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W 런웨이에 등장한 메이크업 판타지.
블랙 아이라인의 귀환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아이라인이 도드라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블랙 라인이 런웨이를 물들였다. 모스키노와 디올, 미우미우는 속눈썹과 아래 속눈썹의 바깥 라인이 닿는 지점을 연결한 ‘아우터 윙’ 형태를 선보였고, 돌체&가바나와 마크 제이콥스는 아이라인을 관자놀이 방향으로 길게 빼 우아한 무드를 강조했다. 발렌티노는 영화 <블랙 스완>에서 영감을 받은 듯 선과 면을 적절히 활용했고, 스텔라 매카트니는 눈두덩 중앙 부근에서 눈썹 라인 쪽으로 쓱 한 줄 그어 미니멀한 룩을 완성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상상력을 더한 재미난 룩도 쏟아졌다. 구찌는 수채화로 그린 듯 블랙 아이라인의 텍스처를 볼까지 떨어트려, 마치 눈물이 흐르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고, 요지 야마모토는 모델의 눈가에 어린아이가 아이라이너로 그림 놀이라도 한 듯한 독특한 메이크업을 선보였다. 베라왕은 마치 속눈썹에 날개라도 단 듯 아이라인과 소품을 적절히 활용했고, 마르코 드 빈센초 쇼를 담당한 도미닉 스키너는 날카로운 눈꼬리를 둥글린 듯한 컨투어링 곡선으로 클래식한 캐츠아이를 좀 더 순수하게 풀어냈다. 블랙 아이라이너 하나만 가지고 이렇게 다채로운 룩을 표현할 수 있다니, 역시 세계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라 할 만하다.
노-메이크업 메이크업
몇 시즌째 이어진 이 말장난 같은 메이크업 트렌드에 살짝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좀 더 ‘글로시’해졌다는 거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피부를 연출한 발맹 쇼의 메이크업은 모이스처라이저와 파우더 하이라이터를 믹스해 탄생했다. 다량의 보습제에 아주 소량의 파우더 하이라이터를 섞은 다음 얼굴 전체에 얇게 발라, 막 세안하고 나온 듯 반짝이는 피부를 완성했다. 샤넬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메이크업 & 컬러 디자이너 루치아 피카는 샤넬 쇼에서는 몇몇 모델의 광대뼈와 눈두덩에 ‘바움 에쌍씨엘(트렌스페어런트)’을 발라 물기 어린 광채를 극대화했다. 하이더 애커만 쇼의 백스테이지를 이끈 린지 알렉산더는 다양한 텍스처의 베이스 제품을 활용했다. 파운데이션과 맥 ‘스트롭 크림’을 믹스해 피부에 얇게 깔고, 광대와 콧대 등 얼굴에서 튀어나온 부위에만 맥 ‘스트롭 페이스 글레이즈’를 한 번 더 덧발라 화려한 광택을 입혔다. 서로 다른 광택감이 얼굴 위에서 충돌하며, 이질적이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이 깃들었다. 반면, 파운데이션을 아예 사용하지 않은 쇼도 있다. 프로엔자 스쿨러는 컨실러와 소량의 하이라이터만 사용해 투명한 피부를 완성했고, 살바토레 페라가모도 모델 얼굴에 보습제만 바르고, 입술에 자연스러운 색을 더해 날것의 피부가 주는 ‘힘(Strong)’을 오롯이 드러냈다.
눈가에 내려앉은 예술적 기교
지난 시즌엔 극단적인 컬러와 글리터 텍스처를 이용한 기교가 많았다면, 이번엔 좀 더 실험적이고 대담하다. 지암바티스타 발리와 하펀은 크리스털과 보석을 활용해 눈가에 샹들리에 같은 장식을 더했고, 에르뎀과 시몬 로샤는 메탈릭 포일을 눈가에 자유롭게 붙였다.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메이크업 아티스트 테리 바버는 ‘통제된 무작위성’이라 말한다. 치밀하게 계산된 메이크업 테크닉으로, 얼굴에 따라 장신구 모양을 신중하게 고려해 연출했다는 의미다. 지암바티스타 발리와 하펀 쇼를 담당한 이사마야 프렌치는 이 실험적인 기교에 대해 “아름답고 유기적이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요소를 이용해 메이크업을 하면, 보다 근사한 룩을 완성할 수 있죠”라 힘주어 말한다. 쿠튀르를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4대 도시 컬렉션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싶다. 컬렉션은 말 그대로 판타지, 그 자체니까.
뱀파이어 로맨스
미국 드라마 <뱀파이어 다이어리> 혹은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뱀파이어로 등장하는 이들의 입술을 떠올려보자.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에 붉게 올라온 버건디색 입술. 그 입술이 런웨이를 오싹하게 물들였다. 19세기에 지어진 뉴욕의 한 교회에서 쇼를 연 로다테는 마치 뱀파이어 신부를 연상시키는 룩을 연출해 화제였다. “1992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드라큘라> 속 위노나 라이더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립라이너로 입술산을 과장되게 그리고, 나스 ‘벨벳 매트 립 펜슬(트레인 블루 벨벳)’로 색을 채웠죠.” 메이크업 아티스트 제임스 칼리아도스의 설명이다. 이에 반해 펜디의 메이크업을 주관한 피터 필립스는 립라이너를 사용하지 않고 딥 플럼 톤의 립스틱을 입술에 툭툭 바르고 스머지해 조금 더 쿨한 무드로 연출했다. 뭐든 정답은 없다. 언제나 선택은 당신의 몫!
스파이더 우먼
자칫 잘못하면 과해 보이는 아이라인과 달리, 마스카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위아래 꽉 채워 발라도 촌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랑방과 몰리 고다드, 셀린느, 록의 쇼에 선 모델들도 마찬가지다. 아이 메이크업에 색을 배제하고 오직 마스카라만 이용해 위아래 속눈썹을 ‘떡지게’ 표현했는데, ‘쿨한 언니’ 그 자체다. 별다른 스킬도 필요 없다. 오직 마스카라와 손이 이끄는 대로 여러 번 덧바르면 끝. 좀 더 상큼한 무드를 자아내고 싶다면 컬러 마스카라를 활용한 오프화이트와 울라 존슨 쇼를 참고하길. 컬러 마스카라를 사용할 때, 위 속눈썹 혹은 아래 속눈썹에만 얇게 바르거나, 구획을 나눠 중간부터 끄트머리에만 살짝 터치하면 위트 있어 보인다.
레드 립의 유혹
런웨이에서 레드 립 메이크업은 언제나 유효하다. 프런트로가 아닌 그 어디에 앉아도, 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델은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작년 이맘때 다룬 레드 립은 그 텍스처가 매트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다채로운 질감과 표현 방식이 눈에 띈다. 제이슨 우와 지방시의 런웨이에 선 모델들은 하나같이 보송보송한 레드 컬러를 입술에 꽉 채워 발랐다면, 오스카 드 라 렌타와 MSGM의 모델들은 마치 고전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처럼 글로시한 레드 립을 도톰하게 바르고 등장했다. ‘K-Beauty’의 인기를 타고 4대 패션위크까지 진출한 자랑스러운 그러데이션 립 표현 기법도 빼놓을 수 없다. 끌로에는 입술 전체에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입술 라인만 흐트러트리듯 연출했다면, 16 알링턴은 입술 안쪽에 립스틱을 바르고 바깥으로 블러링하는, 정말 한국 여자들이 제일 잘하는 그 꽃잎 입술을 표현했다. 컬러의 농담은 천차만별이지만,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깨끗한 피부에 레드 립스틱을 바른 모델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모던하고 세련돼 보인다.
눈 위에 나빌레라
매 시즌 ‘립, 립, 립’을 외치며 입술 메이크업을 강조했지만, 이번 시즌만큼은 예외다. 마스크로 입술을 가릴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형형색색의 비비드 컬러가 눈가에 집중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쇼는 이사마야 프렌치가 진두지휘한 매티 보반이다. 버블검 핑크와 생생한 오렌지색을 타원형 형태의 투톤으로 연출해 아티스틱한 무드를 더했다. 아시시는 옐로우와 그린, 퍼플 등 다채로운 색을 모델의 눈가에 최소 두 가지 이상 레이어링해, 마치 60년대 공상과학 영화에서 나올 법한 룩을 연출했고, 셀프 포트레이트는 네온 오렌지색 아이섀도를 붓으로 그은 듯 터치감 있게 표현했다. 지금껏 아이 메이크업에 잘 사용하지 않던 블루 컬러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팬톤에서 선정한 올해의 색이 ‘클래식 블루’여서인지, 톤다운된 블루 컬러가 아틀랭과 타다시 쇼지, 뷰티풀 피플, 카이단 에디션스의 쇼에 선 모델들의 눈가에 아롱졌다. “런웨이에선 형태만 보이겠지만, 메이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브러시의 세밀한 터치감을 느낄 수 있어요. 마치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요.” 타다시 쇼지 쇼의 리드 메이크업 아티스트 다니엘 마틴의 설명이다. 런웨이 위의 모델들처럼 눈가 전체를 파랗게 물들이는 게 부담스럽다면, 아이라인으로 활용해보길.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묘하게 신비한 무드를 연출할 수 있다.
반짝반짝 눈이 부셔
가까이하고 싶지만 가까이하기 어려운 그 이름, 글리터. 매 시즌 글리터를 활용한 룩이 무대에 오르지만 과한 모습 탓에 접근이 어려웠는데, 이번 시즌엔 유독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웨어러블한 룩이 많이 등장했다. 그 선두주자는 크리스토퍼 케인이다. 아주 미세한 실버 입자가 들어간 글리터 글로스를 눈두덩에 살짝 얹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부위에만 시머를 소량 터치해 그 어느 컬렉션보다 섬세한 글리터 메이크업을 완성했다. 조금 더 대담하게 글리터를 활용하고 싶다면 가브리엘라 허스트 쇼를 기억하길. 쌍꺼풀 라인 위에만 골드 글리터 입자를 발라 전혀 과하지 않지만 글리터의 존재감은 분명하게 드러냈다. 글리터 메이크업의 끝판왕이 궁금하다면 마르니 쇼를 볼 것. 모델의 이마와 코, 볼은 물론 젖은 머리카락에까지 글리터를 흩뿌려, 판타지적인 요소를 드러냈다.
- 뷰티 에디터
- 김선영
- 포토그래퍼
- JAMES COCHRANE, 장현우(제품)