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진 수향 씨 (임수향)

임수향이 야무지다고 하면 그녀의 오랜 친구들은 웃을지 모른다. 드라마 속 그녀는 늘 절실해 보였다. 그 간절함으로 결국에는 해피 엔딩을 쟁취하고 마는 여자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클래식한 플래드 패턴의 갈색 테일러드 재킷과 팬츠는 프로엔자 스쿨러, 페도라는 신저 제품.

MBC 드라마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1회부터 본방송으로 시청한 팬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밤 10시가 평일 미니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시각이었는데, 방송사 따라 9시대로 앞당겨진 지 좀 됐다.

임수향 우리 드라마는 원래 밤 9시 30분 시작이었다가 중간에 9시 20분으로 당겨졌다. 어떤 날은 9시에 시작한 적도 있고. 태풍 뉴스특보 때문에 결방한 날도 있다(웃음).

오랜만에 본방송으로 보는 드라마가 생겼는데, 10시보다 일찍 시작한다는 점을 자꾸 잊고 뒤늦게 보게 돼서 재방송도 자주 찾아봤다. 드라마가 끝나도 밤 10시 30분밖에 안 되니까 ‘왜 이렇게 빨리 끝났지?’ 싶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다시 보면 더 재밌는 작품이다. 감정선이 미묘해서, 다시 보면 놓친 것들이 새삼 드러나더라.

형제 둘에게 사랑받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여자로 등장했다. 사실 형제가 한 여자를 두고 신경전을 펼친다는 점이 파격적인데 이상하게도 ‘막장’ 같은 인상은 별로 없었다. 이야기의 주 배경인 양평의 아름다운 풍경도 좋았고, 고전적인 분위기여서 오히려 신선했다. 처음엔 예지가 그 정도로 기구한 삶을 산 여자인지 몰랐다 (웃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느낌이 좋았고, 옛날 정통 멜로 느낌이나 이 드라마가 지닌 톤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멜로보다 각각의 인물이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인생극 느낌이 더 컸다. 사랑에도 상대를 가져야만 하는 사랑, 가지지 못해도 지켜봐주는 사랑, 인간으로서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마지막에 가서 ‘아, 내가 그때 가장 예뻤구나’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드라마라고 받아들였다.

배우 지수가 문자 그대로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남자로 출연했다. 교생으로 만난 선생님을 오래 지켜보고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부잣집 아들이면서 인성까지 좋은 남자. 실로 유니콘 같은 존재인데 하필 첫사랑을 형수로 맞이하여, 형수를 형수라 부르지 못하고 계속 ‘샘’이라 부르는… 그런 사람이 어딨을까? 지수가 연기한 환이를 예지는 계속 부정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야 예지가 처음으로 환이를 인정하고 알아준다. 그 두 남녀는 정말 소울메이트 관계인 거다. 촬영장에서 보면 지수는 환이보다 더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 있다. 하석진 오빠는 드라마 속 캐릭터의 어른스러운 느낌과 비슷하고. 물론 그러다 가끔 꾸러기 같은 표정을 보여주는 게 매력 있다.

책이 나올 즈음이면 드라마가 종영한 후다. 당신이 연기한 예지라는 여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나? 그냥 다른 남자 만나서 그간의 일 훌훌 털고 살았으면 좋겠다(웃음). 드라마의 엔딩에 예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나는 이제 어둠이 무섭지 않아. 힘든 일은 또 있을 거야. 다시 아파지기도 하겠지. 하지만 기억할게, 내가 얼마나 사랑받은 존재인지. 그럼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식의 내용이다.

검정 튜브톱 롱 드레스는 아크리스, 실크 칼라 장식의 턱시도 재킷은 마그다부트림 by 무이 제품.

데뷔작인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신기생뎐>의 영향이 워낙 큰 탓인지 ‘사연 있는’ 인물을 자주 맡는다는 느낌, 그럼에도 야무진 여자라는 인상이 있다. 야무진 건 <신기생뎐>에서 특히 그랬다. 그런데 사연 없는 주인공은 없지 않나?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는 괜찮아지지만 그전까지는 비극적인 삶을 산 여자를 자주 맡은 것 같긴 하다.

막 데뷔하자마자 장편 드라마의 주연으로 시작해서 이후 오디션 과정도 없이 작품을 해온 것으로 안다. 신인 때 오디션을 봤다면 어떤 연기를 주로 선보였을 것 같나? 그래도 연기 시작한 초반에는 오디션을 보러 다녔지. 어렴풋한데, 오디션은 잠깐 사이에 강렬한 느낌을 줘야 하니까 울거나 감정을 쓰는 연기를 잘했던 것 같다. 대학 입시 때는 <돈키호테>의 여주인공인 알돈자 연기를 했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거리의 천한 여자.

수험생이 알돈자 연기를 하는 게 일반적인 일인가? 예고에서는 공연을 많이 하니까. 알돈자가 돈키호테에게선 ‘공주님’ 소리를 들으며 삶의 희망을 좀 품었는데, 자신을 작부 취급하는 남자들에게 희롱당하고서 상처받고 분위기가 달라지는 장면이 있다. 다시 공주님이라고 떠받드는 돈키호테에게 ‘거짓말! 난 천하고 보잘것없는 여자란 말이에요!’ 식으로 절규하는 독백. 그러고 보니 전부터 그렇게 처절하고 힘든 삶을 사는 인물에게 잘 끌렸다(웃음).

흰색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팬츠는 우영미 제품.

작년에 MBN 드라마 사상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으며 성공한 <우아한 가>에서는 재벌가 외동딸 역이었다. 당당하고 똑똑한 여자인데, 어릴 적 어머니가 살해당한 아픔에 출생의 비밀까지 있었으니 사연다운 사연이었다(웃음). 실제 당신 인생은 어떻게 흘러왔나? 이것저것 아주 많은 걸 시도하고 경험한 편이다.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는데 자꾸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1년에 한 번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해서 내가 좀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엄마는 그때마다 설득하느라 애쓰셨다. 그냥 교육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서는 얼마 안 되어 돌아왔고, 돌아와서도 그냥 잘 살 수 있는데 연기하겠다고 회사며 오디션장이며 찾아다녔고.

모험가 기질이 있나?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 작품 선택할 때도 그런 편이다. JTBC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같은 경우도 잘못하면 ‘성형 미인’이라는 프레임만 남는지라 걱정을 많이 했다. 그때 회사에서 회의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회의 끝에 어떤 이유로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렸나? 일을 할 때 항상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잘 따져보려 한다. 내가 이 작품에서 뭘 가져가고 싶은지, 뭘 보여주고 싶은지가 명확하면 도전해볼 만하다. 작품이 잘 안 됐을 경우 안 좋은 이미지만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드라마의 메시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어리고 성실한 역할도 해보고 싶었고. 결론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가죽 벨트를 더한 갈색 테일러드 재킷은 아키라나카 by 아데쿠베, 검정 터틀넥 톱은 아크리스, 슬릿 장식 롱스커트는 미우미우 제품.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에 관해 ‘작품에서는 사연 많아 보여도 실은 부유한 집 딸’ 식의 기사를 본 듯하다. 그런가? 어릴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긴 했다. 오빠가 둘인데, 늦둥이 막내딸이라 사랑도 듬뿍 받고 자랐다. 10년 가까이 연기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고 지낼 수 있었던 건 가족의 사랑과 든든한 친구들 덕이 크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전히 친하다. 그 친구들이 나 때문에 다 같이 친구 사이가 됐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사회생활 하며 생긴 친구들이 하나의 패밀리가 돼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

인간관계를 길게 가져가는 편인가? 데뷔 후 매니지먼트도 쭉 그대로다. 10년 동안 대표님도 바뀌고, 회사명도 바뀌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회사 구성원이 자꾸 바뀐다(웃음).

관계에 있어선 굳이 모험을 하지 않나? 매니지먼트는 사실 인간관계라기보다 비즈니스 문제이기도 할 텐데. 한번 맺은 연을 쭉 지키는 게 당신의 의리인가? 내 사람이 되면 잘 놓지 못하나 보다. 뭔가 불만이 있어도 다른 곳, 다른 사람 곁에 가면 또 다른 불만이 생길 것이다. 그럴 바엔 안정감을 주는 내 편이 낫다.

친구와의 모습은 MBC <나 혼자 산다>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쉬는 날이면 강아지들과 TV 보고, 친구들 집으로 불러 같이 라면 끓여 먹고. 그런 게 즐겁다.

짙은 갈색의 케이프형 트렌치코트와 프린지 장식의 점프슈트, 검정 가죽 부츠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 제품.

임수향과 예능이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는 제법 엉뚱한 면도 있는 것 같은데? 나, 예능 좋아한다.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 출연 꽤 많이 했다. <런닝맨>도 몇 번 나갔고, <미추리>, <한끼줍쇼>, <아는 형님> <인생 술집>… 처음엔 드라마 이미지 때문에 다들 자꾸만 나를 어둡거나 차가운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서 예능 출연을 결심했다. 내가 일할 때는 빈틈이 있는 걸 싫어하지만, 일상에서는 빈틈과 구멍이 무척 많다. 어쨌든 그것도 나니까 진짜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예능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남을 웃기는 일이 쉽지 않은데, 나도 은근 웃기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이다(웃음).

또 어떤 욕망이나 갈증이 있나?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도 하고싶고,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는 갈증은 조금 있다. 연기에 대한 갈증은 늘 있고. 하지만 목표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무탈하게 살면 좋겠다. 20대 때는 뒤숭숭하고 불안할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편안하다. 앞으로도 주어지는 게 있으면 치열하게 해내겠지만, 거기에 눈이 멀어 주변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원하지 않는다. 주변을 잘 살피며 같이 잘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렸을 적 꿈을 어느 정도 이룬 거니까.

10년 가까이 일해보니 어떤 생각이 가장 크게 남나? 누구에게나 기회의 순간이 오는 것 같다. 그 순간을 어떻게 잘 잡느냐가 자기 몫이고, 얼마나 준비돼 있느냐의 문제인데. 연예계에서는 나보다 조연이었던 동료가 어느 날 더 잘 되고, 누구는 한 작품으로 갑자기 잘 되고, 그러다 또 엎치락뒤치락하고 그런 일이 많다. 그러는 와중에 연예인은 자꾸 속는 일이 생긴다. 주변에서 잘한다고 해주고 좋은 말만 들려주니까. 이러저러한 그 모든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 뚜껑 열기 전까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당신의 인생에 결정적 기회는 몇 번이나 온 것 같나? 사실 작품을 할 때마다 ‘이게 기회야’ 한다(웃음). 잘 안 되면 그건 결과적으로 기회가 아니었던 셈이고, 기회를 기회답게 만드는 것도 결국 자기 하기 나름이다.

감독이나 작가에게 들은 코멘트 중 기억에 남는 것 있나? 뭐… 이번 드라마 감독님이 ‘너는 나중에 진짜 대배우가 될 거야’ 하셨다. ‘지금 네 나이에 이 정도를 해내면 5년, 10년 후에는 정말 큰 배우가 돼 있을 거야’라고.

그건 지쳐 쓰러졌던 사람도 일으켜 세울 황홀한 멘트인데? 전문가의 눈이 맞는지, 5년, 10년 후 임수향을 지켜봐야겠다. 그렇게 칭찬해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