 아닐까?

2021 S/S 생로랑 컬렉션의 얇고 가벼운 팬츠 슈트

부드러운 깃털과 니트, 레이스 언더웨어가 어우러진 편안하지만 에지 있는 룩.

메탈 장식 슬링백 슈즈와 도트무늬 스타킹.

실크 블라우스와 라이더 팬츠에 매치한 새로운 숄더백.

세련되고 담백한 플로럴 장식.

지난 12월 15일 패션 하우스 중에서도 가장 먼저 기존 런웨이 형태의 쇼를 과감하게 벗어나 그가 선택한 장소는 다름 아닌 사방이 뻥 뚫린 사막이었다. 그 안에서는 느리게 진행되는 삶을 예찬하고 이 시대의 징후를 반영한 하나의 공연이 펼쳐졌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디자이너의 특정 관점에서 볼 때 제 직업의 핵심 가치인 오늘날의 옷을 바람직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 이번 쇼에는 1년 전 등장한 라텍스 팬츠는 사라지고 편안한 라이딩 팬츠와 공기처럼 가벼운 실크 블라우스, 얇고 간결한 재킷, 포근한 깃털 장식 베이비돌 드레스 등이 등장했다. “1968년 프랑스의 사회적 격변을 돌아보면서 그때와 현재 사이에 자연스러운 반향을 발견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고, 변화에 대한 큰 열망 속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죠. 이브 생 로랑은 그 안에서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팬츠 슈트, 턱시도, 얇은 블라우스 등을 대중화했고요. 우리는 환상처럼 미래를 이상화하지만 이브 생 로랑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으로 항상 진짜 옷을 만들었어요.” 에지 있는 실루엣이지만 절대 몸을 구속하지 않는 그의 옷처럼 말이다. 격동의 60년대와 지금의 시대를 비교하며 새로운 대안을 내놓은 안토니 바카렐로. 그는 지금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자유를 위해 개방된 공간을 선택했고, 입을 수 없는 옷을 선보이기보다 편안하고, 선물 같은 옷을 디자인했다. 그는 다른 브랜드에서 흔히 하는 디지털적 전략으로 쇼를 펼치지 않았다. 생로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편안함을 선물했고, 우리를 꿈결 같은 공간으로 초대했다. 생로랑 런웨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안토니 바카렐로의 따뜻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당신도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I Wish You Were Here).”

가스파르 노에 감독이 연출한 생로랑의 2021 패션 필름.

가스파르 노에 감독이 연출한 생로랑의 2021 패션 필름.

한편 그로부터 15일 뒤 안토니 바카렐로는 휴식 같은 런웨이 쇼와는 정반대의 감성을 담은 패션 필름을 내놓았다. 패션 필름 <SUMMER OF 21>은 가스파르 노에(Gaspar Noè) 감독이 연출한 패션 필름으로 이탈리아의 20세기 장르 영화를 가리키는 ‘지알로(Giallo)’와 60년대의 생로랑 스토어를 연상시키는 붉고 흐릿한 벨벳 질감의 무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 샬럿 램플링(Charlotte Rampling)은 사원 같기도 궁전 같기도 한 그로테스크한 공간에서 불안한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비롭고 기묘한 사제’로 출연한다. 영상은 공포스러운 무언가에 쫓기며 비명을 지르며 어두운 숲을 달리는 모델로 시작되는데, 그녀가 도착한 집 안에는 60년대 스타일의 플로럴 프린트에 깃털을 장식한 튜닉을 입고 붉은 벽으로 된 기이한 복도를 걷는 샬럿 램플링과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소녀들이 판타스틱한 공간을 부유하고 있다. 환상적인 공간과 색채, 이브 생 로랑 특유의 의상이 어우러진 화면은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필름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영상의 마디마다, 공포와 즐거움 사이를 흐르는 도나 서머(Donna Summer)의 ‘I Feel Love’인데, 이는 음악 감독 세바스티앙(SebastiAn)의 노련한 선택이었다. 이 드림팀 덕분에 영상은 더욱 짜릿하게 긴장되고, 기이한 장면 속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안토니 바카렐로의 머리와 손끝에서 탄생한 편안한 룩은 감독을 만나 무한하게 확장되었다. 이는 한계를 두지 않고, 예술적 성취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집요한 갈망이 만들어낸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고, 현재에서 또 과거를 발견하는 일. 생각의 틀을 과감히 해체하고 무한한 창의성을 믿고 나아가는 일. 이는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건 아마도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지 모른다.

패션 에디터
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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