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현아는 금빛 머리칼, 검게 그을린 피부로 무대에 서서 하이힐을 벗어 던진 채 춤을 췄다. 시간이 흘러 도발적인 빨간색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됐다가, 오늘날 다시 기이한 매력의 살모사로 변신할 준비를 마쳤다. 오직 현아이기에 가능한 무대가 곧 펼쳐질 참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현아 잘 챙겨 먹고 있는데 먹는 만큼 유지가 안 된다. 아무리 먹어도 남들보다 칼로리 소모가 빠른 편인가 보다. 컴백을 앞두고 있어 예민해진 탓도 있고.
원래대로라면 작년 8월 신곡 ‘굿 걸’로 컴백을 알렸어야 했는데 건강상 문제로 아쉽게 무산됐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겠다고 약속하고 정규 앨범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도중에 미주신경성 실신이 재발해 활동이 무산됐는데 그러면서 병이 난 것 같다. 무대는 서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당시 SNS를 통해 건강 상태를 알리자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거로 안다.
사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나 자신에게 화가 난 상태였는데, 주변에서 정말 많은 편지를 받으면서 더 이상 나를 나무라지 않게 됐다. 자신도 지하철에서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다며 편지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고, 당신의 팬은 아니지만 걱정을 지울 수가 없어서 긴 편지를 쓴다며 연락해온 사람도 있었다. 미주신경성 실신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쓰러지는 거니까 사실상 대처가 불가능하다. 어깨나 뒤통수, 광대에 상처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쉬면서 편지를 하나하나 읽었다. 천천히 준비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바로 컴백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1월 중 컴백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번 활동이 뜻깊을 수밖에 없겠다.
무대에 서지 못한 한을 다 풀 거다(웃음). 또 기대되는 게, 이번에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공동으로 타이틀곡을 작업했다. 싸이 오빠, 남자친구 던이 거의 ‘현아 팀’이 돼서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는데 각자가 가진 아이디어를 하나씩 던지니까 일이 좋은 방향으로 쓱쓱 진행됐다. 이렇게 작업해본 건 정말 처음이다. 원래 모든 일을 혼자 해와서. 돌이키면 항상 나에게 떨어진 숙제가 있었다. 언제까지 뭘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고 그거에 맞춰서 체계적으로 혼자 준비하는 식이었는데 이번엔 여럿이 뭉쳐서 시원시원하게 작업해봤다.
작년 공개한 ‘Flower Shower’도 싸이가 작곡에 참여하지 않았나.
맞다. 싸이 오빠와 워낙 ‘티키타카’가 잘 맞는다. 그리고 엄청 많이 싸우고 엄청 빨리 화해한다(웃음).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도 정말 많은 대화가 오갔다. 가끔 “자, 선수, 곧 출격해야 하는데 몸 상태는 어떤가?”라면서 문자를 보내오기도 하고.
앨범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으로 가장 많이 떠올린 그림이 있나?
매번 활동을 준비하면서 어떤 캐릭터로 보여줄지를 고민하는데 이번엔 그게 살모사였다. 처음 노래를 듣자마자 ‘이건 스네이크 송이다’ 싶었으니까. 옆에서 같이 노래를 듣고 있던 던이 “‘나보다 독한 건 없어, 살모사’란 가사 어때?”라고 슬쩍 던졌는데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살모사로 방향을 굳혔다. 살모사가 사람을 현혹시킬 정도로 외모가 독특한데 막상 독이 있어서 아무도 만지려는 생각은 못하지 않나. 그런 이중성이 나에게도 있는 것 같다. 마냥 착하고 싶다가도 무대에서만큼은 한없이 나쁜 애가 되고 싶고, 어떤 날엔 귀엽게 보이고 싶다가 돌연 섹시해 보이고 싶고.
당신을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가 ‘이중성’인가?
하나의 이미지로 국한되는 걸 싫어해서일 거다. 열려 있는 만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활동 콘셉트도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나 이런 것도 어울리는구나’ 깨닫는 경우가 많다. 뭔가를 할 때 머리를 쓰는 성격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뚜렷한 캐릭터로 무대에 서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 않는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내가 뭘 하고 왔는지 기억 못하는 편이라 무대에서 맘껏 뛰어놀려면 그만큼 연습실에서 밑바탕을 다지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대에서 거의 동물적으로 움직이는 당신을 봐온 탓인지 ‘타고난 끼’가 당신을 움직이는 거라 생각했다. 이면에 체계적인 연습이 있을 거라곤 짐작 못했다.
설렁설렁 살지 못하는 성격이다. 1년의 스케줄 표가 있으면 수업이든 다른 일정으로든 항상 가득 차 있다. 체계적으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나와 던을 두고 가장 체계적인 사람과 흘러가는 대로 유연하게 사는 사람의 만남이라며 신기해할 정도니까(웃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첫 번째 미니 앨범 <Bubble Pop!>이 세상에 나왔더라.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강렬한 출사표이자 당신을 이른바 ‘섹시 퀸’으로 만든 앨범이었다.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는 편인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다 기억난다. 그때 무대가 너무 즐거웠던 탓에 지금 이렇게 계속해서 무대에 서고 싶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무 살이었다는 사실조차 실감 못할 정도로 어렸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했다. 그때 무대를 보면 딱 봐도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게 보인다. ‘내가 최고야’, ‘내가 짱이야’라는 자신감이 숨길 겨를 없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지금과 비교하면 10년 전 가요계는 훨씬 보수적이었다. 당시 과감한 콘셉트로 나올 수 있었던 건 당신에게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내가 한 게 많지 않다. 주변에 내가 무대에서 맘껏 놀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준 전문가들이 워낙 많았다. 나는 그들을 믿고 따라가는 편이었던 것 같다.
당신 안에서 뭔가를 엿봤기에 주변에서 이를 이끌어준 건 아닐까?
그렇게 봐주면 감사한 부분이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건 매번 이런 거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예쁘게 봐주고, 안무를 주고, 곡을 써주면 나는 그걸 망가트리지 않고 공을 들여서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어린 시절 아빠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 네가 있는 거지, 네가 있어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고. 어릴 땐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매년 다른 농도로 그 말이 피부로 와닿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변에서 나를 빛나게 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늘 무대에서 더, 좀 더 잘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가장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도 주변 사람들이니까.
나홍진 감독이 영화 <곡성>을 준비하며 천우희가 맡은 ‘무명’ 역할로 당신을 생각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당신이 무대에서 내뿜는 에너지를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을 듣고 나도 문득 당신이 연기하는 무명이 궁금해졌다.
감사하게도 직접 각본을 들고 찾아와주셨다. 너무 영광스러웠지만 고사했다. 연기에 자신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무대에 욕심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아직 무대에서도 제대로 못해봤다는 생각에 시원한 기분이 아닌데… 다른 영역에 발을 디디고 싶진 않은 기분이었다.
의외다. 당신이라면 무대에서 풀 여한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무대는 서도 서도 갈증이 있는 곳이라. 너무 매력적이고, 너무 무한한 곳이다.
그 매력을 가장 처음 느낀 최초의 순간을 기억하나? 초등학생 때 장기가 너무 없어서 응모하는 오디션마다 떨어지니까 아빠가 춤을 배워보라고 조언했다. 학원에 다니면서 방송 안무를 배웠는데 어느 날 동대문 두타와 밀리오레 앞 작은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 그 어떤 ‘기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연습했던 걸 무대에 올렸을 때의 쾌감, 다음에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
사람들이 당신에게 품는 흔한 오해는 무엇인가?
너무 많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가십이나 오해가 이젠 너무 자연스럽다. 어떻게 보면 슬픈 거지. 나를 둘러싼 진실이 아닌 것들에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이게 된 거니까.
초연해지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렵지도 않았던 것 같다. 주변에 진짜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일단 팬들이 가장 그렇다. 내가 뭘 해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의리를 지키면서 옆에 있어주니까.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있나?
어쩌면 가족 이상으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스태프인데 ‘불쌍해’, ‘짠해’라는 말을 이상하게 자주 듣는다. ‘나는 다 가졌는데 왜 짠하지?’ 하고 혼자 한참 고민하다 왜 불쌍해 보이는지 물으면 그냥 모르겠다는 답만 한다. 아마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걸 옆에서 피붙이처럼 늘 보니까 그러는 것 같다.
작년 가을 어쩌면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일 던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때 여자친구인 현아에게 던 본인은 어떤 존재인지 물었는데 정신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 답하더라. 덧붙여 여태 친절한 남자가 아니었지만 당신을 만나고 한없이 친절해졌다고(웃음).
본인도 알고 있군(웃음).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던은 모든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사람 같다. 삶의 원동력일 만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죽이 잘 맞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는 친구이고, 음악적 자극을 주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내가 슬픔에 빠졌을 때 제일 빨리 꺼내줄 수 있고, 지칠 때면 너무 나무라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면서 ‘자, 앞으로 걸어봐, 어때, 뛸 수 있겠어?’라고 힘을 주는 사람이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다. 던이 없는 세상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니까.
요즘 직업인으로서 본인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있나?
‘너 지금 몸 어때?’라는 질문. 아프고 나서부터 매일 몸 상태를 체크하게 된 것 같다. 이전에는 나에게 너무 무심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아니야, 할 수 있어’라고 욕심을 부리면서 뭐든 결국은 하고야 말았다. 요즘엔 지금 괜찮은지, 잘 지내고 있는지 같은 질문을 가볍게 툭툭 던진다. 더구나 컴백도 앞두고 있어서. 운동선수가 경기장에 섰을 때 몸 상태가 완벽해야 경기를 잘 끝낼 수 있듯 지금 내 몸을 최대한 잘 돌보려 하고 있다.
그럼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나?
좀 추상적이지만 ‘행복해?’라는 질문. 뭐가 됐든 결국 우리 모두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들이니까. 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계속 물으면서 그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하루가 끝날 무렵 던과 손잡고 짧게 산책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집에서 쉬면서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이렇게 내가 행복한 이유들을 생각하는 거다.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 같나?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선 조금 알 것 같다.
1월 28일, 지면에 실리지 않은 현아의 B컷이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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